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예배 중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 : 22-24)
멀린 캐더로스 목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이야기이다. 그가 어느 날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을 때,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불쌍하게만 보였다. 불쌍한 사람들, 바깥 세상의 재미있는 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창고에서 밤을 허비하려고는 하지않을텐데!
찬송이 시작됐고 나는 찬송가를 부르는 시늉이라도 내어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바로 내 귀에 바짝 대고서 말하는 무거운 소리를 들었다. "뭐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나는 뒤를 돌아보고서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렸다. "너는 오늘밤 나를 믿기로 결심해야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자동적으로 말했다. "뭐라고?" "반드시 늦고 말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릴까? 내가 헛소리를 들은 것인가? 그러나 그 음성은 확실히 들렸다. 하나님이다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바로 나를 알고 계시구나! 나는 섬광처럼 깨달았다. 왜 이전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을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내가지금까지 갈구 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바로 내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예,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예배 시간을 찾으셔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을 모르고 조롱하던 생활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에 복종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이다. 새롭게 변화된 곳에서 이 사람은 신앙생활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진리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버린 캐더로스, <감옥 생활에서 찬송생활로>,
예배를 드리는 기쁨
음악가 곽상수 씨는 금년에 성가대 지휘 50주년을 맞는다. 22세부터 72세까지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 이런 일은 억지로 안된다. 예배드리는 기쁨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연세대 송자 총장은 박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총장이 되었으나 여전히 성가대 말석에 앉아서 봉사하고 있다. 이런 일도 예배의 기쁨을 스스로 체험하는 자가 아니면 힘든 일이다.
예배의 경건
예배는 기독교인의 지고의 의무이다(레 10:1-11참조).
교회에 가서 저녁식사 때의 얘깃거리나 만들어 오는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배에 임할 때 하나님께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신령과 진정으로’(요 4:24)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신성해야 한다. 진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말이 내면의 참되고 솔직한 표현인지 마음을 살피고 계신다. 예배시간이 지루하다면 어쩌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감이 상실되고 있는 징조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배가 꼭 근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격과 갈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흐트러진 몸과 마음, 안일한 자세 등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는 아니다.
이제, 예배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나가 진지하게 이 날의 예배와 자신과 예배 인도자를 위해 기도드리기 시작하라. 분명히 새로운 은혜를 맛보기 시작할 것이다.
예배시간 모자를 쓴 교인
미국의 어느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어느날 예배를 인도하다 보니까 어떤 교인 하나가 굉장히 테가 큰 괴상한 모자를 쓰고 중앙에 앉아 있더랍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 에배드리는데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목사님은 집사님 한 분에게 그 교인에게 가서 교회당에서 에배를 드릴때는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라고 일러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그 교인에게 가서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는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입니다. 모자를 좀 벗어 주시겠습니까?`이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 사람은 너무도 감사해 하더랍니다. 그 모습이 이상해서, 나중에 예배가 끝나고 나서 그렇게 감사했느냐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제가 이 교회에 출석한지 6개월쯤 되었는데, 그동안 아무도 제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이 처음으로 저에게 이야기를 걸어주셔서 너무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걸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관심을 끌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한 이웃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극적인 요소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새로 온 교인들 편에서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능동적으로 교제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가치
요셉 케이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통치하에 있을 때 아주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어릴 때 그는 주일 아침이면 3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갑니다. 교회에 가서 2시간30분동안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마치면 공원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2시간30분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다시 갑니다. 그리고 3시간 걸려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1주일에 예배 한번 드리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한번의 예배를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예배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하러 가는 것은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700주년 기념예배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독일의 폐허는 너무나 비참했다고 합니다. 여러가족들이 한 집에서 살아야 했으며 퀀센트에서 집단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COLOGNE라고하는 도시에는 커다란 교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는 새고 아치는 무너지고 창문은 다 깨어지고 기둥은 기우뚱 ㅅ있었습니다.
전후독일 백성은 ㅇ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 방법을 잃은채 절망과 어려움에 깊이 빠져 있었섭니다. 이띠 어느 한 사람이 쓰러져가는 그 교회의 창립 700주년을 기념하는 계획을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소색은 퍼져 나갓습니다. 700주년을 기념하는 그날 폐허된 교회에는 30,000명의 실망한 독일인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700주년 기념예배가 시작되자 오랜 실망과 눈물속에 가슴과 믿음은 산산 조각이 났던 그들의 눈에서는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드높아지기 시작했섭니다. 힘차게 울려 나오기사작한 찬양과 함께 오랫동안 막혔던 하나님을 향한 그등의 마음과 가숨은 감사와 찬양으로 열리기 사작했습니다.
그래도 700년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그들이 용기만 내어도 그 교회를 다시 세우려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그들은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페허가 되었던 700년돈 교회는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 변모하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얘기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복구하는 동안 절망했던 독일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은 이상스럽게도 뜨거움과 감사로 되살아났으며 그 새마음은 새독일 건설이라는 다음단계로 불붙어 갔습니다. 그 다음 그들은 집을 지었으며, 학교를 짓고, 회사를지어 갔습니다. 결국 그 도시는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등잔이 없는 예배
남유럽 어느 조그만 마을에 저녁이 짙어오면 하얀 집들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다만 마 을을 굽어 보며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당만은 어둠을 지키고 있었다.
