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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자료 1> 창세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박종태
I. 창세기는 어떤 책인가?
1. 누가 썼나?(who)
창세기 자체에는 저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한결같이 처음 다섯 권(토라)을 모세가 기록한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수 8:31; 왕하 14:6; 대하 25:4 등) 그리고 유대 전승도 오경 전체가 모세가 쓴 것임을 의심치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창세기를 비롯한 처음 다섯 권의 책의 내용이 일관된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상 토라 또는 율법서를 모세 오경이라 부른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서를 모세의 글이라고 말씀하였다는 사실이다.(눅 24:44, 마 8:4, 막 12:26, 마 19:7-8).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 우리는 창세기 저자를 모세로 보기로 한다.
저자가 모세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를 읽도록 하자.
2. 언제 썼나?(when)
창세기 저자를 모세로 볼 때 창세기가 기록된 때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왕상 6:1에서 솔로몬 성전 봉헌 시기를 출애굽 480년이라 하고 있다. 역사적 자료로 확인해 보면 이 때는 주전 960년 경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는 주전 약 1440년 경 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 마지막 어간에 기록했다. 그렇다면 대략 주전 1400년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 전에 기록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옛날 쓰여진 책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잣대가 아닌 그 시대의 잣대를 가지고 읽도록 하자.
3. 왜 썼나?(why)
모세는 지난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왔던 그래서 노예근성이 뿌리 깊이 박혀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다. 애굽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깊이 뿌리박힌 저들을 이끌고 있다. 모세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갈 것인가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 바람으로 지금 창세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우선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고자 했다. 특히 저들이 섬겨야 할 신은 오직 한 분 여호와이심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 분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분께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신은 오직 한 분, 저들이 경배해야 할 신은 오직 한 분 여호와시라는 것을 잊지 말고 오직 그분만 섬기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고자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해 택하신 특별한 존재임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비록 지금까지 긴 세월 노예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되어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주 특별한 민족으로 택하시고 남다른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임을 알게 하고자 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선민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선민답게 살아야 함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 구원역사를 위해 부름 받은 존재로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세 가지 기록 목적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를 읽도록 하자
4. 내용은 무엇인가?(what)
창세기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의 시작에 관한 내용이다. 1장에서 11장까지를 말한다. 이 내용은 성경 전체의 서론이기도 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기록이라고 볼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왜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표적인 4 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이 4 이야기는 사건 중심으로 전개된다. 1) 창조 이야기, 2) 인류 타락 이야기, 3) 홍수 심판 이야기, 4) 홍수 심판 이후 계속되는 범죄 이야기 즉 바벨탑 사건 이야기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 역사의 시작에 관한 내용이다. 12장에서 마지막 50장까지를 말한다. 이 내용은 성경의 구원 역사의 기본 방향을 말씀해 주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시고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려 하시는지 그 방법론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표적인 4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이 이야기는 사람 중심으로 전개된다. 1) 아브라함 이야기, 2) 이삭 이야기, 3) 야곱 이야기, 4) 요셉 이야기이다.
이 내용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주와 인류의 시작 (구원 역사 이전: 4 사건 중심) /1:1-11:32
1) 창조 이야기/ 1:1-2:25
2) 타락 이야기/ 3:1-5:32
3) 홍수 이야기/ 6:1-9:29
4) 바벨탑 이야기/ 10:1-11:32
2. 구원역사의 시작 (구원 역사: 4 사람 중심) / 12:1-50:26
1) 아브라함 이야기/ 12:1-25:18
2) 이삭 이야기/ 25:19-26:35
3) 야곱 이야기/ 27:1-36:43
4) 요셉 이야기/ 37:1-50:2
5. 기타(명칭 문제)
창세기는 오경의 첫 번째 책이지 독립된 한 권의 책이 아니다. 따라서 독립된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책의 첫 번째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로 이 책의 이름을 삼아 불렀다. 그것이 “베레쉬트”(태초에)라는 말이다.
그런데 후에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헬라어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70인 역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창세기의 첫 단어가 아니라 중심 단어인 히브리어 “톨레도트”(계보, 자손)을 헬라어로 번역한 “게네세오스”라는 말을 제목으로 내 걸었다.
