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마다 다른 예배신학의 다양성
기독교는 2천년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긴장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는 통일성을, 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태와 그 신학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혼돈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견고히 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모든 기독교의 예배하는 공동체가 사도신경을 신앙의 기초적인 고백으로 삼는 통일성을 보이면서도 자신들의 교회만이 갖는 고유한 신앙고백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 예로써 루터교회는 자신들의 신조를 정리한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장로교의 뿌리인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영국국교회(성공회)는 '39개 신조'(the Anglican Thirty-Nine Articles)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이 그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은 신학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나 이들 모두가 공감하는 예배의 핵심은 한결같이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인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그 기본적인 뜻에서는 일치한다 할 수 있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조의 정신에 따라 그 의미의 해석과 집례의 형태들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기독교 예배의 다양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들어서면서 달라지고 있는 현상은 치열한 교파간의 경쟁과 싸움이 종식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제는 예배의 형태가 다르다고 하여 적대감을 갖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차이점을 기독교 예배의 다양성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각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의 대단원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하케 한다. 그 결과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건전한 신앙고백과 역사적 전통을 유지해온 뿌리있는 교회들은 그들의 고유한 예배 전통과 유산들을 서로 함께 나누고 교류하려는 경향이 오늘의 예배 현장에 발견된다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 기독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각 교회들의 예배신학에 서로가 주의 깊게 경청하는 태도는 기독교 예배의 일치와 다양성을 발전시키는데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은 각 교단별 예배신학자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배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어느 개인의 예배신학을 중심하여 다른 교회의 예배신학을 조명하려는 편협한 학문의 방법을 벗어 나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을 통하여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통일성을 확인하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의 예배전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의 예배신학을 이해하면서 예배의 다양성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한 교단과 자신의 교단이 가지고 있는 예배신학을 집필한 예배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1) 정교회의 예배신학-Alkiviadis C. Calivas (Holy Cross Greek Orthodix School of Theology, Brookline, Massachusetts
2) 로마 가토릭 교회의 예배신학- Theresa Koernke (미국 Washington Theological Union, Silver Spring, Maryland)
3) 루터교회의 예배신학-Gordon Lathrop (The Lutheran Theological Seminary , Philadelphia, Pennsylvania)
4)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예배신학- Leonel Mitchell (Seabury-Western Theological Seminary, Evanston, Illinois)
5)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예배신학-Stanley e. Niebruegge (Presbyterian Church USA, Franconia , New Hampshire)
6) 침례교회의 예배신학-G. Thomas Halbrook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Richmond, Virginia)
7) 재침례 교회 예배신학- LeoRoy E. Kennell (Christ Community Mennonite Church, Schaumburg, Illinois)
8) 퀘이커 교회 예배신학-Warren Ediger, (La Habra, California)
9) 감리교(Wesleyan)의 예배신학 -Mark Horst (Fairmount Avenue UMC, St. Paul, Minnesota)
10)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교회의 예배신학-Melva Costen (Interdenominational Center, Atlanta, Georgia)
11)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예배신학-Philip V. Miller (South Hills Christian Church, Ft. Worth, Texas)
12) 오순절계열(Holiness-Pentecostal)교회의 예배신학-Todd Lewis (Biola University, L Mirada, California)
13) 은사중심(A Charisma) 교회의 예배신학 -Gerrit Gustafson (Kingdom of Priests Ministries, Mobile, Alabama
1) 정교회의 예배신학(An Orthodox Theology of Worship)
정교회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현존(presence)을 강조한다. 이 현존이란 신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될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본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졌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해 세워졌으며, 성령님에 의해 지탱되며,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얻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며,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에서의 모든 회중은 일반적으로는 예배를 통하여, 혹은 특수한 방법인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게 되며, 하나님은 회중들에게 그분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정교회의 핵심은 바로 예배에 있다. 그리고 이 예배가 바로 그들의 영혼을 이끄는 지침인 것이다. 말씀과 이미지(imagery) 그리고 예전적 표현들로 가득찬 성경의 본문들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들을 영광스런 형태로서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예배를 통하여 회중은 계속적으로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믿음의 진리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예배는 회중을 일깨우고, 개혁시키며, 변화케한다. 대체적으로 정교회 회중들의 삶과 그 특징은 예배를 통해 형성되고 이끌어진다.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세계를 향해 열려진 창문처럼, 예배는 믿음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학교이며,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성별된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선구자(agent)인 것이다.
정교회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인데,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예배는 역사 안에서 행해졌던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들을 끊임없이 재 경청하면서, 이미 완성되었고, 벌써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보증되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있으며, 다가올 세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정교회 신자들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의해 형성된다. 예배, 특히 성례전을 통하여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에 참여하게 되며,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의 예전적 의식들을 통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고하게 경험하게 됨으로 구원과 성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물리적인 형태(떡과 잔)로 영적인 실체를 구체화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육신을 장막을 벗고 홀연히 영적으로 변할 종국적인 구원과 우주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정교회의 필수적인 예배 요소와 기본적인 구조들은 초기 사도적 교회의 예배예전의 모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의 제의 의식과 형태는 여러 세기를 걸쳐 오면서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비잔틴이나 콘스탄티노폴리탄 예전에 이르러 통일된 형태로의 예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예전은 가톨릭과 수도원적 형태의 혼합적인 모습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예전의 형태들을 수용, 동화(assimilation), 종합한 동방 기독교의 풍부한 예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기도는 많은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은 이들 예배의 주요 요소이다.
(a) 성례전 예전과 예배, 그리고 성만찬 예전 (b) 성무일과 (c)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금식 (d) 성서일과 그리고 (e) 예전적 구조 배치와 예전적 몸짓들과 형식들에 관한 세부적인 지침들.
A. 성례전
성례전은 회중에게 미래의 삶을 준비케 할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here and now)에서의 보다 더 실천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회중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역동적으로 역사하며,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휘되도록 역사한다. 이것은 마술이나 기계적인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삶의 변화는 그들의 영성과 믿음, 그리고 헌신이 더욱 고취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그에 따른 인간의 응답이라는 협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신,인 협동을 '협조작용'(synergy)이라 부른다.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삶으로 이루어지며, 더욱 독특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는 성례전이 그분의 공생애 사역의 연장이며, 확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게 될 뿐 아니라, 참된 인간의 모습과 우리가 돌아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동방 정교회는 7가지 성례를 인정한다: 성세(baptism), 견진성사(Confirmation), 성체성사(Eucharist), 고해성사(penance), 종부성사(anointing of the sick), 신품성사(priesthood), 혼배성사(marriage). 성례전 가운데 성세와 성체성사는 상위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될 때 비로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지속되며, 발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위치한 성만찬은 교회의 가장 심오한 기도임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목회인 것이다. 또한 성만찬은 교회의 교회됨과 교회로서의 최고 절정을 동시에 성취하게 하는 예전인 것이다.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됨과 동시에 끊임없이 인간의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님의 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로 변화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회중에게 내어주시며, 한 자리에 모인 회중은 그분의 삶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는 성찬 성례를 거룩한 예전(The Divine Liturgy)으로 행하는데, 이는 가장 숭고한 의식이기에 그렇다. 이들의 거룩한 예전인 이 성찬성례의 순서는 두 번의 엄숙한 입장, 성경의 독경과 그 해석, 그리고 대 성찬 기도와 성체의 축성기도 그리고 분병,분잔으로 이루어진다. 동방 정교회의 성찬 성례는 모두 3가지 형태가 있다. 성 크리소스톰의 거룩한 예전(The Divine Liturgy)과 성 바질의 거룩한 예전, 그리고 성찬 전(前) 견신의 예전(the Pre-Sanctified Gifts)등 이 3가지 형태가 그것인데, 3번째 형태는 사순절 기간과 몇몇 성인 기념일과 고난주간(Holy Week) 동안에만 집례되었다.
성무일과(The Daily Office)
예전적 주기는 상호 연관된 네 개의 주기들에 의해 순환된다. 즉 일(day), 주(week), 달(month), 년(year) 등이다. 성무일과의 목적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연합케 하기 위함이며, 또한 평범한 삶의 시간들이 아닌 매 시간을 구원의 중대한 순간들로 바꾸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매일이 은혜의 날로 변화될 수 있으며, 매 해가 주의 해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하루의 성무주기는 다음과 같다. 만과(Vespers;하루일과가 끝날 때), 종도(Compline;잠자리들기전), 새벽기도(Midnight), 찬과(Orthros;새벽미명에) 그리고 일시과(prime;그후 조금 있다가), 삼시과(terce;9시), 육시과(sext;정오), 구시과(none;오후3시) 등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하루일과를 마치고 드리는 만과와 새벽미명에 드리는 찬과는 상당히 발전된 형태를 지닌다.
이러한 성무일과의 뿌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드린 매일의 기도회와 수도원 공동체의 공동예배시 드린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성무일과의 예배는 매 예배시마다 그날의 대주제를 가지고 진행되는데 때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해당하는 소주제를 갖기도 한다. 특히 만과(Vespers)와 찬과(Orthros)의 성무예배는 축제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위대한 성일과 성자들을 축하하고 기념하며, 또는 그 밖의 교회사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념한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현존에 중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절기와 금식일(Feasts and Fasts)
가장 기본적인 교회의 축일은 주일(the Lord's Day)로서 이는 매주마다 지켜지는 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절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주일에 행하는 교회의 중심된 활동은 바로 거룩한 예전을 통하여 회중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로써 주일은 매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전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는 몇가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행하는 금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력에 있어서의 축일들과 금식일은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가지고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두 개의 커다란 범주로 나눌 수 있겠다. 즉, "유동성이 있는"(movable) 절기와 "고정된"(fixed) 절기가 그것이다. 유동적인 절기는 사정에 따라 준수된 절기로서 부활절 같은 절기가 그것이었다. 반면 고정적인 절기는 매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지켜졌다. 그리고 모든 절기들은 그것이 보편적이든 지역적이든간에 언제나 엄숙하면서도 거룩한 예전의 형태를 갖추어 집례되었는데, 그 이유는 매 예배마다 집례되는 성만찬이 교회의 영원한 축제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엄숙하면서도 중요한 절기이다. 이 부활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중심이면서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은 그분의 핵심적인 구속사역이다. 그러므로 엄숙한 고난주간(Holy week)의 준수와 장중한 부활절 예배는 주님의 구속사역을 영광돌리는 중심적인 절기인 것이다.
고난주간에 앞서 40일간을 사순절로 지켰는데, 이를 대금식(Great Fast)일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40일간 계속되는 사순절과 참회시간들을 통하여, 교회는 참회의 능력과 그 의미를 맛보게 되며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모습과 생명력을 확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는 이러한 부활절 외에도 12개의 대(大) 절기들을 지키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모 마리아의 삶 가운데 나타난 여러 사건들, 게다가 성모의 무흠수태 대축일, 성탄절, 주현절, 종려주일, 승천일, 성령강림절, 변화 축일(Transfiguration) 등을 포함한다.
매주일의 주간 금식일과 사순절기간의 금식일 이외의 다른 금식일로는 성탄절을 앞두고 일정기간을 금식하는 기간으로 삼았다.
금식기간에는 기도만이 아니라 봉헌도 함께 드려진다. 금식은 경건한 공로행위로 간주되지도 않았으며, 십자가를 지는 행위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인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는 말씀의 표현이며, 그 말씀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이란, 주로 영적인 지식의 성숙과 하나님께 향한 순종, 그분의 말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성화됨의 성숙으로 간주되었다.
공예배시 사용되는 예배서(service books)는 크게 주로 4개의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Typikon이다. 단권으로 된 이 예배서는 매일 예배를 위한 예배 모범서요, 전례규범(Rubrics)서이다. 두번째 형태로는 'Euchologion'과 이에서 유래한 'Small Euchologion', 'Archieratikon' 그리고 'Diakonikon'를 들 수 있겠다. 이 예배서는 모든 예배를 비롯하여 성례전과 그 밖의 다른 예배시에 사용되는 제사장적 기도와 간구의 기도문을 담고 있다. 세번째는 형태로는 고정적인 형태의 성무일과와 환경에 따라 바꿔 사용할 수 있는 가변적인 형태의 성무일과 내용을 담고있는 예배서이다. Horologion는 성무일과에 있어서의 고정적인 예배 요소들과 그밖의 다양한 예배 순서들을 싣고 있다. Great Octoechos (또는 Parakletike)는 한 주간에 걸쳐 매일 드리는 예배에서 사용하는 찬양을 담고 있는데, 8주를 한 주기로 하여 반복된다. Triodion은 사순절 전야와 사순절 기간, 그리고 대금식일과 고난주간의 성무일과를 위한 찬양집이다. Pentaekostarion은 부활절 기간중의 성무일과에 불려지는 찬양집이며, Menaia은 모두 1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일년 12번, 매월 한권씩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12권의 책은 교회력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고정적인 예배나 절기예배 등을 다룬 예배서이다.
정교회의 찬송가는 감정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교리적이다. 모든 곡은 교회 음악의 대표적기법인 기본 8음계 중에 하나로 시작된다.
네 번째 형태는 일종의 성서일과로서, 성경을 주기별로 읽을 수 있도록 한 책이다. Evangelion은 1년을 주기로 4복음서를 순서에 맞춰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한 것으로, 복음서의 말씀을 구절씩 재구성해 놓은 것이다. Apostolos는 사도행전부터 서신서에 이르기까지 각 구절로 나누어 1년동안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Psalter는 시편을 크게 9개의 노래로 나누었으며 그것을 또 20개부분으로 구분하여 놓았다. 그리고 Prophetologion는 한때 구약성경의 특정 부분을 미리 지정하여 그 부분을 읽도록 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예배예전서로 사용되지 않으며 단지 위에서 언급된 다른 예배서에 포함시켜 사용하고 있다.
예전적 구조 배치(Liturgical Space)
전통적인 교회건물이나 성전은 몇가지 독특한 특징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의 교회 건축의 목적은 변모하는 세계의 미(美)적 수준과 부(富)를 반영키 위함이었으며, 또한 성만찬 예전의 본질을 명백하고도 뚜렷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돔모양(domes)의 천장과 둥근 문(arches), 그리고 천문(apses;교회당의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의 돌출부), 뿐만 아니라, 잘 그려진 도해(圖解)적인 구성과 촛불을 사용한 조명과 높이와 길이 등, 이러한 성전 양식을 통해 교회는, 인류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인간과 세상을 향한 교회관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전은 주로 세 부분으로 구된다. 즉, 세례자를 위한 공간(narthex), 회중석(nave), 성단(sanctuary)이 바로 그것이다. 설교대와 설교단은 성단 밑, 회중석의 중앙에 위치하고, 성찬대나 제단은 성단의 중앙에 놓인다. 성단은 약간 올라가 있으며, 성화막(iconostasis;동방정교회의 제단쪽 성화병풍)에 회중석과는 분리되어 있다.
성상들은 정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개인의 신앙 성숙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성상들은 주로 교회사에 기념비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다루며, 회중을 거듭난 중생의 삶으로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그 동안 성상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 자체가 숭상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상이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적절히 도울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며, 거룩케 하기 위한 전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2)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A Roman Catholic Theology of Worship)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예배의 각 부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신비로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 예배의 기본적인 신학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과 같이, 중세 우주론의 가설들과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중세의 가설들은 성례전의 구체적 이해와 그 집례에 있어 끊임없는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입교식과 성만찬에서 두드러졌다. 성경과 그 밖의 교회사를 통한 역사적인 연구들은 성경의 여러 기록들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형태를 보다 더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에큐메니칼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다.