`많은 등불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이 교회당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400 년 전 이 교회당을 지은 공작에게는 10명의 예쁜 딸이 있었다.
공작은 어린 딸들이 정원에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딸들이 성장한 다음에는 바느질하는 모습, 궁전을 장식하려고 꽃다발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으 로 살았다. 그런데 딸들이 하나씩 결혼을 하게 되자 공작은 매우 슬퍼졌다.
사람들이 위로를 해 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집안에 딸들의 자리가 제각기 있는데 어느 한 구석이 비면 집안은 어둡고 쓸쓸하오."
크리스마스가 되면 시집 간 딸들이 모두 돌아와 잔치를 베풀고 공작을 기쁘게 해 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 먼 나라의 왕비가 된 딸이 오지 못하여 매우 슬퍼했다. 나머지 딸들은 악사를 동원하여 아름다운 음악으로 아버지를 위로하였지만 아름다운 딸의 노랫소리를 대신 하지 못하였다.
나이가 많아지자 공작은 후세에 남길만한 무엇을 하고 싶어했다. 그는 아름다운 교회당을 하나 짓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위로를 얻게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완성되었을 때 공작은 딸들에게 보여 주었다. 건물의 아름다운 선, 성스러운 내부 장식, 조각품, 색유리, 어느 것 하나 감탄하지 않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등불은 어디다 걸죠?"
교회당 안에는 등불이 없었다. 공작은 미소를 띄고 설명했다.
"그건 말이다. 이 늙은 아버지의 계획이란다. 등불을 거는 데가 없지? 교회당에 예배드리러오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등불을 들고 올거야. 마을 사람들에게 각자 하나씩 나누어 줄 놋쇠등을 준비해두었단다."
그리고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정한 시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집의 어느 한 구석 은 어둡고 쓸쓸할거야."
그로부터 400년, 그 조그만 놋쇠 등불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져 내려왔다. 누구나 그것을 고이 간직했다. 이 오래된 교회에서 종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지면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등불을 가지고 언덕을 올라간다. 교회당은 늘 마을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다. 아무도 자기 자리가 어둡고 쓸쓸한 구석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
이다.
가정예배
성 구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3:6,7)
규장의 설립자인 여운학 장로는 서울대 재학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민교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의 성실성을 인정받게 되고 탐구당 부사장까지 오릅니다. 책과 씨름하며 살아온 지 20년 만에 여장로는 결국 과로로 인한 허리디스크로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허리가 끊어지고 다리가 터지는 듯한 아픔에 시달려 그는 육신의 고통 앞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년의 고비에 찾아온 병마 때문에 여장로는 절망했습니다. 모든 병원을 다 찾아다녀도 차도가 없자 아내 배권사가 건네준 잠언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여장로에게 잠언은 진리와 생명으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45세이던 여름에 여장로는 그렇게 거듭났습니다. 새벽기도로 6개월 만에 허리디스크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그는 불신자 전도에 나서기 시작해서 기독교 전문 출판업체인 규장문화사를 세웠고, 이슬비전도학교를 창립해 기독교 문서선교를 계속한 것입니다. 여장로는 그의 다섯 자녀를 목사, 의사, 박사, 사장으로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그가 자랑하는 자녀를 가장 잘 키우는 비법은 바로 ‘가정예배’입니다. 모두 흩어져 살지만 여장로 가정은 한 달에 한번은 반드시 함께 모여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묵상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성공하는 가정이 되려면 가정에서 재단을 쌓으십시오. 가정예배 속에 자란 당신의 자녀들은 결코 신앙을 버리지 못합니다.
개 고양이도 예배당에
맨하탄 112가에 있는 성 요한 교회 (성공회) 는 12세기 수도사 성 프란시스를 기념하는 예배에 동물을 환영하였다. 신도들은 개, 고양이, 스컹크, 쥐, 각종 새등 동물을 데리고 왔으며, 8천 파운드의 대형 코키리도 한마리 와서 더욱 이채를 띄었다. 코끼리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필요는 없다. 성 요한교회의 크기는 풋볼 경기장의 2배, 즉 2백 야드가 넘으며 건축을 시작한지 150년이 경과되었는데 아직도 완공되지 않은 거대한 성전이고 뉴욕 관광지의 하나다.
이 예배가 기념하는 성 프란시스는 흔히 앗시시의 성자프란시스라고 불리운다. 그의 사랑은 우주적이었다. 해와 달을 형제라 불렀다. 동물들에게도 섬세한 애정과 존경을 바쳤다. 마을을 괴롭히는 늑대들을 온순하게 말들고 야외설교 때 떠드는 참새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는 전설이겠지만, 사나운 짐승까지도 사랑했다는 그의 정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짐승에 대한 사랑이 그 정도니까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극치에 이르렀다. 그는 본래 부자집 아들인데 있는 것을 몽땅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다 주고 가끔 거지와 옷을 바꾸어 입고 들어오기 때문에 결국 집에서 내쫓겼다. 나병환자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예수처럼 제자의 발을 씻어 주었다. 프란시스는 이런 말을 했다.
