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의 종결성’과 ‘성경의 이적 및 기사의 독특성’
지금도 은사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방언, 예언, 병고침, 축귀,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들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계시의 종결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로부터 나온 것에 불과하다.
1. 이적과 기사의 독특성
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 나라의 진행과 관련하여 역사 속에서 발생한 필연적인 사건으로 그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사는 그 사건의 배경 및 정황에 따라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제한적인 특성을 가진다. 이 말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이런 이적과 기사가 발생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출애굽에서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새 이스라엘의 건설이라는 역사적인 출범을 알리기 위한 매우 독특한 사건이었다. 아울러 이 사건은 유월절과 연관지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성취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홍해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동일한 의미에서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은 구약 시대의 경륜이 끝나고 신약 시대의 경륜이 시작됨을 알리고 있으며, 이때 새로운 인류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새언약 공동체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밖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적과 기사들이 비록 홍해사건이나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거국적이거나 우주적인 변화는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경영하시는 일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예수께서 행하셨고 그 제자들에 의해서 행해진 이적과 기사들에는 언제나 필연성을 동반한다. 곧 그 상황에서 그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들이다. 이것은 이적과 기사들이 자의적이거나 임의로 발생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적과 기사들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경륜과 언제나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것들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며, 그 예수님의 통치가 여전히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시적인 사건들이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보다 분명하게 이 세상에 증거될 수 있었다.
2. 계시적 사건으로서 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사들
성경에 기록된 각종 기이한 일들과 방언, 예언, 병고침, 축귀, 죽은자를 살리는 이적들은 한결같이 계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계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적과 기사들은 성경의 완성과 함께 종결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더 이상 계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적과 기사들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방언, 예언, 병고침, 축귀, 죽은자를 살리는 이적들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혹 이런 자들 중에 직통계시를 주장하거나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이적을 행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 66권의 정경성을 부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하는 사악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적과 기사들은 필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이적과 기사들이 발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경륜에 속한 교회의 회원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보호아래 이 땅에서 살고 있다. 또한 우리가 병들었을 때나 병에서 나았을 때나 우리는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택 가운데 살고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살다가 혹 고칠 수 없는 병이 들 때도 있으며,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로부터 나음을 입거나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이적과 기사에 속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속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기꾼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 나를 위해 이적과 기사를 행해줌으로써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우리가 심한 질고와 고통과 불치의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면 그것은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택을 받은 것이며 당연히 감사할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교회가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와 같이 은혜를 누리는 일들은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힐링이나 치유사역자, 혹은 중보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는 말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3-16)고 가르치셨다.
이제 우리는 은사주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마치 지금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방언, 예언, 병고침, 축귀, 죽은자를 살리는 이적들을 행할 수 있다고 미혹하는 더럽고 추잡한 사기꾼들의 속임수에 더 이상 속지 않아야 할 것이다.
http://cafe.daum.net/stigma50/El5v/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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