이 후에 라틴어 번역본인 벌게이트와 여타 영어, 독일어, 불어 등 각종 번역에서 이것을 따르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도 Genesis라고 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우리 한글 성경에서도 이것을 번역해서 “창세기”라고 했다.
II.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기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읽자.
창세기에는 여러 가지 기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기원에 대한 답변을 아주 확실하고 단호하게 보여준다.
1)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내용을 보여준다.
첫째, 우주의 기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창 1:1-25에 보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말씀해 준다.
둘째, 인류의 기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창 1:26-2:17에 보면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말씀해 준다.
셋째, 가정의 기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창 2:18절 이하를 보면 가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말씀해 준다.
넷째, 구원의 기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창 12 이하를 보면 인류와 타락한 역사의 구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말씀해 준다.
2) 사람이 시작한 내용을 보여준다.
첫째, 죄의 기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창 3장에 보면 어떻게 죄가 시작되었는지를 말씀해 준다.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이다.
둘째, 인간 문명의 기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창 4장 이하를 보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문명을 만들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셋째, 나라와 민족의 기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창 10장을 보면 어떻게 이 땅에 민족들이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라들이 생겨났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넷째, 언어의 기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창 11장을 보면 어떻게 이 땅에 그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 신학적 주제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읽자.
창세기의 신학적 핵심 주제는 세 가지이다. 즉 하나님, 인간, 그리고 구원이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째, 창조주이시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인간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분, 경외해야 할 최고의 신으로 설명되고 있다.
둘째, 유일신이시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라는 것이다.
셋째, 자기를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2) 인간은 누구인가?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파트너로 소개되고 있다.
둘째, 인간은 타락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단에게 미혹되어 하나님께 불신앙과 불순종하여 죄를 범했고,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지게 되어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되었고, 죽음을 맞게 되었고,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3) 구원은 무엇인가?
인간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 박종태목사
<자료 2> 창세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정성욱
창세기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근본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앞 글에서도 이미 밝힌 바 있듯이 창세기는
1.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고
2. 하나님의 약속/예언-성취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고
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위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게 될 때 가장 중요한 구절은
창세기 1장 27-28절이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화란 개혁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창 1:28절을 문화명령 (cultural mandate)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창 1:28절은 문화와 관련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과 관련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생육/번성케 하시고, 그들이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그들이 온 만물들을 다스리도록 허락하심으로써 큰 나라를 이루도록 복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나라를 구성하는 세가지 요소는 국민, 국토, 국권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에게 국민, 국토, 국권을 복으로 주심으로 큰 나라를 이루라고 위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국민, 국토, 국권이 나라의 형식적/구조적 원리라면, 그 나라의 내용적 원리는
창 2:16-17의 말씀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선악과 금명은 나라의 내용적 원리를 규정하는 헌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복으로 주셔서 이루게 하시는 나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에서 나타나는 자유의 원리와 "먹지 말라" 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책임과 "정녕 죽으리라"에서 나타나는 불순종에 대한 형벌의 원리에 기초한 나라여야 함을 헌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순종하며 순종의 한계내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인 것이죠.
이 원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17절에서 밝힌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자유롭게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누리는 '의'가 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자유롭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강이 유지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자유롭게 순종할 때에 희락이 넘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고, 무상으로 모든 것을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하여 하나님 나라의 헌법을 위반함으로써 죄와 불의와 원수관계와 슬픔과 저주가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와 사망의 저주가운데 사람을 그대로 내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로 보내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바로 창 3장 15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4장부터 11장까지는 죄로 인한 비극적인 결과들이 인류에게 번져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12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아담에게 주셨던 복과 같은 내용의 복인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나라 건설의 약속을 주시고, 또 그 나라를 통해서 타락된 인류에게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복이 전달되게 하시겠다는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을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과 약속이 이삭과 야곱의 삶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또 계승되어지는 내용이 창세기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12장 이후에는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혹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약속인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는 약속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창 18:18; 창 22:18; 창 26:4; 창 28:14)
여기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하게된 하나님 나라의 복 즉 하나님의 통치에 자유롭게 순종함으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되는 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고 중생함으로써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성경 전체의 얽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 3장 25-26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가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리라"
바울 역시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려 함이니라" (갈 3:8-9, 14)
창세기는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창세기를 바르게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장엄한 경륜과 지혜를 체험하며 누리게 됩니다.