`자비와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과 무지는 있을 수 없다. 참음과 애정이 있는 곳에 분노와 번뇌는 추방된다. 마음이 가난하고 기쁨을 가질 때 탐욕은 사라진다. 평화와 명상이 있는 곳에 걱정과 의심은 자연히 사라진다.
사이버교회 - 컴퓨터통해 예배드리고… 설교듣고…
서기 2002년의 어느 주일 아침.20대 중반의 김모씨가 혼자 생활하고 있는 도심 한복판의 오피스텔.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김씨지만 이날만큼은 서둘러 교회로 향하지 않는다.
간편한 옷차림으로 책상앞에 앉아 기지개를 펴고 컴퓨터의 스위치를 켠다.
오른손으로 가볍게 마우스를 클릭하면 어느 일류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 뛰어난 성가곡이 흘러나오고 오피스텔은 어느새 예배실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씨는 이름난 교회가운데 그 날의 기분에 따라 한 곳을 골라 버튼을 누른다. 곧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화면에 등장하고 김씨가 듣고 싶어하는 주제별로 설교리스트가 메뉴판처럼 펼 쳐진다.
또 부르고 싶은 찬송가를 직접 고르고 장르와 악기까지 지정한 반주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곤 그날 헌금하고 싶은 액수를 입력하고 버튼만 누르면 온라인으로 헌금이 전송된다.김 씨의 주일예배는 그것으로 끝이다. 21세기를 앞두고 예견되는 현상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 는 것은 이같은 "사이버 처치"와 "사이버 크리스천"의 등장이다.
사이버 처치란 컴퓨터를 통해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부르며 신앙생활을 하는 가상의 교회를 말하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이버 크리스천이다.
이들은 거리가 먼 교회에 힘들여 찾아갈 필요도 없고 굳이 예배시간에 맞춰 움직일 필요도 없다. 그저 하고 싶은대로 컴퓨터만 작동시키면 되는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느냐는 회의론도 있겠지만 한양대 양창삼교수는 이같은 현상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사이버 처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매우 회의적이지만 인터 넷이나 정보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이버 처치는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겁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비하기 위해선 컴퓨터를 통해 충족할 수 없는 "영성훈련 "과 소그룹으로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친교공동체"가 적극적으로 개발돼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위대한 신앙인을 성장시킨 가정예배
악에 속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 (디모데후서 3 : 14)
7남매를 둔 가난한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서 술지게미에 사카린과 물을 타서 자녀들을 먹였다. 빈속에 술지게미를 먹은 자녀들은 취기가 돌았다. 소년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어린것이 술을 먹고 등교하다니............용서할 수 없다." 소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벌을 받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자녀들에게 항상 '정직'과 '봉사'를 강조했다. 비록 술지게미를 먹였지만 매일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강조했다. "너희들은 모두 훌륭한 종들이 될 것이다.
오늘의 시련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날이 곧 올 것이다. 술지게미를 먹던 오늘의 고통을 잊지 말아라." 7남매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이 자녀들은 정성해 모두 훌륭한 목화자가 되었다. 이숙녀 전도사와 아들 김선도, 김홍도, 김국도 목사의 이야기이다. 어머니와 함께 드린 가정예배는 자녀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예배의 자세
보스톤 지역에서 A.J.골든 목사라고 하면 유명한 설교가요. 능력있는 말씀의 사도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큰 교회 담임목사였기에 설교하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 그는 교회 목사 사무실에서 힘을 들여 설교를 준비하다가 피곤하여 그만 의자에 앉은 채 책상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에서도 주일이 되어 교회는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30세 정도의 낯선 사람에게 웬지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 낯선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교인들이 목사와 인사를 나누고 다 교회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그 낯선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다. 골든 목사는 안내위원들에게 그 낯선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안내위원이 하는 말이 “아. 그 사람요. 알고 말구요 그 사람은 예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예수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다음부터 골든 목사님은 회중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앉아계신다고 믿고 설교를 했다. 교인들도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것으로 알고 생활을 했다. 교회는 능력있게 부흥했고 많은 선교사업을 하는 교회가 되었다.
예배냐 회사 일이냐
건축기사 르 투르뇌가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하였다.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은 찬양예배를 드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선교단에 가곤 했습니다. 저도 그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찬양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느 소규모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회사는 다음날까지 어떤 기계를 만들고자 계획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계의 디자인을 고안해서 다음날 아침, 회사의 중역에게 전해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맡은 일을 해야 할지, 아니면 선교단 예배에 참석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 속에서 주님과 제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려야 할 디자인을 어떻게 고안할지 전혀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저는 젊은이들과 함께 선교단에 갔습니다.
그 날 우리들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시계는 밤10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저는 어떤 계획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화판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단 5분만에 주요 도안과 계획을 짜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날 밤 제가 그렸던 단순한 그 기계 부품이 전에 제가 만들었던 모든 기계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노인예배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 (누가복음 10:27-28)
많은 노인들이 요즈음 서울 시내 영진교회로 몰리고 있다고 한다. 주일 오후 2시 30분 노인예배 시간이 다가오면 영진교회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찾아 온 노인들로 꽉 찬다.
