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 번영 신학은 현대판 바알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자기 만족(滿足)을 위해 끊임없이 욕심을 낸다. 이 욕심이 감추어진 체 종교들도 만들어진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 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절) 탐심(貪心: greedy desire)이 온갖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종교의 원인이요 뿌리란 뜻이다.
인간의 이런 타락한 이기심을 가장 잘 만족시켜 주는 종교가 바로 무교(巫敎: shamanism)이다. 무교는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종교는 인간의 탐심을 잘 채워주기에 인류 사회를 오랜 동안 지배한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들 즉 불교나 유교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무교에 흡수 당했다. 종교의 세속화이다.
이 점에서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소개한 ㅅ교회의 ㅈ목사와 그의 동역자였던 ㅊ여목사에 의해 기복주의적인 신학 즉 번영 신학이 한국 교회에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 병 고치는 기도에서 출발되었다. 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번영 신학이 주장되었다. 이를 지지하는 성구가 요한일서 1장 2절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번영 신학은 4중 복음으로도 설명된다.
구약 시대에도 기복적(祈福的)인 종교가 있었고 이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직전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이스라엘에게 미리 경고해야 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8:12-14절)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고 안식을 얻은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를 맞았다. 이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종교였던 남신 바알과 여신 아스타롯을 섬기기 시작했다(삿2:11-13절). 이 신들은 농업 신들로 구약 시대의 배금 종교(拜金 宗敎: mammonizm)였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 우상(偶像)이라는 헛된 것을 섬기는 것은 모세 율법이 금했다(출20:4-5, 신32:21, 삼상12:21절).
그러므로 사사(士師)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은 늘 바알 종교와 끊임없이 다투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도 가나안의 기복적인 종교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타락하며 멸망 했다(렘2:8, 19:4-5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보다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연유한다. 말씀의 종교가 물질숭배 종교로 바뀌자 선민 이스라엘도 영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부패하며 내부적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이 때 외부의 공격은 쉽게 이스라엘을 쉽게 무너트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상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기독교에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사회로부터도 불신(不信)을 당하고 조롱 받고 있다.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 교회의 부흥기는 지났고 복음이 들어온 지 100여 년 조금 지나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빨리 탄 불이 빨리 꺼지듯이…… 이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에 있다.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 종교인 무교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기독교와 한국인의 종교적 정서’라는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55475613)
번영 신학이 어떤 점에서 비성경적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로써 그 동안 한국 교회를 기만한 번영 신학 즉 4중 복음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바알인 형통 신학 즉 번영 신학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진 기독교를 새롭게 세우기 위함이다.
번영 신학은 신구약 성경 사이 존재하는 계시 방법과 내용상 차이를 전혀 모른다.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출발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하나님은 선악과 규례를 인간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보존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법치(法治) 즉 말씀 통치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종하면 아담과 하와는 낙원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한다면 이들은 낙원을 잃을 것이다.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며 그 나라 안에서 누리는 복도 물질적(物質的)일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에 실패하여 낙원을 잃었다. 그리고 에덴 밖에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어렵게 살아야 했다. 타락 전후(前後) 하나님의 은혜와 복(福)은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복의 성경적인 관점은 족장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기 위해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에서 그를 불러내 보이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게 했다. 마침내 가나안에 살았지만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다. 그 조건은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살면 물질로 표현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소명 목적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했다. 그 목적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애굽의 노예로 고생한 이스라엘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함이었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는 다윗 왕국이라는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형태로 가나안 땅에서 실현되었다.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와 구별되어야 했다. 그 구별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었다. 율법에 따라 산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일등 나라가 될 것이다. 일등 나라라는 증거는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서 일어날 것이다(신4:6, 28:1-14절). 이렇게 보이는 형태로 하나님은 구약 시대 자신의 백성을 축복했다.
여기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원복음(창3:15절)이 약속한 메시아에 의해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예언해 주기 위함이었다. 신약 시대 세워질 하나님 나라도 법치에 근거할 것이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복이 결정될 것임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미리 계시해 주었다.
