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타지 않는 떨기나무(출3:1-5)
타지 않는 떨기나무(출3:1-5)
장로 교회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총회 본부 정문에는 아름다운 로고가 새겨 있다. 그것은 바로 본문에 나오는 ‘불타는 떨기나무’이다. 그리고 그 불타는 떨기나무 주위에 ‘그러나 그것은 타버리지 않았다.’(출 3:2)라는 말씀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다(nec tamen consumebatur). 이것은 바로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모토였다.1)
그들은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온갖 핍박을 받았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바로 그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선교사였던 토마스는 우리나라 대동강에 와서 자신의 피를 뿌리며 성경을 전해 주었다(1866년). 토마스와 같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선교사였던 존 로스는 중국에서 선교를 하던 중 토마스의 순교적 헌신에 감동을 받고, 바로 한국 선교에 자신을 헌신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주의 심양을 거점으로 삼아 우리의 최초 성경인『예수셩교 신약전서』를 번역, 출판했다(1887년). 로스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개역』과『개역개정』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또한 60년 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코틀랜드 왕립 수비대가 우리를 도우러 왔다. 스코틀랜드 교회와 국민들이 ‘결코 불타버리지 않는’ 정신으로 우리에게 피땀 흘려 뿌려 준 씨앗이 우리나라와 교회의 토대가 되었다.
본문을 보면, 모세는 한 명의 목자가 되어 장인의 양떼를 치면서 호렙 산까지 이동하고 있다(1절). ‘광야 서쪽’이란 말은 ‘광야의 가장
먼 끝까지’(farthest end of the wilderness, JPS)란 뜻이다. (호주로 빗대어 말하자면) ‘아웃 백’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광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양떼와 함께 걸으며, 물과 풀을 찾고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오아시스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생텍쥐페리). 그는 양들과 자신의 목을 축이기 위한 오아시스를 찾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적실 샘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발적인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가지면서 지난 40년을 광야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놀라운 광경을 봤다(2절). 지천에 널려 있는 것이 떨기나무인데, 유독 한 떨기나무가 불타고 있지만, 불타버리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의 왕자가 전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리는데 어떻게 이런 신비로운 장면이 그의 눈에 들어왔겠는가? 그러나 현재의 모세는 느리게 살고있다. 그는 걷고 있다. 광야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꽃들과 바위들과 양들과 대화하면서 느리게~ 느리게~ 걷고 있다. 느리게 살다 보니, 옛날에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걷다 보니,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
모세는 이 신비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몸을 돌이키고 불타는 떨기나무로 향해 간다. “내가 이 큰 광경을 보리라”고 결심한다(3절). 여기에서 ‘본다’(ra’a)는 ‘집중한다, 초점을 맞춘다.’는 뜻이다. 2절에서는 ‘그냥 우연히 보았다.’ 3절에는 ‘집중하여 구체적으로 본다.’(내가 이 큰 구경을 하리라;『구역』, 1911).
그는 평소와는 전혀 다르고 낯선 장면을 보았다. 떨기나무는 인화성이 너무 강해서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활활 타버리고 재가 되는데, 이 떨기는 불타버리지 않는다. 이런 떨기를 본적이 없다. 또한 보통 불은 물질을 태워 존재하고, 물질이 사라지면 불도 사라지는데, 이 불은 꺼지지 않는다. 이런 불을 본 적도 없다. 둘 다 강력하고 질기다. 둘 다 자연세계에서 있을 수 없다. 그가 알고 있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세는 이 낯선 세계와 실재에 자신을 개방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아주 작은 만남이고, 우연한 만남이지만,모세는 새로운 세계에 마음을 연다. 대부분 인생의 결정적인 변화는 이런 조그만 만남에서 일어난다.
3:2 본문을 다시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여기에서 “주님의 사자가 불꽃 안에서 나타나시니라.”를 “주님의 사자가 불꽃으로 나타나시니라.”로 보면 이해하기 더 쉽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장면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주님의 사자가 불꽃으로 떨기나무에 임하셨으므로, 떨기나무가 안에서 타고 있었다. 보통 불은 밖에서 안으로 타 들어가지만, 여기에서는 안에서 밖으로 타고 있었다. 따라서 모세와 함께 간 양들은 가시떨기의 잎을 뜯어 먹고 있었을 것이다. 짐승들은 나무 안에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느낄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꼭 묻는 질문이 있다. 즉, “왜 하나님은 떨기나무를 선택했는가?”이다. 떨기나무는 광야에 너무나 흔하고 보잘 것 없는 덤불이다. 떨기나무의 어근(sene’)은 ‘가시 돋친’, ‘날카로운’이란 뜻을 갖는다. 이 나무는 날카로운 가시로 사람과 짐승에게 깊은 상처를 내는 나무이다.