경기도 광주군과 성남시, 군포시, 고양시 등에 살고 있는 노인들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곳에 찾아온다. 25%가 독거노인인 이들이 처음 영진교회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예배보다는 점심, 용돈, 직장알선, 초상화 선물에 더 관심이 있었다.
교회에서 예배 참석자에게 식사와 함께 하루 3천원의 용돈을 드리고 '서울 지하철공사'와 협의, 일자리를 찾아주고 초상화까지 실비로 그려주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들이 신앙에 몰입, 젊은이들 이상으로 뜨거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세례인들도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이들은 예배시작 1시간 전에 교회로 나와 박규갑 목사의 트럼펫 연주에 맞춰 손뼉치며 찬송한다.
예배에 참석한 한 노인의 말에 의하면 "주일에 친구들을 만나 얘기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며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 멀리서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교회 이전 및 확장 기념예배 권면사
성경 한 구절 봉독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말씀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오늘 교회 이전 및 확장 기념예배를 드리는 만민복음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몇 마디 격려와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전은 이 땅위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이 귀한 성전을 마련하기 위해 충성 헌신한 성도님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역대상 17장에 보면 성전건축자가 받을 복으로 첫째, 이름을 존귀케 한다고 하셨고, 둘째는 흔들리지 않는 복을 주신다고 하였으며, 셋째는 승리의 복을 주신다고 하셨고, 넷째, 성전을 통하여 후손에게까지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성전을 위해 헌신한 성도님들의 노고를 치하드리며 주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주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성도들이 "편리성"만을 추구하다 보니, 성전 앞에서 제물을 사고 팔고, 심지어는 환전을 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점점 영성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워진 것 같습니다. 지금의 많은 교회가 이런 모습은 아닐까요? 상업화되고, 외식과 형식, 권위주의와 거짓이 판치는 곳은 마귀의 소굴이요, 강도의 굴혈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떠나는 것은 참지 못하십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고 바른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요4:23-24)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곳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어떤 집에서 술을 팔면 술집이 되고, 빵을 팔면 빵집이 되고, 예배를 보면 예배당이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배우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훈련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교역자들의 사업장이나, 교인들의 친교장소나 지식을 전하는 강연장이 아니며 더욱이 결혼식장이나 구제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입니다.
둘째,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가르켜 "내 집은 기도하는 집"(마21:13)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 되거나 "강도의 굴혈"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주일 아침마다 온 성도가 모였을 때, 기도소리로 성전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죽어 가는 영혼이 모여들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기도로 채웁시다. 기도가 있는 곳에 능력이 있고, 기도가 있는 곳에 모든 악한 영의 세력은 물러갑니다.
셋째, 교회는 영육간에 병든 자를 고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마21:14)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는 병든 자의 치유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영육간의 질병으로 시달립니다. 머리 아픈 자, 실직의 아픔, 실연의 아픔, 인간관계의 고독의 아픔, 사랑 받지 못한 자의 아픔 등등, 교회는 이런 것들을 치유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면 이런 치유가 나타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능력"입니다. 성도에게는 이미 이런 능력이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졌습니다. 마가복음16장17절의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이 바로 성도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서기관은 예수님의 치유의 사역을 이상한 일로 보았습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살리는 일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무력한 자들이 이것저것 따지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영육의 치유와 죄인을 살리는 사역은 '이상한 사역'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찬양케 해야합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21:16)라는 말씀처럼 성도들의 입에서 참된 찬양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성도는 찬송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43장21절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천국의 모습은 찬양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여호사밧은 찬송으로 모압을 물리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찬송으로 옥문을 열었습니다. 찬송은 성도의 무기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를 찬송이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찬송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짐바브웨 출신의 니프라이스라는 골프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골프를 치다가 슬럼프가 오면 항상 휘파람을 붑니다. 왜 그렇까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어려서부터 "어려움이 있을 때는 휘파람을 불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찬송을 불러라. 기쁠 때에든지, 슬플 때에든지 찬송을 불러라. 힘찬 찬송은 마귀를 물리치며, 막힌 곳을 뚫으며,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니라"
다섯째, 교회는 선교하고 봉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열매입니다. 선교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등 불우한 이웃을 돌봐주고, 착한 일을 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다. 그 무엇보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습니다.(고전10:31, 엡1:14)