정성욱 교수/신학마당(복음주의 신학과 영성)
<자료 3> 창세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배현주
창세기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모든 후대 기록 계시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배경이 된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매우 많은 중요한 내용이 희미하게 계시되어 있다.
먼저 창세기는 몇 가지 경륜이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우주 창조에서 인간 창조까지의 기록은 하나님의 영광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 창조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사역에서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인간 창조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 주어진다.
오직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 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외모에도 어느 정도 비추어지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에 새겨졌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로 되어있다.
인간의 외모는 단지 인간의 내면을 비추어주는 형체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마음에서 빛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과도 어느정도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과 함께 주어진 개념이 계명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하나의 계명을 주신다.
그리고 창세기 3장은 그 계명에 불순종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타락했고 에덴 동산에서 좇겨 난다.
여기까지 성경의 독자들이 심도있게 살펴야 할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왜냐하면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모세가 만약 오경을 통일적으로 기록했다면 그 기록이 일관된 교리가 있을 것이다.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교리적 체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속성에 무지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서 구약 모세 오경을 매우 통일적으로 기록하셨다고 성도들은 믿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독자들은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 거하게 하시고 그때에 인류의 첫 조상에게 순종해야 할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명령하신 그 계명은 이미 인간의 존재 목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미 동일한 기록자인 모세가 신명기 8장 3절에서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 8:3)고 이스라엘 선택의 목적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주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께서 계명을 주신 목적이 동일한 기록자의 기록인 신명기에서 드러난다.
창세기는 이렇게 인간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고 있다. 실로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창세기에 면면히 흐르는 교리적 체계이다.
무엇보다 창세기는 12장 부터 벌써 언약 가운데 들어가는 아브라함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통하여서 더욱 창세기 기록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속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는 구속사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창세기 11장까지의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1장까지의 역사가 창세기 12장 이후 구속사의 배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창세기 10장에 기록 된 노아의 자손들의 계보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창 10:32)
실은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0장에 흩어진 열국 백성들에 대한 계보를 기록하게 하여서 새 언약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속을 성취하신 후에 바로 그 열국 백성들을 모으실 것을 예고한 것이다.
그렇게 창세기 10장의 계보는 의미가 없지 않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시는 메시야 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흩어진 열국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렇게 창세기 10장의 계보는 이미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 열방 가운데로 복음이 확장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구속 계시를 주로 담고 있기에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 언약이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속 받을 백성들에 대한 은혜 언약을 드러내고 있다.
창세기 15장의 은혜 언약은 신구약 전체를 포괄하는 교리이다.
그래서 그 언약 가운데 주어질 혜택은 구약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신약 시대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질 교회공동체에게도 동일하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이신 칭의 교리는 결코 사도 바울이 처음 발견한 교리가 아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은혜 언약의 한 표지로서 이신칭의 교리를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쳤다.
그것은 신구약 언약이 통일적이라는 것과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점으로 경륜의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증거한다.
그래서 구약 교회 시대에 할례와 유월절의 만찬으로 되어 있는 성례가 신약은 세례와 주의 만찬으로 방식이 바뀌었다.
그러나 그 혜택과 본질은 동일하다. 그래서 이러한 은혜 언약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하고 그의 택자들과 맺으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일방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쌍방 언약이 아니다.
일방 언약이다. 그 언약을 아브라함과 일방적으로 체결하신 분 도 여호와시요 그것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은혜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의 공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직 전적으로 주의 은혜이다.
그리고 그 언약은 역사 안에서 그 본질이 바뀌는 언약도 아니다.
은혜 언약은 신구약이 통일적이다.
창세기는 그러한 은혜 언약의 실체를 희미하게 나마 드러내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는 아브라함 언약이 어떻게 더욱 분명하게 전개되어가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창세기 구속사는 결국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교회 체제로 심화되는 이스라엘 역사의 서막과도 같다. 그렇게 창세기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율법을 세우고 새롭게 국가로 자라가는 이스라엘 공동체로 연결시키는 역사이다.
그래서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의 약전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야곱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가 어떻게 전개 될 것을 전망하고 있다.
그래서 비록 형님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요셉이 팔려 갔으나 그것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경륜으로 이끄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셨다.