A.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배
모든 구원의 역사(모든 사건, 목적, 성소, 하나님의 현현, 제의)는 나사렛 예수의 인간되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육화하심으로 구체화되었다. 인침을 받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며(요1:1,14); 새 창조(고후5:17;갈6:15;롬8:19ff;계5:14); 새 유월절과 어린양(고전5:7;요1:29,36;19:36;벧전1:19계5ff); 새 언약(마26:28;막14:24;눅22:20;히8-13), 새 할례(갈2:11-12) 그리고 하늘의 만나(요6:30-58;계2:17), 하나님의 성전(요2:19-22), 새로운 희생와 제사장(엡5:2,히2:17-3:2; 4:14-10:14) 안식일 휴식의 완성(갈2:16-17; 마11:28-12:8; 히3:7-4:11) 그리고 다가 올 메시야 시대(눅4:16-21;행2:14-36)의 도래인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외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2:16-17)
구약의 예전적이고 희생의 성전제사는 이제 다른 어떤 희생제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대체되었다.(히8-9)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인 것이며,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반응으로써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의 영광에 접붙임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제의(rite)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세례의 의미와 그 중요성도 언급하고 있다.(롬6-8장)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다"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예배와 그분께의 순종, 그리고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데, 이러한 '예배와 순종, 믿음'이라는 수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선물인 것이다. 즉 우리는 한 성령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서 인간의 온전한 행위인 예배를 드림으로 그리스도와 접붙임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연합은 영원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세례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의 지체인 성도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로 감히 유입(insertion)되게 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인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말씀의 신성함 때문에)과 모든 기독교 공동체와(그리스도의 인성 때문에) 연합하게 한다. 그러나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를 형성시키는데, 즉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셨고, 구원코자 원하시는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구원의 성례전이며, 교회의 목적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과의 연합됨은 예배와 순종,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요구를 포함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예배를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되며 그렇게 될 때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구원을 이루기 위한 충분한 원천이 되는 한, 구원과 예배드림으로 받게 되는 세례는 어떤 간구의 기도 없이도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인 세례는 끊임없이 인간에 의해 성례전의 형태로 드려지고 수용되어야만 한다. 특히 주일 성만찬 예배가 그래야 하는 것이다.
B. 예전(Liturgy)- 교회의 공중 예배
회중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몸인 교회라는 실체적 공동체 안에서 세례를 받게 된다. 이것이 성령님을 통하여 드려지는 성부께 향한 예배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전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선물로 주어진 최초의 예배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전, 희생, 제사장, 또는 제사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삶과 주님을 삶의 모범으로 따르며 사는 삶을 말했다. 우리가 공적인 예배 혹은 예전에로 부름을 받아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연합된다는 실제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고전10-14, 엡4, 골3:27-28)
'레이투기아'(Leitougia)라는 말에는 성전에서의 사가랴의 직무(눅1:23), 복음선교와 가난한 자을 위한 헌금(고후9:12), 바울을 섬긴 에바부로디도의 헌신(빌2:30),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에게 향한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히8:6) 등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인적인 기도와 공동기도, 세상을 향한 섬김과 헌신,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성만찬은 서로 엄격히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한 우리의 유일한 전인적인 응답의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전인적인 응답으로 우리는 한 번 희생으로 모든 이를 위한 속죄를 이룬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연합되는 것이다.(히10:10) 즉 교회의 중심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은 사회적 요구의 구체적 표현이며, 각기 분리된 성전과 예배예전, 그리고 제사장 직분을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만찬이 있는 예배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게 하는 예배로서, 이 말씀을 입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성을 입고 다가오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교회의 구성원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라는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상황에 구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전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거나 단순히 교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과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례전은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의 몸을 예배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의 단면을 비쳐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교회가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친밀하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매주일 드려지는 성만찬은 회중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희생,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참 모습과 미래의 소망,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만물의 완성 등을 되새기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연합은 성만찬 집례를 위한 본질이며, 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기념'(anamnesis)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신조와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아남네시스는(기념하는) 단지 심리학적 이해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죽음으로 인해 한 개인이 감동을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미사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비록 왜곡된 미사의 집례가 그런 방향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말이다.) 교회가 성만찬시 "아버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상기하도록 하옵소서....우리는 당신에게 이 거룩하고 살아있는 당신의 희생에 감사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할 때,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위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나아가 2천년전에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다.
교회가 세례를 베풀 때, 그 세례는 교회나, 집례자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친히 베푸시는 것이므로 비록 단 한 번의 세례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유효한 세례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매주 행하는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매주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심판과 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늘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거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예배의 최고 절정인 하나님께 향한 넘치는 찬양이 그의 응답으로 있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이러한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제의(ritual)라는 것은 보다 더 나은 의미의 해석과 전달을 위해 한 공동체가 만든 상징들(signs)과 몸짓들(gestures)로 이루어진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적 예배는 믿음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계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중심된 예전은 바로 성례전(sacraments)인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가토릭은 언제나 개혁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포를 통해 발행된 '거룩한 예전의 제정'(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처럼 말이다.
3) 루터교 예배신학(A Lutheran Theology of Worship)
루터교에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는 회중의 모임으로서 설교와 성찬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중의 믿음이 반복적으로 견고케 되는 자리이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회중은 그에 응답한다. 형식에 있어서 루터교 예배는 복음주의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인 성격을 띤다.
루터교의 예배 형태는 매우 명확하면서도 심지어 흥미롭기까지 한데, 그 이유는 이들의 예배에는 복음적인 면과 가톨릭적인 면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터교 회중은 복음적인 신앙을 소유하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지기를 또한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든 시대와 역사에 걸쳐 기독교를 하나의 예전으로 통일한 가톨릭의 위대한 예전적 전통에도 서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은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복음주의자가 될 때 비로소 가톨릭 예배의 중심에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한편 루터교인들은 자유로와야 할 예배가 마치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의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만을 기뻐받으신다고 하는 전통에 의해 예배에서의 자유함을 빼앗으려는 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특정한 예배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는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예배'라고 주장하면서 예배에서 자유함만을 요구하는 주장도 통렬히 거부한다. 예배에서의 그런 '자유함'은 종종 예배 인도자를 폭군적인 인도자가 되도록 유혹하며 그로인해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예배를 낳게된다. 우리가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형식을 통하여 기뻐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 드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코자 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과거 기독교 예배의 위대한 유산들을 자유로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는 귀중한 선물인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이러한 귀중한 유산들 중의 일부는 너무도 중요하기에 이것들 없이는 도저히 예배드릴 수 없기까지 하다. 교회에서 읽혀지는 성경은 과거 교회들이 그 신성한 권위를 인정한 경전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루터교 예배의 핵심적 뼈대는 다름 아닌 그동안 교회들이 대대로 지켜왔고, 전해준 것들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는 행위인 '세례'와 성경의 주제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선포', 그리고 '사죄의 확인'과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임재와 언약의 확인으로서 교회가 언제나 행한 '주님의 식탁' 등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은 너무도 구체적인 형태로 주어졌으며('물', '성경',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는 자', '빵과 포도즙'), 바로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인 성령을 부어주시는 '은혜의 통로'인 것이며, 우리를 온전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방편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선물들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으며 또한 이러한 '은혜의 통로'(means of grace)가 중심이 되지 않은 루터교 예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또 다른 역설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예배의 귀중한 유산들을 전해받아 전통에 따라 집례하되, 복음적인 시각으로 다시 비평하고 재구성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요구이기 보다는 오늘 모이는 회중들의 요구에 의존한 것인데,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배에 임하셔서 역사하신다. 주일아침에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에서 예배를 집례하고 주도하는 분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예배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자리에 모인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말할 때, 우리의 말하는 입술과 찬양하는 입술을 빌려 친히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치신대로 행하는 주님의 성찬과 세례도 하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루터교 예배의 핵심인데, 그 이유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따르길 원하며,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루터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 일하시며 물리적인 재료들을 통하여 우리와 만나신다는 믿음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음을 믿는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역설적인 면은 마치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엄청난 역설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교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이른바, '복음주의적 가톨릭주의'(evangelical catholicism) 예배의 특성은 그들의 교회론 신조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거룩한 교회만이 있으며, 그 교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순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 가운데 선포되어지며 복음에 따라 거룩한 성례전이 집례되어지는 곳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전한 이해를 위한 복음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성례전의 집례는 기독교 교회의 온전한 일치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간에 의해 고안된 의식들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불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Augsburg Confession, Article Ⅶ)
그러므로 이들은 최선을 다해 위대한 옛 예배 전통들을 추구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들을 복음의 시각에 비추어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언제나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은혜의 통로'인 예배 전통들을 중심으로 하되 비록 덜 중요시 여겨져 온 전통들 중에서 매우 유용한 것들은 수용하여 행하고 있다. 루터교인들은 주일을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며, 믿음의 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로 여겨 거룩히 지킨다. 그들은 부활절과 성탄절, 그리고 옛적부터 내려온 그밖의 여러 교회력을 지킨다. 이들은 몇몇 성인들의 축일을 준수하고 전통적인 성서일과를 사용한다. 또한 미사를 위해서 옛 서방교회의 본문을 사용하고 이러한 예전적 본문들을 부분부분 영창한다. 이들은 예배 집례자와 세례받을 자들을 위해 전통적인 예복(vestments)을 입는다. 이렇듯 루터교인들의 옛 전통들에 대한 애착은 때때로 별로 쓸모없은 것들에까지 고수하게 하였는데, 그래서 이들은 종종 비본질적인 부분에서조차 보수적인 면을 보이고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다.
찬양 역시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루터교가 중세 미사와의 분리를 이룬 가장 환영할 만한 개혁중의 하나는 바로 예배중 모든 회중이 자국어 가사로 된 곡을 부를 수 있도록 함으로서 예배에 회중들의 참여를 독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일기시작했는데 시편가(psalms)와는 다른 찬송가(hymns)의 형태로 당시의 다른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도 이를 즐겨 사용했다. 그리고 여전히 루터교 예배의 주요 역설적인 면으로 남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제와 회중의 역할이다. 예배의 인도자인 목사는 전체 예배에 있어서 중대하고도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루터교 예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구약 말씀을 교송으로 부르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평신도의 지도력이 강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찬양을 통하여 회중들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그렇기에 찬양은 단순히 설교를 듣기 전에 하는 그럴듯한 준비 순서가 아니라, 루터교 예배에서 그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자, 이제 이들 예배에 있어서 보게 되는 마지막 역설적인 면을 살펴보자. 사실 여기까지 언급한 내용의 거의 전부는 즉, 말씀과 세례, 주님의 만찬 그리고 옛 전통들의 복음적 재구성과 회중 참여의 강화, 그리고 찬송가집의 사용 등,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 넓게 퍼져있는 보편적인 것들이며, 에큐메니칼 예전 운동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이러한 특징들을 루터교 예배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한다고 한들 결코 루터교만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솔직히 말한다면, 루터교만의 유일한 예배 형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교 예배는 오히려 가톨릭의 예배 전통을 받아들여 복음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질문과 갱신을 거듭한 예배인 것이다. 비록 그러한 예배의 형태가 비합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예배만이 그들이 믿는 복음을 가장 잘 운반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확신한다. 결론적으로, 루터교 예배의 가장 뛰어난 점은 이들의 예배는 루터주의에 찌든 편협한 예배가 아닌 가톨릭적이면서도 복음주의적인, 즉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인정받을 만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예배라는 것과 이들의 예배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는 달리 매주 행하는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매주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심판과 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늘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거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예배의 최고 절정인 하나님께 향한 넘치는 찬양이 그의 응답으로 있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이러한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제의(ritual)라는 것은 보다 더 나은 의미의 해석과 전달을 위해 한 공동체가 만든 상징들(signs)과 몸짓들(gestures)로 이루어진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적 예배는 믿음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계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중심된 예전은 바로 성례전(sacraments)인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가토릭은 언제나 개혁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포를 통해 발행된 '거룩한 예전의 제정'(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처럼 말이다.
4) 성공회 예배 신학(An Anglican/ Episcopal Theology of Worship)
성공회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례전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교회는 가시적이며 세밀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체화 하는 것이다.
성공회주의자들로 구성된 국가교회나 감독교회들은 공식적인 예배신학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1549년에서부터 지금까지 여러번의 편집을 거듭해 사용하고 있는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통하여 이들의 예배 형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판의 공동기도서에서 미국 성공회는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활동으로 주일에 행하는 거룩한 성찬과 그밖의 다른 중요한 절기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 . . 등은 이 교회의 정규적인 공식예배이다."(Book of Common Prayer, 13)라고 말하면서 고정된 형태로의 예배는 대중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킨 매일 기도와 매주일 행하는 말씀과 성례전으로서의 예배가 그것이다.
성공회의 신학은 주로 성육신이나 성만찬적 신학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특히 예배의 신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 예배에는 말씀과 그 말씀의 연출(actions)이 있게 되는데 이 보여지는 말씀으로의 연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내면적이면서 영적인 만남을 갖게 됨을 상징하는 외적이며 가시적인 형태의 말씀인 것이다.(공동기도서, 857) 그럼으로써 예배는 보다 더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비롯하여 전인격으로 드리는 특별한 행위이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일어서고, 앉기도 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손을 높이들고 목소리를 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고, 들으며, 노래하고, 고백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또한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기까지 한다. 비록 제아무리 특별한 방식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성공회 예배시 사용되는 외적인 예배 행위들에 대한 그들의 끊이지 않는 관심은 다음과 같은 확고한 신학적 신념에 의한 것이다. 즉, 우리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을 내어 맡길 수 있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주님의 자녀로 서게 될 곳인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비의 자리로 이끌릴 수 있는 것은 예배시 사용되는 예전적 상징들을 활용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과 성례전에 참여코자 함께 나아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임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모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인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마18:20)라는 이 말씀은 예배의 촉매가 되는 주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예배는 그의 자녀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이들 예배의 주요 순서로는 말씀의 봉독과 선포,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중보의 기도와 세례와 성찬을 중심으로한 성례전이 그것들이다.
한 자리에 모인 공동체로 예배드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을 상기하게 되며, 우리의 온 힘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공동기도서, 336) 여기에는 죄의 고백과 우리의 무가치함의 시인, 그리고 열렬한 간구와 온 인류를 위한 중보의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웃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만찬인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을 회상(anamnesis)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념적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부활에 동참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주님께서 명하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전1:24)는 말씀에 의지해 감사함으로 떡과 잔을 받아 먹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말미암아 살찌우게 되며 우리는 주님의 신비스런 몸에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공회의 중심적인 신학을 통해,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신비를 찬양하는 것으로서, 이는 매일의 아침,저녁에 드려지는 성무일과의 찬양을 통해 주님의 구속을 회상하고 결혼미사와 병자들을 위한 안수, 그리고 고해성사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 등과 같이 개인의 삶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중대한 시기의 예배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를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성공회는 주일 예배를 비롯한 주중의 모든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그 신비적 사역이 드높이 기념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회중의 삶의 모든 영역들이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안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 자신을 죽기까지 온전한 제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들도 자신의 전부를 헌신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점진적으로 받아 사도바울이 말한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5) 개혁교회 예배신학(A Reformed Theology of Worship)
개혁주의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죄로 인해 무능력한 인간과의 만남의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혁주의 예배는 복음에 근거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실천하는 예배인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의 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간 두가지의 다소 상반된 이미지가 있어 왔다. 하나는 성전에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며, 다른 한 면은 멜빌(Melville)이 쓴 '백경(Moby Dick)'의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로 우뚝 솟은 높은 강단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보자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처럼 개혁주의 예배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하심과 주권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백인 일색의 예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개혁주의와 장로교 예배의 역사적 흐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그리고 이에 반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연약한 인간과의 만남인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로서 칼빈과 그 후예들의 주된 관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선포되어야 하며, 이러한 강조는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라는 견지에서 보건데 루터에게서 보다 더욱 강조된 점이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다. 즉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지혜와 힘과 의와 거룩하심과 선함과 진실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예배가 언제나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 '죄의 고백'(a general confession)이나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순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자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하심에 대한 관심은 개혁주의 예배의 깊은 뿌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심에 경외심을 보임과 동시에 지체함 없이 그의 범죄한 입술을 제하여 줄 것을 간구했으며,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하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이다.