끝으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42- 47절에 보면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나눔과 교제가 풍성한 교회, 주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만민복음교회는 주일날만 되면 피곤하고 짜증스런 얼굴로 마지못해 찾아오는 교회가 아니라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주일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신바람 나는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즉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성도님들이 텃세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건물이 크다고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와 함께 하지 말라' 했습니다. 큰 교회에 가보면 목에 힘주는 장로, 터주대감 권사, 안수 집사 등이 버티고 앉아 새 신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봉사직을 마치 세상벼슬자리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민복음 교회 성도님들은 새신자들이 많이 와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날로 날로 부흥 발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작자 미상의 시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말씀이 있으면서 행동이 있는 교회
사랑이 있으면서 순교가 있는 교회 모임이 있으면서 역사가 있는 교회
기도가 있으면서 능력이 있는 교회 감사가 있으면서 찬송이 있는 교회
연약한 자들에게 힘이 되게 하시고 실패한 자들에겐 희망이 되게 하사
살아있는 교회로 부흥하게 하소서(작자 미상)
하늘나라 예배당
본문 : 요한계시록 15:2-4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요한계시록 15:3)
‘두메 산골 / 산자락에 감긴 / 아담한 집 같은 / 쬐그만 예배당/ 교인은 아이들을 합쳐도 / 오직 몇 사람 뿐/
그래도 예배드리는 시간은 / 너무 사랑스러워 / 너무 은혜스러워/ 성경 말씀 배우고 기도할 때면 / 바람결에 실려온 꽃향기가 / 하나님의 말씀처럼 달콤하고/ 풍금소리 맞추어 찬송할 때면 / 산새들도 날아와 / 시냇물도 따라와 / 노래 부르는/ 기도소리 가득찬 / 찬송소리 가득찬 / 산골 예배당/ 어느 새 / 하늘나라 예배당이 되었다’ (시 산골예배당’·양회성)
국민일보 2000년 6월 29일자 ‘아침에 읽는 시’에서 인용하였습니다.이 시는 산골 예배당의 예배하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비록 교인 수는 작아도, 예배드리는 시간은 너무 은혜롭다는 것입니다.풍금소리 맞추어 찬송할 때면 산새들과 시냇물까지 노래하는 기도와 찬송소리 가득한 하늘나라 예배당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면서 궁금한 것 중 하나는 하늘나라에서는 어떻게 예배하는가 입니다.분명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되지만 그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는 않습니다.하지만 오늘 본문에 그 예배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늘나라 예배장소입니다.본문은 유리 바다 가라고 소개합니다(2절).유리바다란 맑고 깨끗한 곳을 의미합니다.아무도 죄악의 모습을 가지고 그 예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더 없이 맑고 깨끗해진 심령을 가진 성도들만이 하늘나라 예배자가 됩니다.그리스도를 통해 죄값을 사함받은 자들만이 이 아름다운 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늘나라의 예배 악기입니다.요즘에야 여러 종류의 악기를 들고 연주하며 찬양하는데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악기를 사용하는가 궁금합니다.하늘나라에서 사용하는 악기는 많지 않습니다.2절을 보면 거문고(harp)들을 가지고 찬양한다고 합니다.그 악기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거문고의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신령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늘나라 예배의 찬양 주제입니다.지금은 부흥, 전도, 감사, 헌신·여러 주제로 찬양을 만들어 부릅니다.젊은이들에게 맞도록 많은 주제의 찬양들이 있어서 젊은 사람들도 무척 기뻐하며 부릅니다.그러나 하늘나라 예배의 찬양 주제는 모세의 노래,즉 승리의 노래 입니다.또 하나는 어린양의 노래입니다(3절).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는 노래입니다.저들이 부르는 노래의 주제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의 노래요 그것을 가능케 하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도 이처럼 하늘나라 예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참된 예배
평양 어떤 공장 지하교회 성도들이 기도회를 갖고 있을 때다. 이들에게는 성경이나 찬송가가 없으므로 종이 쪽지에 성경 귀절을 적어서 돌려가며 읽고 입만 벙긋벙긋 벌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노동당 반장이 뒤에 와서 서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소리 없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그 반장이 다가와 `동무들, 무엇하고 있는 거요?`하고 물었다. 그때 한 대담한 여공 성도가 `우리는 지금 독보회를 하고 있소. 동무도 같이 앉아서 안하시려오?`라고 했다.
영문도 무르고 그반장은 한참 앉아 있다가 `동무들이나 많이 하소`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그 순간 이들은 그 반장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했다.
그들은 때로는 눈을 뜨고 기도드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생명을 걸고 드리는 성도들의 예배와 수 명이 모였으나 마음은 세상에 가 있는 형식적인 예배가 있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느 것을 기뻐 받으시겠는가?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데도 이를 소홀히 한다면 분명히 그때를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이다.
700주년 기념예배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독일의 폐허는 너무나 비참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족들이 한 집에서 살아야 했으며 퀀센트에서 집단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COLOGNE라고 하는 도시에는 커다란 교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는 새고 아치는 무너지고 창문은 다 깨어지고 기둥은 기우뚱 서 있었습니다.
전후독일 백성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 방법을 잃은채 절망과 어려움에 깊이 빠져 있었섭니다. 이때 어느 한 사람이 쓰러져가는 그 교회의 창립 700주년을 기념하는 계획을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퍼져 나갓습니다. 700주년을 기념하는 그날 폐허된 교회에는 30,000명의 실망한 독일인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700주년 기념예배가 시작되자 오랜 실망과 눈물속에 가슴과 믿음은 산산 조각이 났던 그들의 눈에서는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드높아지기 시작했섭니다. 힘차게 울려 나오기시작한 찬양과 함께 오랫동안 막혔던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과 가슴은 감사와 찬양으로 열리기 사작했습니다.