다윗 왕국이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윗 왕국은 결국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참이 아니었다. 참이 아닌 것은 곧 올 참 것을 위해 무너져야 한다(히7:18-19, 8:13절).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은 멸망해야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한 동안 사라졌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복을 앞으로 외형적(外形的)인 것으로 더 이상 표현 또는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신약 시대를 연 예수님이 그 좋은 예이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궁이 아닌 목수의 집안에 출생했다. 창조주가 이 세상에 누울 것이 없어 말 구유에 탄생한 이유였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하늘의 복은 세상 것과 완전히 달라서 세상 것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지 않았고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나라는 구약 시대와 달리 세상 나라에 더 이상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요18:36절). 그러므로 세상 나라 방식으로 즉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나 권세를 표현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약 시대 계시의 방법과 내용이 구약 시대와 달리 완전히 바뀌었다. 이에 따라 신약 시대 하나님이 복을 주는 방법도 달라졌다. 눈에 보이는 방식에서 안 보이는 방식으로……
산상수훈(마5-7장)의 팔복(八福)은 이를 잘 증명한다(마5:3-10절).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복을 받을 대상은 이 세상에서 그리 사랑 받지 못할 사람들일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등등…… 이들은 구약 시대 찬란한 믿음의 영웅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처럼 어디에도 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다. ㅈ목사가 4중 복음의 증거로 내세우는 성구 요일1:2절이 비교적 구약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단 한번만 신약 성경에 기록되는가? 아주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한번의 기록을 보고 구약과 같은 복을 지지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번영 신학은 몇 가지 성구들로 지지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관련 성구들만 주장한다. 예컨대 눅4:18-19절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위해 그가 행할 이적에 대한 기록이지 절대로 번영 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 롬8:28절에서 언급된 ‘합력한 선’(善)은 앞뒤 성구들을 살핀다면 물질이나 경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인 영화(榮華: sanctification)와 관계된다(롬8:29-39절). 그리고 히11:1절을 근거 성구로 들이댈 수 있다. 역시 앞뒤 성구들을 살피면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믿음으로 산 생애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설명하는 성구일 뿐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대속 죽음과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구세주와 만왕의 왕이 되었다. 번영 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마침내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활한 예수님은 이 위대한 성공과 그 결과를 만인 앞에서 보여주며 누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昇天)했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권세를 부활한 예수님은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그의 부활로 인해 이 세상에 미쳐질 하늘의 복은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헛된 탐심을 품지 못하도록 부활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영화와 영광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본(本)을 따라 이 땅의 성도들도 세상 것을 부정하며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은 신약 시대 철저히 부정되었다.
그러나 반영 신학은 아직도 구약 성경에 연연하다. 그렇게 구약 시대 임시적으로 표현된 그림자 같은 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추구는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로 이미 성취된 참 복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이다. 재림 이후에만 나타날 영화를 소망하며 이런 거짓된 복을 거부하여야 하지만 번영 신학은 여전히 거짓 복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런 거짓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진실한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경고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7:29-31절)
번영 신학은 성경 진리의 반(半)만 고집한 결과이다.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의 문제는 대립적인 이분법(二分法)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오래 수(壽)를 누리고 복을 받으며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지만 그와 반대되는 것은 안 좋다. 즉 행복은 좋지만 불행은 나쁘다. 또는 성공은 좋지만 실패는 안 좋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을 번영 신학은 보인다.
구약 시대 이런 사고가 맞는 듯이 보인다. 족장들의 경우처럼 믿음이 좋은 신앙인들은 마지막까지 수복강령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았다. 나그네는 정착 삶이 아니다. 항상 떠돌아 다녀야 했다. 어디를 가나 정착 사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기근 때는 오히려 약탈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시105:12, 행7:4-6절).
이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성공과 강함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에게도 약한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이 세상에 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히11:9-10절). 물질적인 복을 누린 것을 사실이었지만 나그네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복적인 번영 신학은 이들이 마치 이 세상에서 거부(巨富)처럼 산 것처럼 과장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번영 신학은 의미를 잃었다. 구약 시대 선민 이스라엘 사회도 부패했다. 이 때 의인(義人)들은 진실한 신앙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이지만 이런 사회에서 믿음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시대 의인들은 고난을 기쁘게 받았다. 행복은 좋고 불행은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이 이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뻐했다(시34:19절). 고난이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됨을 알았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절) 그리고 구약 성경은 고난 자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다고까지 말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시77:19절) 고통을 주는 멍에를 오히려 기뻐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27-33절) 예수님도 말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절) 이런 성구들은 구약 성경이 번영 신학을 지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대립적 이분법의 문제는 많고 적음, 크고 작음 그리고 높고 낮음 같은 수준과 정도 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수준과 정도에서 클수록 좋은 것이며 작을수록 안 좋다고 번영 신학은 생각한다. 예컨대 일억 원보다 십억 원을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은사나 능력 면에서도 나타난다. 작은 은사나 능력보다 더 큰 은사나 능력을 이들을 더 선호한다.