계시록에 나타나듯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다분히 환상적이고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중세 가톨릭의 미사에 대항한 개혁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화려한 예배의 장면들을 또한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개혁교회에서는 여전히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의 중심이시며 근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회사가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설교에 대한 개혁의 열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세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추세가 예배를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처럼 취급하려는 듯 하나 분면히 말해 예배는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다. 히스롭(D.H. Hislop)은 그의 책 "Our Heritage in Public Worship(공중 예배에서의 우리의 전통; 역자 주)"에서 비유를 들어,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 틀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upward)"이라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틀(downward)"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위로 향하는 예배는 예배의 초점이 예배드리는 예배자나 혹은 그의 감정에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받으시는 분께, 또한 예배자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칼빈, 부쳐, 오이코람파디우스, 베자, 파렐, 쯔빙글리 그리고 낙스와 같은 개혁가들은 매주 1회마다 성찬이 집례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 성찬은 주일 아침 예배의 정규적인 순서였기 때문이었다.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회중들은 성찬에 즈음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찬을 받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회중 각인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한 개혁자들의 주장은 과거 종교개혁 이전의 1년에 1회 내지는 그보다 더 적게 성찬에 참여케 한 관습보다 더 주위의 급속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의지는 무식한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들은 연 4회의 성찬집례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결국 칼빈을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도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연4회의 성찬만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성찬이 집례되지 않는 날에는 축성기도 부분에서 찬송과 축도로 이어짐으로 예배를 끝마쳤다.)
개혁교회에서는 성찬시 일상적인 떡을 사용했으며 떡을 받는 회중은 각자의 양에 맞게 떡을 떼었다. 잔 또한 떡과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많은 회중들은 주님의 떡과 잔을 받기 위해 성찬 테이블 주위에 모였으며, 그들이 받는 성찬의 의미는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기보다는 우리와 맺으신 주님의 언약의 확인하는데 있었다. 또한 개혁자들은 성찬시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진 축성기도를 드렸으며 그 기도는 주님께서 성례에 친히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형식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은 말씀을 통해 친히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했는데, 주님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제정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니. . . 또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 . ." 한편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가 모인 회중들의 기억속에서 기념되는 것으로 보았다.
개혁가들의 기도서에 대한 사용은 복잡하리 만큼 다양한 차이를 보였다. 예배의 시작부분에 있는 시작을 위한 기원의 기도(The Prayers of the invocation)와 대중보의 기도는 기도서를 따랐다. 그러나 때때로 설교 후의 기도는 목회자의 자율에 따른 즉흥기도가 행해지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을 위한 존 낙스의 '공동예배서'(Book of Common Order)는 대개 칼빈의 '제네바 예식서'(Form of Prayer)를 따르고 있으나 또한 다소 성공회의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의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영어 사용권의 개혁주의 국가와 대륙의 개혁교회는 서로 큰 차이를 보게 된다. 1643년 웨스터민스터 성 총회를 통해 절정에 달한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혁명은 국교회 내의 성공회 퓨리탄과 심지어 몇몇 분리주의자들과의 합의를 통하여 보다더 예전 중심적인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국교회 내의 성공회 퓨리탄들은 예배예전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분리주의자나 회중교인들은 적대시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스코트인들은 자신들의 예전 중심적인 입장을 얻어내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들과의 타협이 불가피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타협으로 말미암아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후대 미국 장로교,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민 청교도 예배에서의 예전신학과 예전적 형태가 감소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같은 추세로, 그 동안 여러 개혁교회에서는 비공식적이나마 지켜지던 5가지의 성서적인 절기들,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등이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의 청교도 시대에는 무시되거나 금지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로 북미의 대륙계열의 개혁교회 후예들은 비록 그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른 분파들이 반예전적 청교도주의를 택했다 하더라도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림절과 사순절은 비성서적이라는 이유로 개혁자들로부터 무시당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고행과 금욕적인 색깔을 띠고 있기에 구원론이 자칫 공로주의적 구원론으로 흐를 수 있으며 또다시 중세적인 예전의 악용을 불러일으킬 만한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성자축일과 성인을 위한 기도 등은 개혁자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교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 역사를 빛낸 믿음의 증인들과 교사들을 본받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기 위해 그들을 기념하는 설교를 강화하곤 했던 것이다.
초기 개혁교회의 예배에는 말씀의 선포를 3가지로 구성했는데, 구약성경, 서신서 그리고 복음서로 나뉘었다. 또한 이러한 말씀 사이에 몇 개의 시편송이 불려졌다. 성서일과가 사용되면서 점점 성경봉독과 설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해당성구와 설교본문은 완성된 책으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짧은 구절보다는 성경의 한 장 전체를 읽는데 긴 시간을 할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점점 성서일과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설교자 자신의 자유로운 본문 해석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비록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지만 레위기나 민수기와 같은 보다 심오하고 난해한 본문들은 도외시되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의 절기나 회중들의 애경사가 있을 시에는 그로 인해 연속적인 성경본문의 진행이 차단되기도 했다.
점점 교회의 절기와 축일들이 감소되는 대신 매주 부활의 축제로서의 주일(the Lord's Day)성수가 그 의미를 더해갔다. 이와 같이 주일성수에 대한 중요성과 그 강조는 다른 주요한 기독교 전통을 이어받아 온 개혁교회의 특징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와 청교도 전통은 안식일에 쇼핑을 한다든지 세상일에 몰두한다든지 그리고 주말에 휴가를 간다는 것은 금기시 했던 것이다.
금세기 장로교 예배의 선두 학자인 올드(H.O. Old) 박사는 그의 역작인 "Worship That is Reformed According to Scripture(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 예배;역자 주)"에서 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 예배에 있어서의 다섯 가지 본질적 요소를 언급했는데 첫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하며 둘째,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하며 셋째,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인 성화된 모습이 있어져야 하며 넷째, 예배를 통해 사랑이 충만히 넘치는 삶이 있어져야 하며 다섯째, 회중을 교육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세례의 이해는 성경과 어거스틴의 입장인 '언약의 확인'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세례는 구원을 이루어 가는 회중의 거룩된 삶으로 이끄는 의식이 아니다. 즉 회중의 훈련과 성화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의식이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인 새로운 언약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는 예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로의 입교식인 것이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세례 뒤에 따라오는 열매로서 기대되는 것이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훗날 12세에 이르러 교리문답 과정을 받아야 하며 회중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야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혁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전에 철저하고 강도높은 교리문답 교육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언약인 세례는 언제나 공중 예배시에 집례되었다. 개혁가들은 세례를 구약의 언약이었던 모세의 할례와 연속선상에 두었으며 세례시에 성령님께서 세례받는 자에게 충만히 임하심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표식이요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외에 기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다른 형태의 안수는 행해지지 않았으며 순수히 성경적 전통에 따라 성경에서 말하는 물을 붓는 세례만이 허용되었다.
세례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도 구약과 신약에서 행해졌던 대로 '언약의 식탁'으로 이해했다. 주님은 식탁을 통해 그분의 자녀들에게 실제로 임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임재가 아주 단순히 떡과 잔에 제한되어 그것 속에 임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만찬은 단순히 죽은 자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한 식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주님의 임재하심의 약속이요, 언약인 것이다. 이 식탁은 주님께서 그의 12제자들에게 직접 행하시고 그들앞에서 제정하신 예전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주님의 성만찬 예전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정교회 예전의 신비적이며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게 된 것이다. 반면 개혁교회의 성만찬은 성경을 통해 계시되는 말씀의 임재와 그 능력을 강화한다. 이 식탁에 있어서의 감사와 찬양의 모습은 시편송을 부르면서 나타나게 되며(때로는 일반적인 찬송) 중보의 대기도를 통해 창조와 타락, 성육신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상기하는 내용을 담았다. 요컨데 개혁교회의 "주님의 만찬"을 일컬어 "거룩한 신비"(Holy mysteries)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표현인 것이다.
20세기에 후반에 들어와 미국 장로교 예배에서 나타나는 한가지 현상은 아마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여파와 그 동안 무미건조한 예배의식을 탈피해 예배에서의 새로운 미적인 감각과 신비함, 그리고 드라마적인 예배의 연출을 추구하려고 하는 욕구로 인해 또다시 종교개혁 이전의 예배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1989년 신학적이면서도 실제적인 검증을 토대로 한 활용 가능한 '예배 지침서'(Directory for Worship)를 교회의 규정서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 예배 지침서에는 즉흥적인 예배를 제외한 6가지 공식적 예배 형태가 있는데, 성만찬이 있는 주일 예배에서의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 매일 기도문, 특별 예배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배 지침서에서는 과거 초기 개혁교회에서 행했던 세례와 병자를 위한 안수시 기름을 붓는 행위와 세례식이 있는 예배시 악령을 내어쫓는 행위와 초기 개혁교회 인도자들의 전통이었던 예전적인 제스쳐와 언어들이 제거되었다. 이 외에도 더 큰 변화를 위해 예배시 사용하는 언어와 예배, 시편가집, 찬송가집, 심지어 성경도 합당한 목적을 위해서 적절한 변화를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의 변화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장로교를 비롯한 개혁교회들의 예배의 변화는 인간의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인간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고 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예배의 변화는 과거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자리로서의 초기 개혁교회의 예배의 이해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소지를 낳고 있는 것이다.
6) 침레교 예배신학 (A Baptist Theology of Worship)
침례교인들이 성경에 근거한 예배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성경에만 근거한 예배의 모형보다는 일반적인 예배의 원리에 따르는 경향이 다분한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침례교의 신학은 성경 자체에 근거한 성경 중심적 신학이다. 이것은 그들의 예배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지는 특징으로서, 그들의 예배의 신학과 형태를 발전시킴에 있어 예배와 연관된 성경 본문들을 중요한 자료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출33-34), 이사야의 부르심(사6장), 나사렛의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눅4:16-30),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4:19-24), 최후의 만찬에 관한 여러 가지 언급들(특히 고전11:23-26), 그밖에도 초대 교회의 수많은 예배의 모습과 심지어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 예배의 모습(계4-5장)까지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들은 또한 참된 예배란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무리 잘 갖추어진 예전적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믿음의 교제와 성결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 예배는 예배 신학만이 아닌 예배의 윤리와의 통합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침례교의 예배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적인 예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 부분에서는 공적인 예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하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공적인 예배(Corporate Worship)는 회중예배(Congregational Worship)를 의미한다. 즉 회집된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과 만인 제사장적 견지에서 이들은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예배시 회중의 역할은 목사의 역할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자리로 간주된다.
설교에 중점을 두면서 고정된 예전적 형태를 갖추지 않는 이들의 예배 특징은 때때로 회중의 참여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왔다. 그러나 침례교 예배는 다른 형태로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회중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은 평신도에게 예배 기도와 예배인도를 맡기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회중 찬양과 응답적 성경봉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주일 예배를 위한 공동 기도서와 회중 교독문을 발간해냈다.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이끄는 '초청'은 19세기 영적 대각성 시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지금도 전 회중의 헌신과 결단을 이끄는데 사용되곤 한다. 침례교는 또한 '주님의 만찬'(Communion)의 중요성의 회복을 통해 회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침례교에서 말하는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대화의 장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은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형태는 말씀봉독, 설교, 찬양, 침례, 그리고 주님의 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런 점에서 회중의 응답 부분은 찬양과 감사로서, 예배시 회중은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와 구속의 사건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회중은 찬양과 봉헌, 기도와 회중적 말씀봉독, 교독문과 결단이라는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그래서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어지며 또한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침례교 예배의 결론인 것이다.
이들은 예배시 언제나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를 인정한다. 비록 예배가 순서에 따라 의식과 질서있게 드려져야 하고 예전적 부분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겠지만, 고정된 예전의 형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배시 회중가운데 자유롭게 활동하셔야 하기 때문에 예배는 비교적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과 하나님과의 만남 사이에 복잡한 것들이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데 복잡한 예전적 예배는 자칫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하기에 그렇다. 예배시 초월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잘 짜여진 예전적 순서에 통제 받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복잡한 예전적 예배이든, 그렇지 않은 아주 단순한 예배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때와 장소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회중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침례교의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열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 자리하신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적 은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예배의 초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야 말로 예배에 있어서 핵심 부분이며, 말씀의 선포인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에 초점을 두기에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듣는 회중들에게 장래일에 대한 소망을 주며, 하나님의 은혜와 동행하심이 언제나 회중의 삶 속에 함께하심을 확신케 하며, 각인의 영적, 물질적 갈급함을 채워주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둔다. 19세기의 영적 대각성 당시 침례교는 이 주님의 만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그들의 침례교 전 역사를 통해 볼 때 그들에게 있어 주님의 만찬은 예배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예배에서의 그 중요성을 다시 회복하려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만찬은 과거에 행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을 선포하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며, 오늘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회중의 마음과 심령속에 그리스도께서 동일하게 임하여 주심을 선포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세상 가운데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다.
요컨데,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corporate worship)는 하나님과 믿음의 공동체가 만나는 자리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회중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충만히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총에 한 목소리로 응답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방법으로 회중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고 침례교의 회중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에 자신의 귀를 기울이며,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응답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중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은총과 회중을 온전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7) 재세례파의 예배신학(An Anabaptist Theology of Worship)
재세례파는 교회를 신자들(believing disciples)의 근본적인 몸으로 본다. 이러한 믿음의 공동체의 발로가 곧 예배이며, 예배는 단순하고 평등주의를 지향한다. 또한 이들의 예배는 계속되는 믿음의 공동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예배는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또한 우리를 위해 인류의 역사를 선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또한 예배는 우리가 삶 속에서 맛보고 즐기는 여러가지 다양한 활력소들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들 간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곧 살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장소이며, 우리의 다양한 삶의 현장들은 또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경험하는 장인 것이다.
재세례파들은 믿음의 소망(faith-vision)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예배형태가 규정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비전은 거의 5백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메노나이트, 형제단(Brethren), 그리고 16세기 재세례파의 신학적 영향을 받은 회중교회와 몇몇 침례교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다른 교파의 신앙고백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재세례파만의 독특한 점은 다음 아래의 내용들에서 볼 수 있다.