그렇게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되어서 요셉의 죽음으로 마치는 창세기는 그야말로 구속의 역사에 영롱한 이슬과 같다.
창세기에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는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이제 모든 역사가 다 지난 지금 우리는 창세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부터 창세기를 살펴 보면 그 섭리적 역사의 의미들이 드러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나?
이제 요한 계시록의 문헌을 이미 받은 지금 시대 성도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 창세기는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가 잘 드러나있다.
창세기 1장의 우주 창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라는 의미는 히브리어로 “토브”로 되어 있다.
그것은 "최고의 선"으로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이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 그가 최고의 선이시다.
창조는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다. 그래서 창조는 일반 계시이다.
만물은 단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표현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주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의 서막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은 그가 창조하신 만물에 그의 선하신 속성이 계시되어 있음으로 바라보신 것을 의미한다.
인간 창조는 모든 창조의 최고의 절정이었다.
그래서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가 인간 창조에 대하여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창 2:7)고 말씀하시며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다.”(창 2:7)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창세기 2장은 인간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남과 여에게 투영되어서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드러내신다.
그런데 실은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이었다. 창조는 구속의 모형이다.
인류는 긴 역사 후에 새 언약 아래에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온 세상에 세워질 때, 비로소 아담과 하와의 창조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이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하나님의 첫 창조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대한 모형이다.
최초의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그 계명을 통하려서 인간의 실존의 목적이 드러난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 실존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 계명을 어겼다.
그들이 불순종하였다. 그리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죄는 범법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한데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그의 계명을 따라서 살게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그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고자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의 그릇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피조된 인간 실존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이다. 그 계명을 통하여서 아담과 하와의 자발적 순종을 시험하신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배도하였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불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무흠한 상태에서 순종을 요구하셨을때,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으로서 타락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의지로서는 다시는 주의 계명에 순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은혜 언약이라 불리는 두번째 언약이 체결되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피조된 인간은 불순종함으로서 교통은 끊어지고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 그것은 타락이다.
비참하고 가련한 자기 인생의 주인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벌 만을 기다려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계명에 적극적으로 불순종하여서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버린 인류의 가련함은 고아와 같이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계명을 깨닫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멸망이 임하였다.
그것은 심각한 하나님의 형상의 훼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인생들에게는 소망이 없다.
결국 인류는 계명에 불순종함으로서 그 영혼이 어두워졌고 더 이상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어느 누구도 은혜 언약 아래에 속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고 그의 계명을 따라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이 믿음의 법이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영광스럽게 회복하는 것이다.
배현주 목사/http://blog.naver.com/choys0000/220674578080
이러한 은혜 언약의 역사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도들을 통하여서 온 세상에 알려 졌지만, 이미 창세기 4장의 셋의 등장과 함께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이어지는 거룩한 후손들의 계대가 이어져 왔다.
그 계대는 은혜 언약을 계승한 하나님 나라의 계대를 드러내는 계보이다. 그 시대를 선사 시대라 한다.
비록 희미하지만 선사 시대에서도 은혜 언약 아래에 속한 참된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렸고 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희미하게 나마 선사 시대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승천하였다.
무엇보다 선사 시대를 닫고 역사 시대를 열었던 노아는 선사 시대 마지막 신자로서 역사 시대를 열어갔던 믿음의 조상이다.
그리고 노아 시대부터 아브라함 시대까지 인류는 각종 미신과 여러 다신론으로 타락해갔다.
그러나 천지의 주재이신 그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사상은 여전히 인류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모든 신관이 유일신관에서 점차적으로 다신관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므로 유일신관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신앙으로 인식되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는 인류의 기억 저편 너머에 간직되어있었던 유일신 신앙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
그는 유일신이신 여호와의 계명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언약의 백성의 시조로서 생애를 보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계대는 언약 백성의 족장으로서 그들이 애굽에서 거대한 공동체를 이룰 것에 대한 서막이었다. 그 역사가 창세기이다.
아브라함 언약 아래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약속되었고 이삭과 야곱을 거쳐 가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요셉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의 섭리적 사역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셉의 죽음과 함께 마무리 되었던 창세기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 가운데 오실 언약의 중보자를 예비하는 이스라엘 공동체 역사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