그래도 700년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그들이 용기만 내어도 그 교회를 다시 세우려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그들은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페허가 되었던 700년된 교회는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 변모하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얘기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복구하는 동안 절망했던 독일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은 이상스럽게도 뜨거움과 감사로 되살아났으며 그 새마음은 새독일 건설이라는 다음 단계로 불붙어 갔습니다. 그 다음 그들은 집을 지었으며, 학교를 짓고, 회사를 지어 갔습니다. 결국 그 도시는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배의자세
보스톤 지역에서 A.J.골든 목사라고 하면 유명한 설교가요. 능력있는 말씀의 사도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큰 교회 담임목사였기에 설교하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 그는 교회 목사 사무실에서 힘을 들여 설교를 준비하다가 피곤하여 그만 의자에 앉은 채 책상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에서도 주일이 되어 교회는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30세 정도의 낯선 사람에게 웬지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 낯선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교인들이 목사와 인사를 나누고 다 교회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그 낯선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다. 골든 목사는 안내위원들에게 그 낯선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안내위원이 하는 말이 “아. 그 사람요. 알고 말구요 그 사람은 예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예수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다음부터 골든 목사님은 회중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앉아계신다고 믿고 설교를 했다. 교인들도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것으로 알고 생활을 했다. 교회는 능력있게 부흥했고 많은 선교사업을 하는 교회가 되었다.
예배
미국 한인교회에서 시무하는 한국인 젊은 목사가 있었다. 20여명 정도의 교인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다. 젊은 목사에게는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는 부친이 계셨는데 아직 신앙심은 얕은 편이었다. 그러나 부친은 주일이면 예배당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시간이면 항상 조시는 것이고 심하면 코까지고시는 것이었다. 젊은 목사는 이런 부친때문에 교인들 보기가 민망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신앙이 깊지 못하신 부친께 그러지 마시라고 섣불리 말씀을 드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교회에 잘 나오는 꼬마를 만나 부탁을 하였다. "주일 낮예배때 맨 앞에 앉으시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설교시간에 조시면 흔들어 깨워드려라. 그러면 한주에 1달러씩 수고비를 주겠다." 이후로 몇 주일이 지나도록 부친은 조실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달정도 지난 어느 주일이었다. 설교시간에 부친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도 옆에 앉아있는 꼬마는 깨울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예배 후 젊은 목사는 꼬마를 불러 물었다. 그러자 꼬마가 대답하였다. "할아버지께서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3달러를 주신다고 했거든요."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모든 신앙은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마틴 루터는 "가정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곳이다"라고 하였고, 호레스 브쉬넬은 "신앙이 없는 가정은 지붕이 없는 집과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귀중한 유산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자녀들에게 참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해 줄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매일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부모와 자녀들이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에 마주 앉아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 드리는 경험을 통하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제 가정예배를이끌어가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예배의 중요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구체적인 방법, 그리고 중단하지 않는 꾸준한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1. 예배 시간
가정예배 시간은 "온 식구가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자칫하다보면 어른 중심으로 시간을 정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자녀들이 참석하기 힘든 경우가 생기기 쉽습니다. 자녀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가정예배는 사실상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이므로 예배 시간은 어른 중심보다는 자녀들에게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본다면 역시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아침이나 저녁시간을 예배시간으로 정하게 되는데 각각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습니다.
아침에 모이는 가정예배는 그날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출발한다는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항상 분주하고 쫓기는 기분 속에서 진행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것은 온 가족이 평상시보다 30분만 일찍 일어날 수 있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
한편, 저녁에 드리는 가정예배는 아침과 같은 생동감이나 진취적인 분위기는 없지만 하루의 모든 일과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는가를 반성하고 정리하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예배 후 온 가족이 모여 하루의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반성하거나 다과를 들면서 집안 일에 관한 것도 토의할 수 있습
니다.
예배시간을 언제로 정하느냐하는 것은 서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특별히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 가족이 다 모이는 시간을 찾기 위해서 매일매일 시간을 바꾸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규정된 시간을 엄수하는 습관을 길러야 가정예배가 지속적이며 꼭 필요한 생활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2. 예배 장소
먼저, 예배 장소는 가정예배를 어떤 분위기 속에서 진행할 것인가에 따라 결정하게 됩니다.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이끌어 가기 원하는 가정은 어느 한 곳(예를 들면 거실)을 지정하여 항상 청결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만들고 매일 그 곳에서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가정예배를 다정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방을 돌아가면서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가정예배를 어떻게 운영할까 하는 문제와도 연관하여 결정하게 됩니다. 즉 부모가 중심이 되어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하려면 하나의 방을 고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고 자녀들이 운영하게 한다면 각 방을 번갈아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방법이 역시 장단점이 있겠지만 한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는 너무 어른 중심이 되기 쉽고 강압적인 인상을 주는 대신 각 방을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 방 주인이 주관자가 됨으로써 다양하고 재미있는 순서를 꾸밀 수 있어 창의적이고 신앙적 성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가 더 바람직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3. 예배 담당
예배 순서의 진행은 가장이 혼자 진행하는 것 보다 윤번제로 가족 모두가 담당하는 것이 좋습니다. 담당자는 예배시간 10분 전에 가족 모두에게 시간을 알리고 장소를 정리합니다. 예배시간의 통보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주므로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윤번제로 예배를 담당하기 어려우면 모든 가족이 예배의 한 부분씩 담당하는 방법도 좋습니다. 예를 들면 예배드리는 방 주인이 예배실 준비를 담당하고 예배 시간을 통보합니다. 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면 다른 사람이 기도를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일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가족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예배는 결코 지루하거나 무의미한 생활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귀중한 삶의 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4. 예배 방법
첫째, 매일 성경을 읽어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읽기표에 의해 1년에 1독, 혹은 2년에 1독의 목표를 정하고 매일매일 정해진 분량을 읽어나가는 방법입니다. 자칫 지루해지기 쉽지만 부모들이 주석성경 등을 사용하여 간단히 설명을 곁들여준다면 좋을 것입니다. 1년1독을 목표로 하려면 예배시간이 30분 이상 걸린다는 점을 참고하
여야 합니다.