A. 성경의 권위-신조나 법전으로서가 아닌 믿고 복종해야 할 이야기로서 이 성경은 우리 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형성하는 것이다.
B. 신자의 침례(Baptism of believers)-유아세례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과 이 웃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신자의 침례(Baptism of believers)만을 인정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 앞과 믿음의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헌신을 결단한다.
C. 거듭난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변화된 공동체의 모임이며 이들은 교회의 몸을 이 루는 다른 지체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이루어 나간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의 개인주의 는 용납될 수 없다.
D. 삶속에서의 제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고 따르는 제자된 삶을 살아야 한다.
E. 사랑의 윤리- 삶의 모든 관계속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마음과 의를 구하고 평화를 도모하며 화해의 관계를 유지하며, 낭비를 금하고, 검소하게 살며 환경을 소중 히 여기며 믿음을 나누고 신뢰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재세례파의 예배에서 이들은 공동체로서 함께 한 뜻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배의 목적은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위에서 기술한 믿음의 고백대로 삶의 모든 부분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믿음안에서의 삶으로 재다짐케 하는데 있다.
A. 예배와 예전
제세례파의 예배는 어떻게 구성되며 다른 예배와 비교해 어떤 유사성이 있는가? 앞서 이미 예배에 있어서의 2가지 요소인 하나님의 신적인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행위, 즉 계시와 응답이라는 제세례파 예배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제 제세례파의 예배를 이루는 3가지 요소, 즉 경험, 표현 그리고 환경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 삶속에서 겪는 경험들
예배의 형태는 실제적이다.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이며 생동적인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오늘 이 식탁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교회에 가는 가는 발걸음 위에도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신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고, 오늘 발생하는 이 문제와 저 문제들에 대한 깊은 숙고 등이 바로 예배의 부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각기 별개이며 다른 모양으로 발생하는 우리의 삶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케 드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며 모순된 우리의 삶에 조화와 일치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처럼 하나님은 진흙을 취해 우리를 다듬으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우리의 노래를 들으시며 응답하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여, 당신의 영을 나에게 부으소서, . . . 나를 빚으시고, 나를 만드소서. . . 나를 채우셔서 나를 사용하소서." 그렇다고 우리는 삶 속에서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여러 갈등들과 고통들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기에 예배는 우리의 삶의 모든 시련들 또한 포함하고 있다. 예배를 통해 삶의 고통들은 진지하게 이해되어 짐으로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겪게되는 문제와 갈등들에도 주의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발생되고 벌어지는 모든 경험들이 예배를 이루는 주요 요소들인 것이다.
나. 예배의 표현들
어떤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떤 상징체계를 사용하는가?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언어이다. 그런데 이 언어는 말(word)과 행동(deed)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헌신하고, 선포하고, 귀담아 듣는 것을 돕는다. 예배에서의 언어는 언제나 그 활용범위가 상당하다. 한 예로 '음악'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는 매체이다. 그밖에 형태도 다양하다. 행동(Action)은 드라마나 춤에서 보여지듯이 의도적일 수도 있으며 반면 즉흥적이거나 선천적일 수도 있다. 침묵(Silence)은 정적이 흐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서 또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설교(Preching)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이끄는 표현이며 그 자체가 우리의 삶 가운데 성육신하여 오신 그리스도의 자신인 것이다.
다. 예전적 환경
설교자와 예배 인도자는 의자에 앉아 있는 회중들만으로도 예배를 위한 충분한 환경으로 만족한다. 설교자와 예배 인도자는 타원형으로 둘러앉은 회중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들의 특별한 외적인 예전적 도구들을 들자면 깃발, 그림, 십자가, 활짝 펴놓은 성경책, 촛대, 장갑, 성찬기 등이다. 이러한 예전적 상징물들은 예배를 위한 강한 메시지를 더해주는 것들로서 회중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모인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적 예배는 단순히 집회소에서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자인 회중은 학교 교실이나 가정집의 거실에서도 주일이면 어느 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B. 예배와 의식
앞부분에서 재세례파의 예배는 인간 생활의 전체적인 경험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신자의 모든 삶을 순례자의 여정으로 보면서 이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이며 이러한 삶이 바로 예배의 예전을 이루는 뿌리로서 작용하는 것임을 일깨우고자 한다.
한 주가 시작되는 첫 날에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행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회중의 반복된 행위이며 표시인 것인데, 매 주일의 예배시마다 말씀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새롭게 자신을 내어주신다. 삶 속에서의 반복되는 여러 행위들과 같이 주일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을 보다더 공고히 하게 하는 자리가 된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나타내는 특별한 행위와 그에 따른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내어놓는 인간의 응답적 행동을 가리켜 성례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이 용어를 탐탁치않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역사에서 성례전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때마다 성물들이 그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오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그들의 예배에서 성례전이라는 말대신 '의식'(Ordina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의식'이라는 말 자체도 또 다른 형식적인 의미를 내포함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골치 아픈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연출'(Performanc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가. 세례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됨을 뜻하는 의식으로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행해지며, 세례로 말미암아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받음으로이제 그는 긴 순례자의 여정을 예배자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첫 발을 내딪은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주님과 동역하는 동역자로서 부름받은 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례는 세례를 받기전 그의 거듭남과 새롭게 지음 받았음에 대한 외적인 표지로서 그 자신이 깨끗케 됨과 그의 삶 전체가 거듭남을 상징하는 것이다. 재세례파는 흔히 성인 세례라고도 불리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만을 고집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자의 세례는 결혼식과 매우 유사한 사건으로 세례는 각각 다른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의 상징인 '반지'(물)를 주고받음으로서 만인 앞에서 부부 됨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 주님의 만찬
주님의 만찬은 생생한 기억을 오늘 이 자리로 끌어 내오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오게 될 것 이상의 일들을 보증하고 약속하는 것으로, 특히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회중은 장차 올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함으로써 주님의 언약을 확인하는 것이다. 떡을 받아먹을 때 우리는 장래 일을 미리 맛보게 되며, 그리스도께서는 참여하는 각인에게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향한 열려진 마음으로 떡과 잔을 취할 때 하나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지며 또한 떡과 잔을 받아먹을 때 영혼의 깊은 갈증과 배고픔이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주님의 떡과 잔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더불어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며 주님의 충만하심과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상을 향한 영원하신 계획하심에 동참하여 복음선교에 부름 받게 되는 것이다.
다. 그 밖의 의식들
세례와 주님의 만찬 외에 안수와 치유, 화해와 결혼, 장례와 애찬식, 세족식 그밖에 교인들의 애경사에 행하는 각종 예배와 서원 예배들이 있다.
C. 예배와 삶
"예배를 위해 들어오시오. . . 섬김을 위해 나가시오"라는 이 문구는 아주 오래된 교회의 입구에 걸려졌던 문구로서 이 문구는 재세례파의 예배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재세례파의 예배는 교회안에서 시작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증인과 복음의 일군으로 세상으로 떠미신다. 그리곤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이다. 예전(Liturgy)이란 말은 본래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드리는 특수한 행위가 아니라 성도의 일상적인 행위를 뜻한다. 한 주일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는 그 사람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따라서 재세례파는 예배를 통하여 신자는 세상으로 보내어 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강조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전적 예배는 복음의 증인과 일군으로서 사는 것이었다. 후에 그는 우리가 주를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예배'라고 부르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 보게 된다.(고전10:31)
결론적으로 이들이 말하는 믿음의 삶은 살아있는 말씀에 응답하면서 사는 삶이요, 성경을 중심에 둔 삶을 뜻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성경을 단순히 기독교적 교훈을 담고 있는 경전을 넘어 오늘 이 자리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목소리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배에 관해 뚜렷한 목소리로 말씀하는 책이며, 이들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성경 말씀을 통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매일같이 만나기를 갈망했으며 그와 같이 매일의 삶이 예배의 삶이 되고자 힘쓴 자들이었다.
8) 퀘이커 예배신학(A Quaker Theology of Worship)
전통적인 퀘이커 예배의 신학의 뿌리는 죠지 폭스(George Fox)의 내적 체험에서부터 그 출발을 찾을 수 있다. 죠지 폭스는 그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계시를 통해 중생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윽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과 변화를 간증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들 예배의 목적은 침묵속에서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하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퀘이커교도의 예배 신학은 종교개혁의 미온적 개혁의지에 대한 깊은 불만족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영국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청교도들에게 깊은 반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퀘이커 교도들은 그들이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하심과 예배시 성령에 사로잡힌 회중의 자율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예배의 현장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부인거하나 무시하고 사제에게만 그 중심적 역할을 제한하는 국교회를 비난했다.
1887년 「리치몬드 신앙선언」(The Richmond Declaration of Faith)은 퀘이커의 전통적인 예배 신학을 담고 있는데, 이 선언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배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다. 형식을 갖춘 예배를 인정하지는 않으나 또한 전적으로 무형식의 예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심지어 말씀도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령안에서 진정된 준비가 있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계획되지 않은 침묵은 성령님께서 자유로운 역사를 가능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신비적인 역사를 통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의 입을 통해 공동체에게 말씀하신다.
다음은 전통적인 퀘이커의 예배 신학을 개관적으로 살펴본 내용이다.
1. 그리스도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든 회중에게 그의 영을 주신다.
2.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자 신을 개방하기 위한 것이다.
3. 예배행위는 훈련된 방법에 따라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위한 기다림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응답을 드림과 성령님의 지시하심대로 말씀의 선포 와 기도를 하기 위함이다.
4. 성령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해 어떤 중개물도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말씀과 형식과 같은 모든 외적인 수단과 인간적인 행위들은 부차한 것이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달린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에서 인간적인 준비들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심지어 예배를 위한 인도자도 필요치 않다.
5. 성령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회중과 사제, 남 자와 여자, 종이나 자유자나 구분해서는 안된다.
6. 하나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는 제 사장으로서 서로를 위한 목회자이며 그렇기에 구별된 사제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7. 세례에 있어서의 한 가지 유일한 요소는 성령님에 의한 내적인 세례이다. 주님의 만찬 도 역시 영적인 주님의 만찬만이 유일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성례전이 그의 죽으심 이후에도 계속되리라 의도하지 않으셨다.
8. 예배 음악에 있어서도 오직 자발적인 음악만이 허용되었다. 퀘이커들은 신약성경 어 디 에도 인위적인 음악에 대한 가르침이나 예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퀘이커의 예배는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들중 대부분은 전통적인 퀘이커 신학의 한 변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 홀(Francis Hall)은 진정한 퀘이커의 예배는 그의 특정한 형태에 관계없이 다음 아래의 통일된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1. 회중들은 신령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하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임재를 체험키 위해 모이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총과 하나님 의 성품의 최고의 계시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과 성령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의해 발생한다.
3.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자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때 가능하 다.
4. 퀘이커의 예배는 인간에 의해 짜여진 순서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다. 성령님은 자유로우 신 분이시기에 예배시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 사에 민감하게 된다.
5. 침묵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며 중요한 수단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케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침묵은 퀘이커 예배의 특징적인 요소로서 모든 퀘이커 예배에 있어서 절대적이며 중심적인 부분이다.
9) 웨슬리계열의 예배신학(A Wesleyan Theology of Worship)
웨슬리의 예전 신학은 예배를 공적인 행위이상으로 정의하려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배는 삶 전체, 타인과의 관계성, 그리고 소명과 관계한다. 신자들은 계속해서 행위와 사고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현실화시킨다.
존 웨슬리가 묘사했듯이,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풍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믿음-새로 태어난 영혼의 눈-은 이 사랑을 이해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을 모방하고 경배하도록 우리가 이끌려지듯이, 우리를 예배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 전통에서, "예배"는 공적인 예전과 개인적인 헌신뿐만 아니라, 모든 충만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 이상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랑하는 묵상이며, 경배이다. 웨슬리가 말했듯이,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대면으로 인도한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찾는다. 우리는, 말하자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그를 보게 된다."(The Works of the Rev. John Wesley, vol. 1 [Grand Rapids : Baker Book House, 1979] 514. 계속된 참고문헌은 그의 작품들속에 있을 것이다.) 이 하나님과의 대면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온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는 법, 그를 기뻐하는 법, 그를 바라는 법을 배운다; 우리 자신을 정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를 모방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생각과 말과 행위모두에 있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운다." (Works, vol. 1, 544)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경배와 헌신의 의미는 가장 초기부터 감리교 예배를 특징짓는 찬송의 표현속에서 발견된다. 찰스 웨슬리는 감리교 교리를 시와 가락으로 설정하는데 그의 신학적 활동의 온 힘을 기울였다.
예배는 예배자들에게서 회개에로의 부름을 포함하는 구원의 전 드라마를 일으키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일으키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도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서 정통해 있었고, 대체로 예배의 예전 형식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바나에 정착한 영국 이주민들에게 선교한 젊은 선교사 죠지아(Georgia)는 동방 정교회의 예전 텍스트들에 대한 새로운 번역본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개정했다. 감리교의 부흥 절정기 때,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능하면 자주, 가급적 매일(그는 개인적으로 평균 일주일에 다섯 번의 성찬식을 받았다) 성찬식에 참석하라고 권고했으며 그는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성공회의 기도서를 추천했고, 그것의 개정편집을 미국 감리교도의 주일예배에서 사용토록 제공했다.
웨슬리는 어떤 것도 소홀히 될 수 없는 예배의 외적 형식과 그것의 내적 힘을 구별했다. 그는 신자들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소홀히 취급하면서, 예배의 외적 형식을 지키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비판했다. 이들에게 웨슬리는 "참된 종교는 예배의 형식들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Works, vol. 1, 219)
동시에 그는 예배 예전을 별로 중요치 않게 만드는 "영적 예배"를 주장하는 신자들을 비판했으며, "우리의 마음속에 영으로 내재하는 성령이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Works, vol. 1, 532) 이들에게 웨슬리는 예배란 우리의 전인격과 관계되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예배란 소그룹의 양육, 금식, 성경읽기, 성만찬, 공적이고 개인적인 기도를 포함하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훈련 용어를 포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여러 의식들과 예전들이 남용될 수 있지만, 그는 "남용이 제거되도록 하고 그 용도는 남게 하라. 이제 모든 외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것들을 끊임없이 너의 영혼을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 속으로 갱신시키는데 사용하라."고 주장했다.(Works, vol. 1, 545).
이 외적 형식과 내적 힘의 연합이 웨슬리로 하여금 예전적 형식주의와 형식없는 주관주의 사이를 분리하여 유기적인 예배신학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는 하나님 임재의 객관적 실재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회중들의 관계를 변화시키는데 나아가는 것이다.
예배의 특별한 요소에 대한 웨슬리의 주장은 신자들 속에 나타난 가시적 거룩함에 중점을 두면서 예배예전에 대한 전체적이고도 일정한 재해석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시작하는 평범한 수단들임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유아세례를 말하면서 세례적 중생의 온건한 형식을 가르치는데: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교회로 받아들여지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성원으로 만들어진다. 그 물, 세례의 물에 의해서, 우리는 중생되거나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Works, "A Treatise On Baptism", in vol. 10, 190-2)
하지만 웨슬리는 이러한 성공회적인 견해를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받아들였다. 가령, 그는 세례가 비록 그리스도의 삶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평범한 수단이지만, 그것이 구원에는 필수적이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현명하지 못한 신자일 수 있지만, 모든 퀘이커 교도들은 저주받아야만 한다."(Works, vol. 26, ed. Frand Baker [Oxford: Clarendon Press, c. 1975], 36).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웨슬리는 세례가 그들의 구원을 확신한다고 가정하고 있는 청중들을 정죄하면서 모든 세례적인 객관주의를 불필요한 것처럼 여겼다.: "당신이 세례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고 믿고 있지만 더 이상 부러진 갈대 막대기에 기대지 말아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러나 세례에도 불구하고 이제 악마의 자녀이다." (Works, vol. 1, 430). 웨슬리는 세례의 참된 의미를 멀리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성령안에서 거듭나도록 요구했다.