이 점에 대해 랍비들은 이미 너무나 멋있는 대답을 만들어 두었다. “주님이 뽕나무나 향나무를 택했어도 당신은 똑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신이 물었으니 내가 대답하겠다.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 없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가시 떨기조차도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수가 없다.” 어쨌든 “왜 하나님은 떨기나무를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 때문에 사랑 받는 나무가 아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불타는 떨기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성경에서 ‘불’은 주로 고난을 상징하며, 이집트는 ‘쇠 풀무’(혹은 용광로)로 비유한다(신 4:20; 렘 11:4; 왕상 8:51). 따라서 ‘불타는 떨기나무’는 이집트에서 당하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용광로에서 불타는 것 같은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 뜨거운 용광로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불타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사 63:9; 43:2;66:12)
그러나 중세 최고의 유대인 학자인 라시(Rashi)는 떨기나무가 이스라엘이 아닌 모세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불타는 떨기나무’는 바로 모세의 고난을 상징한다고 봤다. 즉, 모세는 온갖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인간성은 불타버리지 않았고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그래서 민수기 저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한다(12:3).
이 해석도 참 좋다. 우리는 고난을 받으면 인간성을 제대로 유지할 수가 없다. 화나거나 좌절하면 안색이 확 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온유함을 잃지 않았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개인으로서의 모세와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신약의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의 예수와 공동체로서 교회를 모두 상징할 수 있다.
출애굽기 3:4에서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른다. “모세야, 모세야.” 그 부름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했기 때문에, 모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세는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실 때 도망치지 않았다. 따뜻한 목소리였다. 평생 듣고 싶어 한 그리운 목소리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하는 목소리였다. 주님 품으로 바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놓고는 가까이 다가가려니까 막으신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하나님은 이웃 집 아저씨처럼 쉬운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절대 타자로서 항상 낯설게 찾아오신다. 모세는 낯선 그분 앞에 섰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명령을 듣는다.
모세는 신을 벗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한 곳에 섰기 때문이다. 그곳이 거룩한 것은 원래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평상시 모드로 만날 수가 없다. 일상생활과 세속생활이 죄스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신발을 벗어야 했다. 즉, 자신의 존재 모드를 바꿔야 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모드를 바꾸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할 때 신을 벗었다. 상을 당하고 통곡하는 자도 신을 벗었다.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갔다.”(삼하15:30; 겔 24:17).
여기에서 모세가 신을 벗었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구원자로 불렀지만, 모세가 한 것은 신을 벗은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이 크다. 우리는 어떤 부름을 받으면, 영웅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신부터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신을 벗는 것은 내 과거의 생각과 생활 패턴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오직 은혜로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없이는 주님의 종이 될 수 없고, 예수의 참된 제자가 결코 될 수 없다. 모세는 이제 과거 80년의 인생을 근본적, 전반적으로 정리해야 했다. 80년을 돌아보면, 모세는 늘 이중적이었다. 그는 늘 정체성 위기를 느꼈다. 그는 어머니도 둘, 나라도 둘이다. 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인 동시에, 히브리 노예 요게벳의 아들이다. 양모인 공주님은 그를 죽음의 물에서 건져 주었고,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또한 생모인 요게벳은 그를 낳고 품고 젖을 먹여 주었다. 그는 이집트의 왕자이며, 동시에 히브리 레위인의 아들이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열등감과 좌절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바로가 될 수 없었다면 좌절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가
어느 날 이집트의 감독을 돌로 쳐 죽인 것은 그의 억제되고 감추어진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 어릴 때부터 장전된 마그마(magma)가 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이중적이 되면 속에서 분열한다. 또 속에서 분열하면, 모든 것이 갈등을 일으킨다. 그래서 세상도, 나라도, 일터도, 집도, 고향도, 나 자신도 싫다. 모세 스스로 ‘나는 말을 할 줄 모른다.’(혹은 ‘더듬는다.’)고 말한 것도 그의 정체성의 분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으면 새로운 통합과 융합이 생기며, 이때 모든 것을 수용하게 된다. 나의 조국, 나의 일터, 나의 집, 나의 고향,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비로소 ‘나의 모든 세계’와 참된 화해를 한다.
한국 전쟁에 참여한 영국 병사인 데이빗 스트래천이 있었다. 그는 1951년 1월 3일 경기도 고양시 들판에 있는 최전방 참호에서 유엔군의 후퇴를 지키고 있었다. 새벽녘에 중공군이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래서 총을 쐈다. 적병의 몸이 그의 위로 떨어졌으며, 그는 네 시간 동안 그의 곁에 살아 있다가 마침내 죽었다. 그 후 스트래천도 후퇴했고 전역했으며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자택 침실에서 자고 있는데 누군가 악의에 찬 눈길로 그를 쏘아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은 피 묻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바로 그가 쏘아 죽인 중공군 병사였다.