둘째, 가정예배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요즈음 기독교 서점에 들려보면 월간 가정예배를 비롯하여 다락방, 매일의 양식, 매일 성경, 생명의 삶 등 다양한 가정예배 지침서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읽어나가기만 해도 훌륭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매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목사님을 통해 주신 말씀을 다시 자녀들에게 전달해 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부모가 먼저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려야 하므로 자신의 신앙에도 큰 성장이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5. 예배 순서
가정예배의 순서는 비교적 간단한 것이 좋습니다. 대체로 15~20분 사이에 모든 순서를 마칠 수 있도록 진행해야 합니다. 예배 순서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찬송과 기도와 말씀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이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①묵도(1분) -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이때 인도자는 시편 중에서 한 구절을 봉독한다.
②찬송(3분) - 그 날에 적절한 찬송을 택하여 부른다. 바쁘다고 해서 1절과 2절만 부르지 말고 끝까지 다 부르도록 습관을 드린다.
③기도(2분) - 가족 중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되 기도할 사람을 미리 정해준다
④말씀(7분) - 예배서를 사용할 경우 성경은 가족이 돌아가면서 읽고 말씀은 담당자가 읽는다.
⑤폐회(1분) - 인도자의 기도가 있은 후 주기도문으로 끝을 맺는다.
⑥특별순서 -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친교의 시간을 준비하여 간식도 준비하고 새로운 찬송을 배우며 그날에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대단히 좋다.
6. 예배 운영의 유의점
가정예배가 가족들의 신앙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실제로 가정예배를 꾸준히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정예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탄의 방해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듯대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합니다.
특히 가족 중에 불신자(부모나 배우자)가 있을 경우에 더욱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예배를 포기해서도 안되지만 가정예배로 인해 불신 가족과 매일 마찰을 빚는 것도 결코 현명한 처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설득으로 가정예배를 운영해 나가야 합니다.
온 가족이 다 믿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각기 바쁜 생활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매일매일 규정된 시간에 가족 모두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을 택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정예배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다음 몇 가지를 유의해야 합니다.
①가정예배가 의무적이거나 습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배의 진행 방법을 바꾸고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만들어 가정예배가 항상신선한 느낌을 주도록 해야 합니다.
②가정예배가 부모의 훈시나 명령을 전달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③어린이가 있는 가정은 그 아이가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하여야 하며 자녀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프로그램이나 순서를 마련해야 합니다.
④가정예배를 매일 드리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매일 드리기 어려운 형편이면 일주일 두세 번씩 요일을 정하여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의교회 예배당 현관에 붙었던 광고이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8월 15일 04시경 이 거리에서 요쿠샤 강아지를 잃었습니다.
혹시 보관하고 계신 분이나 목격하신 분이 계시면 아래 연락처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아지 주인이 병원에 입원을 하여야 할 상태입니다.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꼭 연락있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 은혜로 조그마한 사례일지는 모르지만 성의의 표시로 현금 30만원과 강아지를 한마리 사드리겠습니다.
개 고양이도 예배당에
맨하탄 112가에 있는 성 요한 교회 (성공회) 는 12세기 수도사 성 프란시스를 기념하는 예배에 동물을 환영하였다.
신도들은 개, 고양이, 스컹크, 쥐, 각종 새등 동물을 데리고 왔으며, 8천 파운드의 대형 코키리도 한마리 와서 더욱 이채를 띄었다. 코끼리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필요는 없다.
성 요한교회의 크기는 풋볼 경기장의 2배, 즉 2백 야드가 넘으며 건축을 시작한지 150년이 경과되었는데 아직도 완공되지 않은 거대한 성전이고 뉴욕 관광지의 하나다.
이 예배가 기념하는 성 프란시스는 흔히 앗시시의 성자 프란시스라고 불리운다.
그의 사랑은 우주적이었다. 해와 달을 형제라 불렀다. 동물들에게도 섬세한 애정과 존경을 바쳤다. 마을을 괴롭히는 늑대들을 온순하게 말들고 야외설교 때 떠드는 참새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는 전설이겠지만, 사나운 짐승까지도 사랑했다는 그의 정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짐승에 대한 사랑이 그 정도니까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극치에 이르렀다.