성만찬에 대한 웨슬리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강하게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가 거기서 나를 만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그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을 기대하며, 그가 이런 방법으로 나를 만나고 나에게 축복해주실 것을 기대한다."(Poetical Works, Ⅲ, 203-4). 우리는 그리스도가 거기에서 우리와 만나실거라는 확신속에서 주님의 만찬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만찬에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매우 확신했기 때문에, 성만찬의 회심시키는 능력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었다.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이제 당신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그리고 당신의 하나님께로 향한 회심은 주님의 만찬에서 이루어졌다." (Journal, vol. 2, ed., Nehemiah Curnock[London: Charles H. Kelly, n.d.], 360-61).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주님의 만찬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웨슬리에 의하면,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웨슬리의 또 하나의 실제적인 혁신은 언약 예배(Covenant Service)였는데, 1755년 이후부터 이는 감리교 협회의 매년 관례가 되어 버렸다. 웨슬리는 그의 예전신학의 기초를 17세기 청교도 예배에 두었는데, 언약 예배의 기도, 응답, 거룩한 서약들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훈련들을 보다더 활력있는 프로그램이 되도록 했다.
18세기 감리교 협회는 영국의 성공회 내에 존속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예배의 현장에있어서 감리교 예배는 성례전적 요소들을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감리교도들은 자신들의 지역 교회에서 성례를 받도록 가르침 받았으며, 반면 감리교 예배당은 찬양과 설교를 위해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감리교 협회가 영국 국교회로부터 독립을 얻고, 드디어 1795년에 성공회와의 모든 인연이 끊어짐에 따라 그러한 현상들은 특히 영국에서 점점 굳어져만 갔다. 웨슬리의 성례전적이면서도 복음주의적인, 한마디로 긴밀한 긴장관계에 있는 그의 예배 신학은 다소 탈예전적인 예배를 더욱 선호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들은 특히 북아메리카 개척자들의 독자적인 문화에 의해서 보다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18세기에 일어난 학생 운동과 예전적 갱신 운동의 영향으로 감리교는 예전 중심의 예배와 성례전적 예배 실천의 갱신을 맞이하게 되었다
10)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교회 예배신학(An African-American Theology of Worship)
미국내 흑인들의 예배는 깊은 억압과 자유를 향한 애타는 갈망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배를 통하여 흑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경험하며 나아가 죄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얻게 된다.
A. 들어가는 말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이들은 교단을 초월해 한마음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소외되고 억압된 사회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들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공통된 욕구와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드리며 하나님의 용서와 신실하심, 그리고 억압의 사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그들을 억압으로부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로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능을 부여받기를 간구한다. 중생한 자들의 모임으로서 이들의 예배는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코이노니아의 장인 예배를 위해 모이고,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 세계 선교와 복음화를 위해 세상속으로 흩어지기를 소망한다.
미국내 흑인 기독교는 두 죵류가 있다. 하나는 아메리카 흑인 개신교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유럽계통의 아메리카 흑인 회중교회가 그것이며, 또한 단일 교단으로서 로마 가톨릭과 수 많은 크고 작은 분파들이 있다. 그렇기에 아메리카 흑인 기독교인들은 같은 통일성 아래 다양한 신앙의 색깔을 지닌 예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각기 다른 교단내의 다양한 예배 형태로 인해 미국내 흑인 예배자들은 자신들의 예배를 한마디로 규정하려는 시도들을 진부한 행위로 치부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메리카 흑인"(African-American)이라고 불리는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예배를 다루고자 한다. "아메리카 흑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이름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백인과 흑인이라는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의 문화속에서 그들이 간직해온 아프리카의 고유한 유산과 미국적 유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배는 아프리카 흑인, 미국계 흑인 그리고 유대 기독교 신앙 전통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강제로 이주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의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이들은 삶속에서 경험되어지는 다양한 삶의 시각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친근한 사랑으로 그들속에 다가오시어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서 함께하심을 함께 이야기하며 나눈다. 그렇기에 이들의 예배는 함께 공유하는 공통된 삶의 욕구와 기쁨, 갈등,그리고 희망 등, 그들의 삶의 현장과 관계된 삶의 욕구들을 발산한다. 주일의 공적인 예배에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들이 마련된다. 또한 이들의 예배 분위기는 삶 속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회심의 체험들을 간증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들은 개인적인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심지어 예배의 형태와 의식에도 변화를 끼치는 요인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감사와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적인 체험들은 삶의 현장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곳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들의 기본적인 예배의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삶의 상황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나 주시며 성령님에 의해 마음문이 열리고 억눌린 영이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흑인 노예의 후예들은 비록 하나님을 만나기 전일지라도 은연중에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과거 낯선 이국땅에서 혹독했던 노예시대를 살았던 미국의 흑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속박하는 노예제도하에서도 이들은 그들을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분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들의 특수한 삶의 상황에서 형성되고 구전을 통해 전해져 온 그들의 노래들은 미국의 흑인 노예들만의 독특한 신학 교리를 형성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B. 신학사상의 뿌리
미국 흑인들의 예배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아프리카의 기본적인 종교적 전통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문화는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에겐 종교적 신앙과 제사를 위한 어떤 규정집이나 경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 없이 많은 부족들, 관습, 문화, 언어, 사회구조, 정치적이며 경제적 제도들 등, 이러한 것들은 아프리카만의 특수한 사회구조를 옅보게 한다. 이들 수 많은 부족들은 문명화되기 이전엔 나름대로의 사회의 제도와 국가 구조가 잘 발달되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본적으로 공통된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에 이들의 삶, 이상(ideals), 덕(virtues), 상징, 표현양태, 그리고 제의적 행위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요소인 것이다. 이들의 삶속 깊이 흐르는 세계관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회들은 같은 세계관을 지니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종교적 우주(religious universe)에 사는 한 개체이다. 그렇기에 자연이나 자연현상, 물리적 사건 그리고 삶의 전 부분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되어 발생한다는 것이다.(John S Mbiti, Concepts of God in Africa, New York:Praeger, 1970, chapters 8-13) 삶, 다시말해 생명은 전인적으로 이해되며 그리고 이러한 삶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는 성과 속을 분리하지 않는 통전적이며 일원론적인 이해인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해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이와 상호관계(interrelated)를 맺은 상태에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우주에 속해있는 한 전인적이며 통전적인 존재로 살아가며 우주와 그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과 결속된 관계로 존재한다.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전통은 유대 기독교 신학의 형성에 직접적이면서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애굽에 정착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초기 기독교 교회가 기독론과 신앙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시작된 때까지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으며 뿐만 아니라, 이들은 신학의 체계적인 조직과 신조(Creed)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주역들를 배출했다. 그렇기에 세계 기독교를 꽃피우고 발전시킨 위대한 신학자 9명이 바로 북아프리카 출신인 것이다. 클레맨트, 오리겐, 터툴리안, 시프리안, 디오니시우스, 아타나시우스, 디디무스, 어거스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날 미국의 흑인 예배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북쪽 세네갈에서 남부 앙골라까지 이르는 서쪽 아프리카의 해변에서 끌려와 노예로 팔려갔다. 미국의 흑인 예배신학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주된 세계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질서있게 창조하셨으며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그분의 창조 사역을 이루시고 계신다.
2)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부분이며, 그렇기에 인간은 모든 피조 세계와 서로 깊 은 연결과 상호 관계성 속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우주론적인 인간이해는 인간이 관 계적이며 상호 결속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확고히 한다.
3) '상호 결속'(Communal solidarity)이라는 말은 대가족적인 사회에서 말하는 아주 친근 하며 가까운 친족관계를 말할 때 쓰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살아있는 자와의 관계 뿐 만 아니라, 죽었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자들과의 역동적인 관계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이 개념은 종종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의 성자들과 계속적인 교제를 경험하는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적인 공동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4) 인간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된다면,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인 삶이 서로 어울 린 다는 통전적인 우주이해는 기꺼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5) 우주의 주기적인 법칙은 하나님의 질서와 조화, 그리고 역사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현 상 들이다. 또한 그러한 우주의 법칙은 인간의 삶의 법칙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6) 시간은 상대적이며 순환적이고 과거에 의해 좌우되어지며 현재의 개념은 광대하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2가지 기본 차원은 현재와 미래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자연 현상의 주기적인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므비티(John S. Mbiti)는 "이들에게 앞으로 2 년 정도의 시간은 현재로부터 어느정도 앞서있는 시간으로 여긴다하더라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 사실 미래라는 것은 시간개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므비티가 제시한 샤스(Sas)와 쟈마니(Zamani)는 2개의 시간 개념을 뜻하는 말인데, 그 는 영국인 들에게 익숙해있는 과거,현재, 미래라는 논리적 시간개념을 피하기 위해 사 스와 쟈마니를 제안한 것이었다. 샤샤(Sasa)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즉각적이며 순간적 인 시간과 관계된 시간용어이다. 이는 보다 더 현재에 가깝고 즉시적인 시간을 나타내 는 말이다. 미래의 일들은 필연적인 자연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 다. 그러나 미래의 시간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다. 쟈마니는 제한받지 않는 과거를 포 함하고 있는데, 이 쟈마니는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와 즉시적인 미래를 내포하고 있기 에 영국인들의 과거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7) 공간과 시간은 삶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개념이다. 이 공간과 시간은 때때로 같은 의미 의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시간과 같이 공간도 상대적이며 어떤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 는 반드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샴사(Samsa)가 사람들이 같은 시기에 경험 하는 삶의 모습들을 담고 있듯이 공간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다. 그러므로 땅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성스러운 것을 받들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땅 은 조상때부터 그들이 의지해온 존재의 원천이며 신비적으로 산자와 죽은자를 함께 묶 어 놓는 끈과 같은 것이다.
대개 아프리카인들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성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확고히 믿고 있다. 예를 들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우주의 구조라든지 인간의 전인화(human wholeness)를 위한 기본적인 욕구 등 말이다. 제의적인 행위는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만나도록 하는 하나의 통로이다. 예배시 하나님과의 연접은 상징들과 기호를 통하여 가능하다. 예를 들어 땅과 같이 물은 생명의 기원과 자양분임을 상징한다. 또한 물은 종종 창조주 하나님과 동의어로 이해되었는데, 그분의 임재하심과 계속적인 창조사역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큰 바다를 이루는 것을 볼 때 뚜렷해진다. 물은 또한 죽음의 의미와 새 삶의 의미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물로 씻는다는 것은 유한한 생명이 창조의 과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물은 많은 제의적 활동에서 사용되는데 특히 피조세계의 우주적 관계들을 나타내고, 조상들의 죽음을 상징하며 재창조와 중생, 그리고 성화됨을 상징하는 제의에서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있어 제의적 행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악의 세력으로 가득찬 세상속에서 존재론적인 조화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응답의 형태는 의식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또 즉흥적일 수도 있고 예전적일 수도 있다. 또한 개인적일 수도 있으며 공동체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신적인 계시를 받은 어떤 사람은 공동체속에서 사는 동안 혹은 불균형이 발생했을 시 적절한 제의적인 형식을 갖춘 제사를 행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사장' 혹은 '중재자'라고 불려지고 공동체를 대신하여 조정자의 역할을 하도록 세움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적인 영과의 접촉을 통해 능력을 행사하도록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일반적으로 묵상의 형태보다는 음성과 신체로 표현된다(Mbiti, African Religion and Philosophy,75). 하나님께 드리는 공중의 예배는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경험적인데, 단순히 정보전달이라기 보다는, 현실에 대한 공동체의 나눔에 초점을 맞춘다. 전통적 아프리카의 종교들 속에서, 단순히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련의 생각들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가 한정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간단하게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들 속에서 경험될 수 있게 때문에 존재한다. 아샨티 속담에 "아이에게 궁극적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아이들조차 마치 본능에 의한 것처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Ibid, 38).
예배가 기본적으로 신성에 대한 상황적-경험적 응답이기 때문에, 공동체에게는 평범한 상징들과 상징적 형식들이, 상호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가장 표현력 있는 수단들을 제공한다. 종종 거울이나 음성 재생기, 혹은 자연환경 속에서의 움직임 같은 상징들을 통해서, 공동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을 나타낼 수 있다. 음악, 육체의 움직임(춤), 몸짓들, 동족간의 하나됨 같은 다양한 형식들과 모양들은 아프리카 민족들에게는 평범한 상징들이다. 물, 산들, 나무들, 큰 바위들 그리고 동물의 생명과 같은 자연 요소들 또한 세상 속의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대한 상징이다. 다른 전통들 속에서처럼, 상징들은 낳아지고, 적용되고, 새로운 상징들이 등장하면 소멸한다.
아프리카 민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여정을 계속할 때, 이제 이 상징들은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민족들 속에 깊이 뿌리내려진 신학적 토대가 된다.
C. 기독교와의 첫 만남
현존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미국 내 흑인 기독교의 신학을 최종적으로 구체화했을 몇몇 아프리카인들은 당시 식민지였던 북미 대륙에 도착하기 전에 기독교를 이미 접했었다. 아프리카 흑인들을 포획하고 노예화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위해 유럽인들은 기독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단시일 내에 많은 세례를 베풀었다. 이 "급작스런" 세례들은 노예화된 아프리카흑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식민지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전 급속히 행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북미의 대지 위에서 영국교회의 권위 아래 세례를 받은 첫 흑인 아이들의 부모들은 1619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우연히 보내진 흑인 노예 부부였다. 이것이 바로 유럽계 미국인들이 흑인들을 속박하면서 조금이나마 그들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마지못해 기독교화하려한 역사의 첫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모순된 역사는 위선의 탈을 벗어 던진 신학을 형성하려 했던 미국 내 흑인들에겐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의 땅, 북미에서는 수많은 흑인들이 유럽계 미국인들에 의하여 제정된 일련의 법 아래 노예가 되도록 강요받아야 했다. 그리고 1624년과 1641년에 흑인들에 의해 베풀어진 얼마되지 않는 그들만의 단독 세례 사건을 제한다 하더라도, 당시 회중 20명으로 구성된 가장 큰 흑인 교회의 예배예전에 조차도 당시의 예전학자들은 일말의 관심을 갖지도 않았었다. 이는 당시 북미 대륙의 백인 개척자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능력을 인정치 않았기 때문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자료들이 전해진다. 또한 흑인 노예들은 기독교의 교리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적능력조차도 없다고 하는 백인들의 부정적인 견해로 말미암아 점점 노예들의 기독교화를 독려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다. 심지어 어떤 농장주들은 기독교인이 된 노예들은 건방져서 통제하기가 불가능해진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백인들 사이에서는 흑인 노예들을 계속적으로 전도하고 기독교화할 것인가에 대한 뜨거운 논란과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노예전도에 관한 긍정적, 부정적 결론들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노예의 자유에 관련하여 "세례받은 노예들의 신분"에 관한 구조적인 논쟁이 다름아닌 심각한 신학적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이 인간을 상징하는가?" 그리고 "과연 어느 누가 어떤 민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고 어떤 민족은 그렇지 않다고 정죄할 자격을 가졌는가?"라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와 연합됨"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는가? 신체의 한 부분이 전체의 가치보다 더 귀중할 수 있는가?, 이러한 판단이 인간의 결정에 맡겨질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들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러한 질문들은 미연방 법정에서 변형된 형태로 해결되었는데, 이는 새롭게 부각하고 있던 미합중국이 자기들에 의해 저질러진 이러한 사회문제에 궁색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비인륜적으로 처우하는 행위를 합법화하기 위한 법들을 실행하기 위하여 미연방은 성(聖)과 속(俗)을 분명하게 이분화시켰다. 그리하여 흑인 노예들은 세례를 받아 그의 영이 자유하게 되었을지라도 육신의 신분인 노예의 의무로부터는 자유하게 될 수 없음을 명시했다. 이후 미국에서는 세례받은 노예들을 계속하여 비인륜적이며 차별적으로 대우하면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전도하고 세례주는 일에 대단한 열정을 쏟았다.
