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거절할 수 있는가?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는 말씀을 근거로 구원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런 것입니까?
[답변]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신학 논문을 써도 수십 권은 나올 주제입니다.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도 구원에 있어 인간 쪽의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까지 작동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까지 미쳤는가 하는 부분에 관해 의견이 각양각색입니다.
그 모든 논의를 다시 점검할 수 없으니 한 번 아주 쉽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본심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지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당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이끄실 뿐 아니라 각 개인 별로도 그 인생 전부를 그 분의 뜻 안에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개인에 대한 구원의 일정도 다 정해져 있으며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역으로 생각해보면
거절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겠습니까?
아니면 완전히 거절할 수 없도록 까지 은혜를 베푸신 후에 마지막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겠습니까?
거듭난 자들의 구원의 간증을 들어보면 한결 같이 지나고 보니 정말 하나님이 일일이 세밀하게 간섭하셨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심지어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는 바로 그 때도 하나님은 은혜로 함께 하고 계셨음을 부인할래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계3:20은 언뜻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구원을 얻는 것처럼 이해됩니다만 근본적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신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한 것이지 불신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도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일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반박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절 3:19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런 해석은 무리라는 것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징계한다고 했습니다. 이미 구원을 얻은 자가 죄를 지을 때 사랑의 매를 들겠다는 것이지 구원을 취소해 심판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있으므로 “불로 연단할 금”(18절)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21절에 ‘이기는 자’라고 표현했지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가운데 불 같은 시험과 연단을 이겨낸 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단순하게 너희가 마음 문을 열고 나를 받아 들여 구원을 얻으라는 뜻으로만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셨겠습니까? 문을 열고 주님과 함께 먹는 것은 주님과의 동행과 교제를 지칭하는 것이지 구원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풍요에 안주해서 더 이상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 신자더러 열심을 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이 구절을 불신자였던 사람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래도 20절에서 주님이 문 밖에서 두드리고 사람이 문 열면 같이 먹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알기 쉽도록 비유한 말씀이지 그 자체가 구원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설명하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홀만 헌터라는 분의 그림에 남루한 거지 차림의 예수님이 문 밖에 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그 문의 손잡이가 바깥 쪽에는 달려 있지 않고 안 쪽에만 달려 있었습니다. 안에서 열어야만 영접이 되니까 본 구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문 밖에 까지 오지 아니하셨으면 어떡할 뻔 했습니까? 또 예수님이 두드리는 데 안 열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앞에도 말씀 드린 대로 문을 열 집을 골라 두드리지 열지 않을 집을 두드리겠습니까?
그럼에도 손잡이가 안쪽에만 달린 까닭은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반드시 우리의 지정의가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우리 지성과 이성으로 인식하여 의지가 작동하는 범위 안에서만 이뤄집니다. 내가 마음 문을 열고 영접하였고 믿기로 결심했으며 내 남은 여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헌신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내면적 동의와 결단을 통해 이뤄집니다. 아무리 성령의 간섭으로 인한 거듭남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깨달을 때부터 인간의 지정의가 동원된 반응이 요구됩니다.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정의가 작동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구원을 받아들인 것으로 오해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깨닫게 된 것, 영접한 것, 믿기로 결심한 것 그 모든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성경이 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했으며, 또 모든 성도는 성령의 전이라고 했겠습니까?
자유의지는 지정의에 속하는 부분이지 영혼에 속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정의를 통제하는 부분이 영입니다. 쉽게 말해 내 마음 나도 모를 때도 있고, 내 의지대로 내 감정과 지성이 작동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정의가 우리의 정신 활동을 처음부터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혼이 주장합니다. 영혼이 구체적 사고활동으로 드러난 것이 지정의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우리의 영이 사단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영이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얻으면 새로운 피조물이자 거듭난 자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거듭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새롭게 우리 속에 좌정하신 성령이 우리 자유의지를 작동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영접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고 강제로 우리의 자발적 의사와 상관 없이 믿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모든 믿은 자들의 고백처럼 불신자 시절의 모든 세월 동안에 간섭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완전한 수긍과 동의를 할 수 있게 된 후입니다. 우리의 영혼자체를 변화시키자 자유의지 자체도 그 작동 원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구원을 얻을 때에 분명히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합니다. 그러나 불신자 시절에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사단에게 조종되어 왜곡된 자유의지가 오직 하나님의 반대 쪽으로만 작동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중생 후에도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성령이 그것을 예수님쪽으로 작동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와 문답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요6-8 참조) 우리가 인식한 후는 이미 자유의지가 작동 된 후이고 지정의 범위 안에서인 것입니다.
어떤 전도자가 공원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죄책감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바로 죄의 무게입니다”라고 설교 했더니 어떤 사람이 나와서 나는 지금까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았기에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전도자가 완전한 시체 위에 수백 키로 그램 되는 바위를 얹어 놓은들 무거움을 느끼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구원과 자유의지를 신학적으로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자기가 불신자 시절에 영적으로 시체였는지 어느 정도 조금 아픈 데는 있어도 그런대로 멀쩡한 자였는지 어느 쪽으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어디를 지지하고 있습니까? 질문자는 어느 쪽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하나님의 입장에선 구원이 예정된 자라도 완전히 때가 찰 때까지 은혜를 베푼 후에 마지막에 가서 두드립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고 해버리면 예수님이 예정 안 된 자나 예정이 되었어도 전혀 준비 안된 자에게 와서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었고 인간은 그것을 거부했다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개입될 여지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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