이에 따라 믿음의 등급과 목회자의 등급도 매겨진다. 하급자는 상급자를 지극히 존경한다. 교회 안과 목회자들 가운데 차별이 생긴다. 하나님의 은사인 능력은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봉사하고 섬기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이분법에 근거를 둔 은사론은 기독교 내에 상하계층을 만들어 목회자들을 계급화시켰다. 사도 바울이 설명한 지체이론(고전12:4-27절)의 신학적인 의미를 이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나 능력은 작은가 큰가의 문제라기보다 충성의 문제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탈란트 비유가 이를 잘 증언한다(마25:14-30절). 하나님의 평가는 번영 신학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하나님 앞보다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더 좋아한다.
더 나아가 번영 신학은 믿음의 정도가 물질적 그리고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성공과 출세의 정도가 믿음의 정도로 이해된다. 이들이 구약 식으로 믿음과 복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측량하려 한다. 결국 믿음과 무관하게 부자 신자라면 좋은 믿음의 소유자로 칭찬받는다. 이렇게 기독교와 그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킨다.
이들의 성경 해석에 크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분법에 따라 번영 신학에 안 맞는 성구들을 모두 폐기된다. 강대상에서 전혀 설교되지 않는다. 그렇게 이들은 성경의 반 쪽만 갖고 신앙 삶을 기꺼이 살려 한다. 이렇게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시킨다. 자기 마음에 드는 성구들만 설교하기 때문이다. 번영 신학은 결국 성경 말씀을 더 하거나 빼고 해석한 결과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4:2, 12:32, 잠30:6, 계22:18-19절).
그리고 번영 신학에 또 다른 문제가 발견된다. 번영 신학은 예수님의 구속의 결과만 누리려 한다. 그 복된 결과를 가져온 과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구속의 결과 얻은 복만 강조하려 함으로 그 복을 초래시킨 예수님의 고난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의 복을 주려고 스스로 십자가에 죽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영생의 복을 얻기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번영 신학은 성공과 복만 추구함으로 복음을 위한 고난과 헌신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과정보다 결과를 즐김으로 신앙의 성숙이 없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삶의 모든 결과는 예수님 재림 이후 나타나고 이를 위해 성도는 복음을 위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재림 이후에 받을 복을 미리 앞당겨 이 세상에서 누리려 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한다(마10:38, 행14:22절).
그러나 구원 이후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리고 그에게 향한다면(롬11:36절) 무엇이든지 예수 안에서 ‘아니요’가 아니라 ‘예’가 된다.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은 어느 때는 복을 그러나 다른 때는 화를 보낸다. 이 때 성도는 화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참 좋은 예는 죽음이다. 성도는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불행 자체이지만 성도에게는 축복 자체이다. 이렇게 구원 받은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점에서 대립적인 이분법에 근거를 둔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번영 신학은 이 세상에 관심을 두게 만들며 재림 이후 완성될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世俗化)이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영리(營利)를 목적하는 세상 조직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부유한 자는 웃고 가난한 자는 우는 그런 곳으로 변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보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4-26절)
결론
번영 복음은 반쪽 진리이다. 아니 거짓 진리이다. 복음이 말하는 두 면을 모두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번영 신학이 잘못된 그리고 비성경적인 세계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같아 4 가지 모습을 지닌다 (‘요단에서 바라본 가나안’이란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98073224). 이 세상은 애굽처럼 빨리 벗어나야 할 곳이며 동시에 광야처럼 훈련을 받아야 곳이다. 그리고 가나안처럼 하나님 나라를 세우야 할 곳이면서 아울러 앞으로 불로 심판을 받아 사라질 세상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세계관은 결국 두 면, 즉 낙관적인 것과 비관적인 것을 모두 보여준다. 이 세상이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야 할 곳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곳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 세상은 빨리 벗어나야 할 애굽과 같은 곳이며 그리고 언젠가 불로 사라질 곳이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낙관적(樂觀的)인 세계관만 견지한다. 한 쪽으로 치우쳤다. 그 결과 균형 잡힌 신앙 삶을 가르치지 못한다. 현세(現世)에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잘 언급하지 않는 이유이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야만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마찬 가지로 번영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자신들의 것을 모두 앗아갈 예수님의 재림을 싫어한다.
그 동안 한국 목회자들이 번영 신학의 영향을 받으며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했다. ㅅ교회의 ㅈ목사 탓만이 아니다. 자신의 건전하고도 참된 성경적 신학을 버리고 그의 실용적인 신학을 많은 목회자들이 추구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이것이 탐심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기초는 서서히 무너졌다.
이젠 신자들이 목회자 못지 않은 신앙 수준을 길러야 한다. 성도의 수준이 높아져야 비로소 목회자들이 긴장하며 그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신자들에 의해 개혁되어져야 한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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