초기 백인 지주들은 노예들을 온전한 교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예배자로서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의 예배 참여는 그리스도 몸의 이 "의문스러운"지체들이 백인 자신들에게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관대한 농장주인에 의해서만 허락되었다. 더군다나 흑인 노예들은 예배의 형식에 관한 문제에 참여할 합법적인 목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이들은 비밀스런 종교적 모임들을 은밀히 만들게 되었다. 농장주의 감시를 벗어난 숲속의 외딴 "덤불 은신처"에서 노예들은 자신들만이 예배할 수 있고 자신들의 신앙경험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첫 흑인교회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신앙의 핵심, 생존을 위한 투쟁들, 그리고 이스라엘과 모든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케 하시는 사역을 자신들의 정황에 맞추어 재해석한 내용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신학화의 토착화 방법이 발견된 것이었다.
영적 각성운동을 통한 자유로움과 예배에서 종종 나타나는 자유분방한 열광주의는 후대의 예배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자유로움에 익숙해 있는 미국내 흑인과 노예들은 연합 예배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고, 오랜 뒤 미국의 부흥 운동가들은 미국의 영적 부흥의 축복이 바로 과거 흑인 노예들의 "덤불 은신처"에서 기인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예배 처소에서 설교와 찬양, 그리고 모든 진정어린 기도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며 찬미한 것이다. 이처럼 다분히 소외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들을 오랜동안 기억했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공동체들의 삶과 자신들의 삶이 일치되는 것으로 재구성했던 것이다. 또한 예배 요소들의 형태들은 억압받는 민족의 진솔한 표현들에서 만들어졌다.
미국의 흑인들은 명맥하게 타불라 로사(Tabula Rasa)에 도착하지 않았을 뿐더러 하나님의 이야기에도 익숙치 않았다. 백인들이 전해준 하나님은 하나님이 그레꼬-로만 역사를 통해서만 오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경에 명시된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셨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었지만 이것 또한 그들의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의 토착화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자신들의 삶과 유사했던 나사렛 예수는 노예의 신분인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선 해방자 예수가 된 것이다. 인종차별에 찌든 예배당, 인종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의자와 압제적 교회환경 속에서 드리는 예배는 흑인 노예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위선적이며 스스로 혼동가운데 있는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자신들이 영성의 진보를 촉진시킬 수 있는 구별된 장소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경이 그들이 추구하려한 새로운 신학을 낳게 한 가장 유일하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투쟁과 고독으로 가득찬 그들의 삶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투과해 볼 수 있는 렌즈가 되는 것 같은 특별한 해석학적 원리는 복음을 노예들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노예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성경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기 오래 전에, 그들이 들어 왔던 자유에 대한 이야기들은 자신들이 경험으로 알게 된 신과 성경의 하나님이 같은 신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만약 하나님이 사자굴속의 다니엘과 풀무불 속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히브리 아이들을 자유케 했다면, 동일한 하나님이 북미 대륙에 와있는 노예들을 억압에서 자유케 하실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성육신한 하나님의 복음은 그들이 전하기 시작한 하나님과 더불어 자신들의 삶에 함께 했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각양각색의 문화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자신들의 언어로 복음을 들었지만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능력과 복음전파라는 공통된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로이 영어를 배울 수 있게 됨으로 이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 백인들만이 소유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D. 토착화로 균형을 이룬 새로운 예배신학
미국내의 흑인 기독교의 신학화 작업은 위에서 언급한 아프리카의 원시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선택한 자들을 자유롭게 부르시는 하나님, 한 민족의 삶과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그들을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은 이 땅의 유한한 존재들을 불러 그분을 예배케 하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그 하나님께 향한 신앙의 메시지를 증거해 온 전통적인 방법은 노예들의 노래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민족을 위한 기호화된 통신의 기본적 형태로서는 음악과 노래를 들 수 있는데 이러한 그들의 선천적인 은사는 아직도 큰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노예들을 위한 신학화 작업은 어떤 한 개인의 체계적인 노력이 아니었고, 그들 공동체의 "민족적 과업"으로서 계속된 것이다. 다문화 속에서 구전이라는 민간전승이 연속되는 삶에 기초하는 반면에, 새로운 대륙에서의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종교들을 존속시키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민족전통을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미국내 흑인들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기초적 신앙의 내용들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것은 새롭고 역동적인 문화의 형성과정을 더욱 강화시켰으며, 또한 새로운 방법으로 신학을 체계화하기 위한 중추적 조절 "화음"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생명과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새로운 상황이라는 현실과 삶의 흐름에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혼합주의(Syncretisms)는 신학적 강연과 최종적인 신학적 결정을 위한 모임에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아프리카인들은 전지한, 편재하는, 전능한, 초월적인, 내재적과 같은 그레꼬-로만식의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험은 하나님이 모든 앎이고, 모든 지혜이며, 영원하시고, 어디에나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넘어서 계시는 분임을 가르쳐 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은 예배에서 특히 그 효력을 발하게 되었다.
구별된 신성한 장소인 교회에서조차 "거룩하게 도둑맞은" 그들의 자유는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은 교회가 바로 '에클레시아'이어야 한다는 교회론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을 소외하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언제나 외롭고 이방인이었던 노예들은 자신들이 예배자로서 하나님과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깨닫게됨으로 비참한 삶의 경주를 극복한 것이다. 흑인교회는 처음부터 자유스런 예배 공동체로 구성되었다. 이 교회의 생명력은 언제나 지속되었고 참된 예배의 진정성과 지속성의 조화에 계속해서 부합하였다. 교회는 제도로서 기능하기에 앞서 사람들과 공동체 전체가 보여지고 발견되는 살아있는 단체로서 작용해야 한다. 자신들만의 신성한 공간을 갖게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성령의 능력 아래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자신들의 최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거룩한 능력은 축적되고 생존을 위한 희망이 부여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 노예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배와 삶으로 응답하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수세기 동안 예배가 발전되면서 성경의 말씀들은 흑인들의 신앙과 영성의 기초가 되었다. 처음부터 흠정역판(King James) 성경에 몰두된 흑인 예배자들은 점차적으로 영어에 대해 질문하기를 꺼려했고, 심지어 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비유 말씀도 그러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나 다른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새롭게 번역되어 도입된 성경에 회중들은 조심스레 귀를 귀울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국내 흑인 예전학자나 성서학자, 음악가들에 의해 연구된 최근의 연구들은 모두 이러한 과정과 작업들에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하겠다.
미국 흑인들의 성경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경전인 것에는 입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기록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증거하는 책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의 경험들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규범들을 교훈하고 있는 말씀이며 구원의 진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모든 흑인 회중들의 예배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렇게 지속하도록 항상 결정을 내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다른 어떤 것 보다 자주 성경에 기초하며, 예배시 영감을 얻게 되는 원천이다.
미국 내 흑인들은 예언자, 목사, 그리고 하나님의 치유의 거룩한 도구로서 하나님께 부름받은 흑인 설교자의 역할을 언제나 존중한다. 흑인 설교자들의 유명한 은사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능력과, 모인 회중이 그 말씀을 그들이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그리옷(griot;이야기의 화자이며 구전 역사가)처럼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부름-응답"의 방법으로 공동체에 의해 지탱되고 고무된다. 설교자가 설교 도중에 회중과 개방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 보다 더 친근한 결속이 맺어지게 되며, 이러한 결속은 찬양과 예배의 다른 순서들과 그 밖의 계속되는 공동의 친교속에서 자유로와진다.
설교자들은 노예 시대동안에 그들의 공동체에서 가장 지성적인 존재로 여겨졌기에 모든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설교자는 신학화 작업에 필요한 기본적인 여러 자료들을 제공했으며, 회중들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전통적인 형태로 재구성했다. 이들의 신학적 핵심은 종종 찬양 가사를 통해 옅볼 수 있으며 예배와 매일의 노동 현장속에서 표현되고 증거되었다. 이들의 삶의 주제는 교회의 음악을 통하여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성(聖)과 속(俗)을 통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아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종교적 제의 행위는 그 내용과 상징들에 있어서 대부분 자신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다른 여타의 제의 행위들과의 가장 큰 유사점은 제의 형태와 그것이 속해 있는 문화와의 역동적 관계에 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삶의 자리에서와 예배 절정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창조적으로 응답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또한 그 형태와 모양은 예배자가 겪어온 삶의 경험들에 의해 규정되는 예배의 성격들과 각각의 공동체의 욕구와 기대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미국내 흑인들에게 있어서 제의 행위인 예배는 원래 그들을 사회 중심된 구조로부터 소외시키려는 미국 사회에 대항하려는 반사회적 조직으로 기능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J.Randall Nichols, "worship as Anti Structure : The Contribtion of Victor Turner," Theology Today 41<January 1985>:401-402; see also Victor W. Tuner, The Ritual Process : Structure and Anti-Structur <Itaca, N.Y.:Cornell University Press, 1963>).
묵상적이든 무아지경으로 이끄든지 간에, 예배는 성령님에 의해 주도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사회로부터 떠밀린 사회의 끝자락에서 그것도 제한적인 차원으로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아래 하나님께 응답의 행위를 할 때 우리의 전 인격체가 변화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과 비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예배를 말할 때 독특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한마디로 미국 내 흑인 기독교의 예배는 경험적이며, 상황적(Contextual)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예배는 다양한 성품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즉, 인격적이면서 내재적이며, 초월적이면서 권능적이신 하나님을 통합적으로 경험하는 예배라고 할 것이다. 예배자들은 절대 존재이시며 신비로우시며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게 되며 그럴 때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미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압제의 세력을 능히 정복하사니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만남의 장소'이며 제단(alter)인 것이다. 우리는 이 제단 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다. 예배의 사건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어지는 어느 곳에서나 발생될 수 있지만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한자리에 모이는 주일 예배를 통해 발생한다. 이들은 예배시 뛰기도 하며 말하며, 찬양과 더불어 소리를 높여 외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만남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살아서 임재하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온전한 회심을 체험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기도와 찬양과 설교를 통하여 동일한 고백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예배 신학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할이다. 성령님은 예배의 역동적인 권능으로, 인격적이면서 강권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성령님은 단순히 감정적 분위기를 조성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의 친근하면서도 우리를 변화시키는 권능은 구원을 가능케 하며, 예배에 생동감을 부어주시고 교회의 사역, 뿐만 아니라 선교와 목회를 더욱 견고케 해주시는 것이다. 이외에 이들의 예배신학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는 제의적 행위와 성령님에 대한 이해에 따른 신학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교단의 정책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차이점과 교단의 정책은 앞에서 이미 기술한 여러 교파들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만찬과 세례에 있어서 더욱 뚜렷이 보여진다.
여기서 주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예배에서 보게되는 "자유양식(liberation key)"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예배에서 나타나는 자유양식은 과거 노예제도 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은밀히 조직된 '덤불 은신처'의 분위기 속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이 '자유양식'은 미국으로 이주해온 흑인들의 마음속에서 처음 발견되고 타올랐으며 지금도 흑인 복음송과 운율 찬송가들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본성은 따로 구별된 예배 처소를 원했던 초기 전통 신학자들의 아프리카 원시 세계관에서 분명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며, 믿음의 공동체는 각각의 회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삶의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신앙의 고백을 표현하고 찬양으로 증거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교파간의 차이로 인해 유일하면서도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낼 때에도 미국의 흑인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임함으로 하나님에 의해 자유케 된 그의 백성은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과 '말한 대로 살자'라는 결단을 하게 된다.
11)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예배신학(A Restoration Theology of Worship)
예배신학의 회복은 그리스도와 성경만을 위해 과거의 전통과 신조를 거부함으로 일어났다. 결국, 예배에 대한 모든 생각은 이 전제로부터 형성되어진 것이다.
A.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배 회복운동의 신학을 연구하고자 한 예배관련 서적과, 교회의 중심된 행위로서 대두된 예배의 신학을 토론하고자 한 노력들은 오래되었으면서도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신학'이라는 용어로 예배 회복운동의 흐름들을 한정하려 했다. 그들은 '신학'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만약 그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이야기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다양한 입장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작고한 역사학자 드고르트(A.T.DeGoort)는 다음의 내용들을 환기시키면서 '신학'적 논쟁을 꺼려하는 "제자회"를 설명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 중세와 후기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는 신학적 논쟁에 지나치게 빠져든 나머지 토론학의 형제요, 정치에 깊숙히 관련된 것처럼 세상에 내 비췄다.(A. T. DeGroot, Disciple Thought: A History [Fort Worth:Texas Christian University, 1965], 23.)
예배 회복운동의 경종을 울렸던 유명한 투쟁은 "교리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신앙의 변증들을 신자의 자격과 안수, 혹은 이 둘 모두를 결정하는 시험으로서 사용했다. 건전한 신조를 고백하는 사람은 받아들여졌고, 잘못된 신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추방되었다. 회복운동의 창시자들은 이러한 신학의 오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들의 후예들도 '신학'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단정지었다. 이렇듯 반지성적 경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신학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했다.