그 이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같은 환상 때문에 그는 불면증에 빠졌다. 어느 날 정신과 의사가 스트래천에게 한국에 가보라고 제안했다. 그는 한국에 와서 현재의 한국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허리띠 버클이 고장이 나서 수선 집에 들렀더니 참전 용사라는 말을 듣고 한사코 수선비를 받지 않았다. 그는 감동을 받았고, 뭔가 내면에서 뭉클한 것을 느꼈다. 그 이후에 다시는 중공군 환영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모세에게도 이런 영적 통합이 있었기에, 그는 출애굽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모드를 온전히 바꾸었기 때문에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불꽃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신발을 벗고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의 마음에 고통을 주던 모든 사건을 임재의 불꽃에 태워버렸다. 그의 불안, 걱정, 근심, 두려움도 모두 태웠다. 불꽃으로 임재하는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모든 일들을 돌아보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대부분 우리의 고통은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통을 대면하면 이해도, 용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생긴다. 보고 나면 풀린다. 모세는 자신의 모든 죄도 내놓고 태웠을 것이다. 모세는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이중성’을 이제 ‘양면성’으로 바꾸었다.
그는 이제 양손잡이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문화와 히브리 신앙을 융합할 수 있었다. 두 어머니, 두 나라, 두 문화, 두 언어, 두 신분을 다 수용하고 융합할 수 있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내 과거를 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 존재 전체를 새롭게 융합해 가는 것이다.
모세가 내면의 통합을 이룰 때, 둘 사이에 깊은 대화가 생긴다. 주님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다. 주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두 가지로 관점에서 말씀하신다.
첫째로, 하나님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자신을 소개하신다(3:6). ‘네 조상의 하나님’은 ‘모세 부모의 하나님’이란 뜻이다[단수; 행 7:32,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복수)].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전혀 낯선 새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불’로 나타났다고 하여 ‘불의 신’이 아니다. ‘시내 산’에서 나타났다고, ‘시내 산의 신’(산신령)이라 할 수 없다. 그는 자연의 신이 아니다. 그는 이집트의 신들처럼 마술이나 주술로 불러낼 수 있는 신이 아니다. 그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섬긴 하나님이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모세에게 그의 정체성의 뿌리를 일깨워 주신다(출 18:4).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 토대’이다. 역사는 한 사람이나 공동체가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토대이다. 역사적인 토대를 견고하게 가진 개인과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성경 안에 역사 이야기가 제일 많은 것은 이런 토대를 세워 주기 위해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학살(holocaust) 기념관인 야드 바쉠(Yad vashem)에 “망각은 망국의 길이며, 기억은 구원의 길이다.”라는 명문(名文)을 기록했다. 사실 “한 공동체가 그들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유일하게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J. Carroll).
이처럼 우리도 우리 역사를 올바로 기억해야 한다. 그 혼돈과 폐허에서 이렇게 일어난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신실한 신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건강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다.’로 소개한다(3:14). 이 칭호(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는 번역하기 어렵다. “아이 앰 후 아이 앰(I am who I am)”이다. “나는 나다. 혹은 나는 그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칭호이다. 이런 신의 이름이 역사에 없다. 그 어떤 언어와 신학적 공식으로도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자존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제사 밥이나 드시고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만물이 그분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 이 칭호의 가장 핵심 개념은 ‘나는 현존하는 자이다.’ 주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는 분’이시다. 또한 ‘우리와 함께(WITH)’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과거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계시고 미래를 열어 가시는 분이시다.
역사의 토대에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시련과 연단의 불길 가운데 던져진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불길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모세에게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 불길’로 오신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느부갓네살의 용광로에 던져져도 온전히 보전해 주셨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온전히 보존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의 불길에 던져졌지만, 그는 다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 민족도 지난 수천 년 동안 온갖 고난을 당했지만, 여전히 살아남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큰 시련과 고통 가운데 있지만, 우리는 불타버리지 않고 온전히 보존될 것이다.
우리 각자도 온갖 불 시험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빈다. 평생 주님을 위해 불타지만, 결코 불타버리지 않고, 온전한 인격과 삶으로 각자의 인생을 완성할 수 있기를 빈다.
1) 윌리엄 존스톤, “고대 기독교 산책-중세 시대 유럽 예술의 유형론에 나타난 모세,”박철우 역,「헤르메네이아 투데이」45 (2008), 221
김정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