제자 교회들은 그들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회원이 되기 위한 기본적이면서 정통적인 자격 시험인 신학의 사용을 계속해서 거부했지만, 다른 한편 그들은 다른 교파의 기독교인과의 대화를 위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명료화하기 위한 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신학의 목적은 신앙의 내용들을 변호하고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교회에 입교하고자 할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으며 그분을 당신의 주님이며 구원자로 믿으십니까?" 이것은 비록 쉽게 풀어서 썼지만, 이 질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거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마16:16) 위와 같은 신앙고백은 매우 단순한 고백이다. 두번째 물음에서 '당신의'라는 단어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에 따라오는 개인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것은 신학적인 중요한 또다른 물음을 대두시킨다. 비록 이 글이 기독론에 관련된 중요한 물음을 연구하는 글은 아니지만, 윌리암 R. 바(William Barr)는 이 주제를 연구한 훌륭한 책인 "제자들의 전통에서의 기독론: 하나의 평가와 제안"이 있는데, 이것은 캐넷 로랜스(Kenneth Lawrence)가 편집한 "Classic Themes of Disciples Theology"(제자회 신학의 전통적 주제:역자 주)에 실려있다. 만약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구원자'라고 한다면, "그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가?"하는 것이다. 다른 말을 빌리자면, "무엇이 죄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는가?"하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무엇이 우리의 희망이며 인생인가?" 만약 우리가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예수는 인간이며, 어떤 방법으로 신이신가? 하는 것이다. M. 유진 보링(M. Eugene Boring)의 마가복음 연구인 'Truly Human/Truly Divine(온전한 인간이며, 온전한 하나님:역자 주)은 위와 같은 물음들을 오늘날의 제자회의 빛 아래서 탐구하고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는 동안, 우리는 어떤 권위에 호소하게 된다. 스톤 캠벨(Stone-Campbell)의 회복운동으로부터 연유된 모든 분파들 중에, 성서에서 발견된 이 권위, 즉 "책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것은 "신조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외침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각기 다른 지류들은 성경이 어떻게 연구되고,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질문들을 숙고하는 가운데, 제자회와 예배 회복운동의 또 다른 후예들은 그 운동의 초기 사상가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로얄 헌벌트(Royal Humbert)는 The Christian Baptist, The Millennial Harbinger(기독교인의 세례와 천년왕국의 예언:역자 주), 그리고 몇몇 다른 자료들에 나타난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의 저작들을 분석하는데 30년을 보냈으며 그의 연구의 산물로는 "Compend of Alexander Campell' Theology"(알렉산더 캠벨 신학 개론:역자 주)였다. 헌벌트는 캠벨의 신학을 "신앙과 이성", "성경", "계시", "하나님", "주님으로서 그리스도", "성령", "은총", "교회", "은총의 수단", "인간", "기독교 윤리", 그리고 "종말론"이라는 12개 주제의 분야로 구성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헌벌트는 알렉산더 캠벨이 결코 조직신학을 편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있는 신학자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알렉산더 캠벨의 풍부한 저작물들은 예배 회복운동의 신학에 다른 어느 저술가들보다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의 오랜 활동 기간동안 알렉산더 캠벨의 관념과 태도들은 진지한 형태로 변화를 겪었다. 초창기 동안 그는 인습 타파적인 사람으로 불렸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세례"라는 책에서는 그의 많은 저작들에 대한 부정적인 지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천년왕국의 예언"을 편집하는 동안 그는 좀더 점잖고 긍정적인 어조를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알렉산더 캠벨이 직접적으로 동일한 주제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주제를 언급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예로, 비록 회복운동시 캠벨과 함께 했던 다른 종교개혁가들이 기독교의 연합을 이루기 위한 기초 단계로서 사도적 교회의 신앙과 실천을 회복하고자 하는 중심된 목적에 접근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들은 캠벨과는 다른 입장에 서있었으며, 그리고 초기 사도적 교회의 신앙과 실천에 대한 신념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신자들의 몸을 지칭하는 호징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여기에 대해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 바통 W.스톤(Barton W. Stone) 그리고 월터 스콧(Walter Scott) 모두는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 교회"라는 단순한 이름을 선호한 반면, 알렉산더 캠벨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자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예배 회복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가 생각의 자유와 사상의 다양성을 가치있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운동의 신학에 대한 보편화는 항상 지나칠 정도로 단순화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와 관련된 네 개의 주제에 대한 이어지는 언급들은 현재 기독교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는 신학적 대화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B. 성경
유진 보링교수는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의 성경에 대한 관점을 "다른 책들과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은"것으로서 묘사했다.
성경이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으며 인간의 단어들과 이념들로 표현되었으며,그렇기에 다른 모든 책들과 같은 문법적-역사적 방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된 계획적인 진리들로 이루어진 책이며, 전체적으로 신적인 영감을 받은 책이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책들과는 다른 범주로 다루어져야 한다.(Eugene Boring, The Formation of a Teadition : Alexander Campbell and the New Testament, "The Disciples Theological Digest 2:1(1987):5-62).
캠벨은 성서학적인 깊이가 전문적인 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독자들에게도 가능하기를 원했다. 그는 또한 환상적이며, 복잡하며, 유비적인 해석으로부터 성경을 자유롭게 하며, 뿐만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했던 역사 비평적 해석으로부터 성경을 자유롭게 하는 해석의 법칙을 제시했다. 그는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 보다 다 강한 빛을 발한다고 믿었으며, 창조기사와 족장기사는 별빛과 같으며, 모세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역사는 달빛과 같으며, 기독교 교회의 역사와 서신서들은 햇빛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빛은 히브리서로부터 비취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과 학자들은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 역사비평과 문학비평이라는 방법으로 연구하면서, 성경은 경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갈급해 하는 사람이 전 마음과 열의를 가지고 연구해야 하는 장서이다.
C. 교회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의 '선포와 연설'(Declaration and Address)은 신약성서 속에서 하나의 일치된 표준이 되며, 재현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말하기를,
구약성서가 구약성서 시대의 교회의 예배와 훈련, 치리를 위해서,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의무를 위해서 그랬던 것처럼, 신약성서는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의 예배와 훈련, 그리고 치리를 위한 하나의 완벽한 법전이었으며, 그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의무를 위한 완벽한 규칙이었다.
캠벨은 그동안 기독교인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약성서가 가지고 있는 단순하면서 오랜동안 잊고 있던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한 해결책은 토마스 캠벨에 의해서도,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 의해서도, 그리고 그들의 연구 속에서 그들과 함께 참여했던 사람들에 의해서도 결코 발견되지 못했다.
마크 툴루스(Mark Toulouse) 교수에 의하면 문제점 중 하나가 그들의 역사 읽기가 객관적이었기 보다는 오히려 향수에 젖어 있었다는 것이며, 사도시대의 원시교회는 유일하며 단순한 모델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은 더욱 아니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하나의 법전(a constitution)"으로서 성경을 읽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그들은 정확한 지점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방법은 찾을 수 없는 잘못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배와 삶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인간의 권위 대신에 하나님의 음성을 간절히 간구했으며 이것을 하나의 잣대로 하여 세상이 기대하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끊임없이 이뤄나갈 뿐만 아니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그들의 노력 중 가장 값진 열매는 예배의 중심으로 새롭게 자리잡게 된 주님의 만찬에 있었다.
D. 주님의 만찬
케잇 뚵킨스(Keith Watkins)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주님의 만찬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소개했는데,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중심된 행위는 주님께서 주인이시며, 모든 곳에 있는 그의 백성들이 손님이 되는 식탁이며, 이 식탁은 기쁨의 향연인 것이다."(Keith Watkins, The Feast of Joy{St. Louis: Bethany Press, 1977},11). 이 같은 주장은 세 가지의 중요한 신학적인 관점을 담고 있는데,
첫째, 주님의 만찬은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Stone-Campbell 회복운동의 모든 추종자들은 매주일 마다 성만찬을 거행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당시 어떤 이들에 의해 주님의 만찬의 중요성과 그 의미가 더욱 퇴색됨으로 해서 성만찬이 설교 사역 보다 덜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조차도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성만찬이 없는 주일 예배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점점 수를 더해가는 교회들은 과거의 어느 때 보다도 예배로 부름 받는 이유가 주님의 만찬에 있음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로, 주님의 만찬은 기쁨의 잔치이다. 이것은 또한 감사의 만찬인데, 이 식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그것을 맘껏 즐거워 하는 것이다. 예배의 열쇠가 되는 이 '기억'(Remembrance)이라는 말은 과거의 재생이 아니라, 신선하고도 현대적인 의미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오늘의 상황속에서 새롭게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최근의 추세는 개인적인 묵상을 위한 엄숙한 시간으로서의 성찬만에서 벗어나 (비록 개인적인 깊은 변화를 일으키지만) 공동체와 기념적 축제로서의 성만찬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그렇기에 교회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케 하는 주님의 식탁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만인에게 선포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배(聖配)를 교회의 상징과 로고(logo)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식탁의 보이지 않는 주인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그분께서 바로 그곳에 오도록 우리를 초청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어떤 사람과 집단도 어느 한 개인도 거부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 주님의 식탁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다. 또한 예배 회복 운동의 대다수 참여자들에게 던져주는 성만찬의 이면적인 의미로는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주님의 식탁에 나아올 때마다 우리의 잊혀지기 쉬운 세례의 참된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조차 "제한 초청"(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으로 침수침례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성찬참여자의 제한을 두어 실행했지만, 항상 "열려진 성찬"이라는 방법도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의 보이지 않는 주님이심을 믿는 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 임재하셨다는 것을 확실이 증거하는 것이다.
E. 세례
여러 교파들 간의 에큐메니칼적 대화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가 갖는 세례 신학은 존경을 받아왔다. 이들은 끊임없이 성경을 통하여 세례의 이상적인 형태나 세례의 정확한 집례 방법들을 찾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를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속에서 이들은 성례전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발전시켜 왔다. 일생의 단회적 사건으로, 그렇기에 반복될 수 없는 유일회적인 은총의 사건으로, 그와 동시에 하나님에 의한 직접적인 사건인 이 세례는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수반되는 것이다.(Clark M. Williamson, Baptism: Embodiment of the Gospel, The Nature of the Church: Study Series 4[St, Louis: Christian Board of Publication, published for the Council on Christan Unity,1989]).
콜벌트 칼트라이트(Colbert Cartwright)는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믿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Colbert S. Cartwright, People of the Chalice[St, Louisd: CBP Press, 1987], 69.) 이러한 우선적인 물음앞에서 스톤 캠벨(Stone-Campbell)의 예배 회복운동의 세가지 주요 분야들은 하나로서 정립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든지, 고등비평의 방법으로 해석하든지 간에, 또한 우리가 다른 종파들을 외면하거나 교회 연합을 하든지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12) 오순절계열의 예배신학(A Holiness-Pentecostal Theology of Worship)
이들 예배에 있어의 중요한 요소는 찬양이다. 찬양이란, 노래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경배요 증거인 것이다. 예배에서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의 삶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의 사역들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찬양한다.
오순절 교회의 회중들에게 있어 예배의 초점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집회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찬양중에 거하시는" 분(시22:3)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러나 합당한 찬양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의해 약속된 자유함과 그리고 사도 바울의 다른 말들 즉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14:32)와 "모든 것을 적당히 하게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의 말씀대로 어떤 정해진 형태를 갖고 있는 다양한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이 기존 교회들의 냉담하고 형식화된 듯한 모습에 불만을 품고 자의로 기존 교회들을 떠났든지, 혹은 떠날 것을 종용 받았던지 간에, 예전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방언을 말하고(행2:4) 다른 영적 은사들-적어도 오순절 교리 중 이 부분의 지조격인 챨스 파햄(Charles Parham)에 따른-을 동반한 그들 자신의 성령 세례에 대한 열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공적 모임에서 비슷한 영적인 열렬함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하실 일을 와서 보라"라는 말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시34:8)의 말씀과 함께 공공연한 초대의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함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의 요구가 충족되는 예전들을 무의식적으로 발전시켰다.
오순절 교회의 음악은 창의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오순절 교회의 음악은 대중문화의 음악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즉 복음성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나는 지치고, 야윈, 그리고 슬픔에 가득찬 모습으로 예수께 왔었다오. 그런데 그가 나의 죄들을 없애 주셨소", "십자가에 달리신 내 주님을 모시지 않으채, 허영과 교만속에서 내가 보낸 수 많은 나날들이여"와 같은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성가곡들은 성경말씀에서 인용되었는데,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장)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시34장)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경배의 노래들, 그리고 초대와 선교적이고 복음적이고 그리고 부흥에 관계된 노래들, 그리고 계절에 의한 찬송가들은 모두 미국 개신교 찬송가에서 자유롭게 빌려 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성령님에 대한 독특한 경험으로 인해, "오 주님, 지금 권능을 보내소서", "예수여 오셔서 지금 나를 채우소서", "오순절의 불이 떨어지고 있으니, 내개 부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라"와 같은 새로운 찬양들과 성가곡들이 쓰여졌다.
악기들은 당연히 찬양보다는 덜 중요하긴 했지만 보통 노래를 위한 반주로써 언제나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구세군의 금관 악기와 북들, 피아노와 오르간, 드럼, 탬버린, 그리고 키타와 같은 모든 것들이 대중 음악적인 표현 방식에서 수용되었다. 젊은 예배자들이 맨 먼저 현대적인 양식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을 수정하였고,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것들을 수용가능한 방식들로 예배에 통합시켰다. 회중을 교화시키는 것 그 이상으로 오순절 음악에 있어서 심미적이란 것은 없다.
대중 기도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진실성을 가라 앉히기 위한 어떠한 억제도 없이 오직 회중에 행하는 개인 기도에 불과하다. 열렬함과 자발성은 오순절 기도의 특징들이다. 오순절 교인들에게 있어서 문서화된 기도들은 열등하며 비영적인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향하여 직접 지시받기 때문에 대중기도에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개인적인 문제들이 언급되어 질 수 있다. 또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님의 중재하심에 의해 인도될 때에 지역, 국가, 그리고 세계 역시 기도 내용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만약 기도하는 자가 그렇게 기도하도록 인도함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것 역시 괜찮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기도자를 직접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 안에서의"기도란 단순히 예배자들의 언어에서 성령님께 향하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언어, 보통 방언이라고 불리우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형식들로 일어나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 듣고자 할 때 예배자들의 언어로 통역이 뒤따르는 방언에의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통역도 추구되거나 기대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큰 소리로 기도하는 중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후자의 사용은 때때로 한 개인의 "기도언어"로 불리워지기도 하며, 개인적인 덕을 세우는(고전14:4)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한 성령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완전하게 기도하시는 분이시기에(롬8:26-27) 인간의 모든 장애들을 초월하는 중재의 일종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언들 역시 독특한 기도의 행위들인데, 이것들은 모임중에서 누군가가 예배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고전14:3) 짧은 메시지들이지만, 그러나 방언 언어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오순절교의 증거와 설교는 웨슬리 교파의 설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설교는 종종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서도 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라는 증거의 확장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수단이 열렬함과 자발성이었기에, 만약 찬양이나 기도 또는 회중적인 고백이 충분하게 지속되어진다면 설교는 필요하지 않게 되거나, 혹은 예배의 다른 부분들에서 성령님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예배 모임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서구의 오순절주의에서도 이런 경향은 증가하는 추세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좀 더 많은 설교들이 추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교의 예배자는 "말보다는 체험", 즉 설교자로부터 하나님의 축복들에 대하여 듣는 것 보다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경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배는 강단 중심적이라기 보다는 예배자 중심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성령님안에서 가장 큰 체험을 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예배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최고의 계시로서 설교자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예배는 종종 인기 있는 연기자로서 설교자에 초점을 두기도 한다.
하나님의 사람인 남성 또는 여성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교회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예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미국 오순절교들은 비록 가장 높은 직책은 아닐지라도, 여성들과 그리고 지역교회의 몇몇 리더들에게, 그리고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성직을 수여한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통한 영적인 리더쉽이 자기의 멋대로 주도되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다시말해서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와 "나의 기름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역대상16:22)의 두려움 사이에서의 긴장관계가 있는 것이다. 오순절교에서 말하는 성령안에서의 삶은 성령님의 지시를 받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자유함의 울타리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지속해나가는 것인데, 흔히 "성령안에서" 말한다고 하면서 돈에 집착하는 사람을 옛날에는 사기꾼으로 간주했었다.(디다케11,12)
오순절 교회들의 예배는 그동안 개신교의 예배 형태와 상징들을 모범으로 삼았지만 최근에 이르러 가톨릭적인 은사주의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인 오순절교의 예배에 있어서, 이 가톨릭 은사주의의 수용에 따른 그 첫 번째 공헌은 새로운 노래들과 성가곡들에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공헌은 성령님안에서의 삶의 출발이 위기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작은 성령님에 대한 체험들이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구속함을 받은 인간의 본성은 성령님의 각종 은사와 은총들을 받을 수 있고 또한 나타낼 수 있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톨릭적인 은사주의자들은 모든 오순절교들에게 예배는 그리스도중심적인 목적을 두고 드려져야 함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오순절 예배에 있어서 개신교의 영향들은 적지 않게 많다. 예배실 내에는 거의 장식이 없고, 강단은 회중의 주목을 끌만한 제단 뒷편 중앙에 위치한다. 침수침례를 위한 침례통과 성찬대도 위치해 있으며, 여러 색깔들이나, 가운들, 조각, 또는 깃발이든지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는 종종 비둘기 모양과 함께 널리 사용된다. 성경이 펼쳐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성구나 혹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6)와 같은 성구가 예배당 벽에 내 걸리기도 한다. 비록 교회력이 무시되어진다고 할지라도 부활절, 성령강림절, 성탄절 그리고 드물게는 종교개혁주일과 같은 기독교의 절기들이 지켜지고 이 뿐 아니라, 국경일에는 그 의미에 맞는 찬송가를 부르기고 한다. 평범한 주일에는 헌신의 주일, 사랑의 주일, 그리고 매달에 한 번씩 선교주일과 같은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예전으로는 주님의 만찬으로 불리우는 성찬식이 한달에 한 번씩 보통 예배에서 설교 후에 연장하여 거행된다. 성찬의 형태는 공개 성찬(open Communion)이 일반적이고, 신학은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른다. 물세례는 과거보다 현대에 이르러서 덜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 횟수도 드물게 거행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미국을 제외한 세계 다른 곳에서는 중요하고 자주 거행되기도 한다. 십일조와 헌금은 오순절주의의 예배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교회에서의 결혼식들은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일이다. 유아세례는 없지만 대부모(代父母)들 없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헌신식이 있다.
미국 오순절교의 예배는 19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미국 오순절교는 성결교와 그외 다른 복음주의적 교단들이 강조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기도를 통한 질병의 치유', '성령의 은사 체험', '구원 이후에 있게 되는 성도의 성화와 봉사에로의 헌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 사상' 등에 동일한 신학적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신학적 강조점들에 부합되는 예배 형태를 지니기 위해 이들은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의 예배와 예전을 필요한 부분 만큼 모델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영적인 활력을 체험한 회중들이 성령님과 연합될 때 새로운 형태의 예배가 발전되기도 했다. 이들 예배의 요소와 형태를 결정짓는 시금석은 세 가지로 간추려질 수 있겠는데, 첫째 그것이 실제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회중들에게 변화와 감동을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이며, 둘째, 그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가? 를 통해 검증하며, 셋째로 그것이 영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께서 그대로 행하도록 허락하고 계신가? 하는 것이다.
13) 은사중심 교회의 예배신학 (A Chrismatic Theology of Worship)
성령님의 은사를 중심한 예배의 신학은 성령님과의 생생한 관계와 그리고 영적인 은사들의 회복을 강조하는데, 이 둘 모두는 예배에서 경험되어지는 것들이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엡5:18-20)
은사주의 운동은 주로 성령님과 성령님의 선물들인 카리스마(즉 치유,예언, 기적, 방언, 기타등등)의 회복에 대한 강조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운동이 교회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점들 중의 하나는 예배에 관계된 것일 것이다.
비록 정확하게 은사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은, 하나의 주된 증거에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데, 그것은 즉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부터의 예배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존재는 우리의 입술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에는 아름다운 선율의 감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성령님의 역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에(요16:14), 예배를 통하여 성령님과의 살아있는 생생한 관계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깊어 가는 결과를 가져온 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사주의파"라는 말을 떠올릴 때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거룩해진 얼굴과 손을 높이든 열광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열광적인 신앙과 몰입하는 기쁨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노래들, 성가곡들, 기타와 드럼, 박수와 춤, 예배 스탭들과 깃발, 악보와 O.H.P들, 예배 세미나와 그에 관계된 각종 회의 같은 것들이 교회에 등장하게 하였다.
왜 이러한 고정관념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는 은사주의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인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은사주의 운동은 많은 다른 교파들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이것은 다양한 역사적 전통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가톨릭 은사주의 운동은 아마도 모든 면에 있어서 침례교 은사운동과 동일한 신학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다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발걸음과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더욱 풍성케 하시는 성령님을 충만히 경험하게 되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경험과 비슷한 것이다. 비록 그들이 이전에 예수에 대하여 많이 배웠었고 그리고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들었었지만, 이제는 그 차원을 뛰어넘어 그들의 눈이 열려지게 되었고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신학은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이제 그들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되었고, 그리고 그들에게 실재하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은사주의 운동의 예배 형태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들의 예배 유형의 다섯 가지 원칙들과 그들의 신학적인 기반들을 고찰해 볼 것이다. 은사주의의 다섯 가지 원칙은 첫째, 성령님의 중재하시는 현존은 예배자들의 성직자로서의 기능들을 활력있게 하신다. 둘째, 예배는 영과 혼과 몸의 전인을 포함하는 것이다. 셋째, 예배의 행위는 명백한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넷째,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분위기를 창출한다. 그리고 다섯째, 예배는 노래 이상의 것으로서 예배는 '섬김'인 것이다.
A. 성직자의 역할
"너희도 . . .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2:5)
성령님께서 성직자에게 능력을 북 돋우워 주신다는 성경의 말씀은 성직자의 직분을 감당키 위한 기름 부으심으로 묘사된다. 벧전2:9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란,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분을 선전하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장의 5절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함께 지어져 가고 있으므로, 또한 우리는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들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찬양하도록 만들어진 제사장이다.(9절) 또한 우리는 제사장이 되어가고 있다(5절).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자 하셨던 대로의 즉 예배 공동체로 되어져 가고 있으며, 자신이 서있는 직분에 따라 진정한 제사장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제사장이었지만, 그들은 그들이 제사장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을 때까지는 제사장으로서의 의무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다.(출29장, 민8장)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결과로서 왕같은 제사장들 가문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기능들이 활기있게 되며, 또한 우리는 음성으로 드리는 찬양을 포함한 신약시대의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히13:15)
만인 제사장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확실히 은사주의 운동에게는 진기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이해는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강조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으로 충만해진 예배자들은 그들도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오고 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할 때, 우리가 제사장이라는 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우리가 그리스도 외에는 더 이상 다른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마틴 루터의 시대에도 만인이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이해에 제한되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기도 한다. 즉 제사장들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만인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던 잭 해이포드(Jack Hayford)는 "500년전의 논쟁점은 '관계성'(relationship)에 대한 것으로 이는 개인으로서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오늘날에 있어서의 논쟁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찬양의 잠재력을 맘껏 드러내는 '예배'인 것이다"(Jack Hayford, Worship His Majesty).
그러므로 은사주의파에게 있어서, 성령님은 우리를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부터 이끌어내시며 또한 다양한 표현들의 예배를 격려하시어 활력을 북돋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때야 비로서 예배는 하나님께 향한 자신들의 역할을 발견한 활력있는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지는 감사의 희생제사로서 이해되어 지는 것이다.
B. 영과 혼, 그리고 몸
"네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 .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12:30)
이러한 "활력화"에 함축된 의미중 하나는 예배가 신체적 행동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은사주의적 예배는 표정이 강하게 나타나는 예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예배자가 하는 적극적인 일인 것이다. 은사주의적 예배는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다해 노래와 손을 높이들며, 경배의 인사와, 손뼉치기, 춤추기 그리고 외치기를 포함한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예배자에게는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다하여서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은 곧 삶의 동기가 된다. 예배는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표현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영,혼,육의 전인적 존재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분께 예배드릴 때 역시 우리의 영, 혼, 육의 전 존재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예배 전통에서는 예배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만을 인정하려 하나 은사주의파에 따르면 예배의 신체적이고 감정적인 표현들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확언한다.
은사주의의 성경교사이며 선교사인 드렉 프린스(Derek Prince)는 롬12:1의 말씀을 주석하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셨는가에 대하여 질문한다. 왜 그분은 우리의 마음 또는 정신을 바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프린스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몸은 마음과 영혼의 운반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신체적인 표현은 예배의 영적인 표현보다 열등한 것이 아닌 것이다. 몸은 영적 예배의 전달수단이다. 예를 들어 손을 높이 드는 신체적인 행동은 경배와 항복을 나타내는 영적인 의향의 표시인 것이다. 춤추는 것은 큰 기쁨과 즐거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배의 신체적인 측면과 밀접히 관계된 것은 예배에서의 감정 표현들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은사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경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은사주의적 예배는 우선적으로 잘 정돈된 정신적인 진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는 자발적이고 영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예배에 있어서의 감정적인 구성요소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예배에 있어서 신체적이고 감정적인 특징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은사주의적 예배에 있어서의 '뮤지컬'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예배 음악에 있어서 보다 더 리듬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곡조나 음의 조화보다는 리듬이 인간 인격의 신체적인 측면에 상응하는 것이다. 은사주의적 예배의 악기연주자들은 일반적으로 오르겐 중심이라기 보다는 피아노 또는 기타와 베이스, 드럼들과 같은 리듬부분을 중심으로 짜여진다. 오르겐은 손뼉을 치며 찬양하는 음악에 쉽게 쫓아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은사주의적 예배에 있어서 신체적이고 감정적인 면들은 예배의 영적인 차원을 더욱 증대시켜준다. 은사주의 운동에 있어서 독특한 예배 의식중의 하나가 성령안에서 노래하는 것이다. 고전14:15절의 말씀을 근거로 한 이 의식은 고정된 코드나 또는 천천히 움직이는 코드진행을 배경으로 자발적인 말들이나 가락들을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자유예배 또는 열린예배로 언급되어지는, 이러한 예배 형식은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정규적인 회중예배에 영향을 주었다. 오래 지속되던 4성부 하모니의 유형을 바꾸었으며,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하모니와 음성줄(vocal lines)에 대한 자유형식 접근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예배의 자발적인 특질은 예배에 있어서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새로워진 욕구와 함께, 현대에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모음집과 간증적이며 배우기에 쉬운 성가곡들을 창출하였다. 그러므로 은사주의적 예배의 생동감 있는 성격은 자신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C.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감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 .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시100:2,4)
은사주의적 예배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열쇠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은사주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말과 행동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시간들 가운데 어느 곳에나 계신다고 배워왔던 우리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우리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의 시편139:7절 말씀이나 또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마28:20절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는데, 이러한 성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장소에 언제나 동일하게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케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은사주의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이해는 그분의 무소부재와 그분의 특정한 현존(하나님께서 특별히 어떤 시간들과 장소들에 계시다는)사이에서 구별된다. 다윗이 그가 하나님의 현존을 벗어난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을 때에는(시51:11), 그는 하나님의 특정한 현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는 말씀에서 처럼 베델에서 하나님의 분명하신 현존을 만났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은사주의자는 감사를 드리며 찬송하는 행위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현존안으로 들어가는 문들이라고(시100:2,4) 믿는다. 어떤 저자들은 그의 분명한 현존의 다양한 특징들을 뜰밖, 성소, 그리고 지성소로 구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은사주의적 예배에 있어서 음악은 하나님을 만나는데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 아니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 결과로서, 예배의 인도자(더이상 "찬양 인도자"가 아닌)는 교회에서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배 인도자의 예배인도 능력은 회중들의 분명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경험에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의 존전으로의 나아감을 창출하기 위해서 때때로 새로운 기술들이 요구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곳을 선곡할 것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다.
D. 찬양의 능력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온 암몬 자손과 모암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대하20:22)
찬양으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경험과 가장 가깝게 관계된 것은 찬양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과의 상호관계이다. 시22:3절은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간직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찬양위에 보좌로 거하신다는 신앙의 기초를 형성한다. 또는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서,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행하시는 또는 행하실 수 있는 왕좌를 만드신다. 제사장의 예표론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권능의 드러냄은 하나님께서 불로써 흠양할 만한 구약의 희생제사들에 응답하셨던 것에(레9:24, 창15:17, 대하7:1, 히12:28-29) 비교할 수 있다.
기적들과 치유, 그리고 악한 영들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믿음은 생동감 있는 예배에서 더욱 쉽게 뒤따라 오는 듯이 보인다. 미국 복음전도자인 오스본(T.L. Osborne)은 아프리카에서는 거룩한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큰 확성기를 동원해 30분동안 "모든 사람들아 왕되신 주님을 찬양하라"라는 유명한 은사주의 예배의 찬양 테이프를 정기적으로 틀을 수 있었으며, 설교전에 조차도 예배의 찬양으로 말미암은 카리스마적 분위기 때문에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목사이자 작곡가인 젝 헤이포드는 그의 교회에 아이를 가지지 못한 한 여성에게 정기적으로 찬송을 부를 것을 처방했다. 이는 이사야 54:1절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고, 협의회는 행동에 들어갔으며 급기야 일년 후에는 그 여성이 딸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엘리사는 그가 예언하기 전에 거문고 타는 자를 불렀다.(왕하3:15) 사울왕은 다윗이 그의 악기를 연주할 때 악령들의 눌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삼상16:23) 신약성경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노래하고 기도했으며 그때 하나님께서 지진으로서 응답하셨다.(행16:25-26)
믿음과 예배는 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롬4:20-21) 믿음과 예배 사이의 관계는 초대 교회의 기록에 의해 하나로 이어지게 되는데, 즉 우리는 예배드림으로서 믿게 되는 것이다.(Lex orandi lex credenti) 나이지리아의 한 목사는 다음과 같은 비교로 미국의 기독교를 평했는데, "미국에서는 믿기만 하지만 그러나 나이지리아에서는 예배가 드려진다."
E. 찬양의 울타리를 넘어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5-16)
마지막으로, 은사주의 예배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정리하게 위해서, 우리는 예배라는 한 사건을 뛰어 넘어서 삶으로서의 예배로 관심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은사주의 예배는 음악과 노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희생제사로서,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는 삶이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배란,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롬12:1) 정의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목소리로 드리는 찬양뿐만 아니라, 삶의 선행을 통하여 드리는 예배도 명령했다.(히13:15-16)
이러한 예배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는 왜 은사주의 운동이 국제적인 선교지에서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 중독된 자들, 그리고 심령이 상한자들과 관계된 사역들에서도 활동적인 참여로 주목을 받게 되는 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사역들은 그 자체가 바로 예배의 행위들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자 모여 전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우리들 주변의 세계의 요구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삶으로서의 예배에 대한 예행 연습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찬송에 열정적이라면 또한 우리는 아마도 우리의 삶의 봉사에 있어서도 열정적일 것이다.
(이 글은 정장복 교수 저, 예배의 신학, 421쪽 이하 의 내용입니다.)
'교회성장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칼빈에 있어서 "오직 성경 "의 의미고찰 (0) | 2016.05.02 |
---|---|
[스크랩] 한국기독교의 교파, 교단 현황 (0) | 2016.05.02 |
[스크랩] 칼빈의 5대 교리 탄생의 역사적 배경 (0) | 2016.05.02 |
[스크랩] 근본주의의 뿌리는 무엇인가 (0) | 2016.05.02 |
[스크랩]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0) | 2016.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