그는 본래 부자집 아들인데 있는 것을 몽땅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다 주고 가끔 거지와 옷을 바꾸어 입고 들어오기 때문에 결국 집에서 내쫓겼다. 나병환자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예수처럼 제자의 발을 씻어 주었다. 프란시스는 이런 말을 했다.
"자비와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과 무지는 있을 수 없다. 참음과 애정이 있는 곳에 분노와 번뇌는 추방된다. 마음이 가난하고 기쁨을 가질 때 탐욕은 사라진다. 평화와 명상이 있는 곳에 걱정과 의심은 자연히 사라진다."
예배. 인본주의
신자가 성직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가 신자를 찾아가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천주교 삼성산 성당이 매주 일요일 서울 관악산에서 '자연과 은총의 만남'이란 주제로 등산객을 모아놓고 드리는 산상미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 이 미사는 일년에 한두번 어쩌다 야외로 나가 드리는 특별미사가 아니라 4월 부활절 다음 주일부터 11월 대림절 전주일까지
일요일 오전 11시마다 드리는 천주교 삼성산 성당의 본미사다.
삼성산 성당의 徐春培신부(42)는 '일요일은 신자의 입장에서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날이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귀중한 휴 일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를 조화시키기 위해 지난해부터 산상미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23일에도 등산을 겸해온 2백여명의 신자들이 관악산 중턱 송림사이에서 徐신부의 집전으로 경건하게 미사를 올렸다.
미사가 끝난 후에 일부 신자들은 徐신부에게 지난 한주일간의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하고 나머지는 가족들끼리 모여 준비해 온 점심을 들거나 바로 산에 올랐다.
참석자 金英夫씨(55·부천제일병원 기획과장)는 '본래 집근처의 목동 성당에 다녔지만 등산도 할겸 해서 아내와 함께 거의 매주 이곳을 찾는다'며 '풍성한 녹음 아래서 미사를 드리면 역시 자연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은총이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산상미사가 열리는 곳은 천주교의 유명한 성지중 한 곳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이곳에는 1839년 기해박해때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서양인 신부인 성 앵베르 주교 등 세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주변에서 있는 현대식 청동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도 자칫 흩어지기 쉬운 미사 분위기를 경건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성장과 역동적 예배
제 1단계 예배의 의미와 중요성
1. 예배의 의미
1) 예배는 최상의 가치를 최상의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최상의 행위이다
(어원적 의미)
2) 예배는 만유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응답이다(대상 29:11-13)
2. 예배의 중요성
1)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2) 예배는 교회의 최대 사명이다.
3) 예배는 성도의 교제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4) 예배는 성도에게 축복을 가져온다.
5) 예배는 교회성장을 촉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제 2 단계 역동적 예배를 위한 7대 원리
1. 예배 철학을 정립하라
1) 성장하는 교회는 분명한 예배 철학을 가지고 있다.
2) 예배 철학에는 예배의 의미와 목적이 나타나 있어야 한다.
3) 예배 철학에 따라 좋은 예배의 평가 기준을 만들라
2. 예배 계획을 세우라
1) 예배 위원회를 구성하라
2)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팀을 구성하라
3) 예베 위원회는 예배를 평가한다
3. 거룩한 긴장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하라
1) 역동적인 예배는 창조적인 긴장이 있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나타난다.
2) 개인적인 것과 공동체적인 것의 긴장,축제와 통회
嶽揚 있다.
3) 고요함과 열정의 긴장, 전통과 새로운 변화 사이의 긴장이 있다.
4. 예배의 초점을 분명히 하라
1) 예배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주체가 분명해야 한다.
2) 분명한 초점이 있는 예배는 깊은 인상을 준다.
3) 예배의 초점을 위해 예배의 제목을 정할 수도 있다.
(예:하나님의 정의,성도의 연합)
5. 새신자들을 위한 예배가 되게 하라
1) 목사의 메시지와 목소리와 태도에 유의하라
2) 음악이 예배의 주제와 맞고 최고의 질이 되게 하라
3)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하라
4)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라
5) 프로그램이 길고 지루하지 않게 하라
6) 평안한 예배 공간을 확보하라.
7. 예배를 생활하 시키라
1) 로버트 모레이:"에배는 삶 전체이다"
2) 성도들에게 삶에 예배를 가르쳐야 한다
* 성도들의 삶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요소
Praise :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Rejoice: 어려움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라
Experience : 시련 가운데서도 주님과 교제하라
Seek :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찾으라
Expect : 기적을 기대하라
Need : 하나님을 필요로 하라
Confess : 죄는 즉시 고백하라
Enjoy :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 교회성장이란
예배시간이 기다려지는 것
예배
1. 기존 예배형식의 부정적인 면
1) 설교위주의 예배
2) 목회자 중심의 예배
3) 보여주기식의 예배
4) 형식적인 예배
5) 교인들의 실제생활과 동떨어진 예배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1)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예배
2) 균형있는 예배
3) 신실한 예배
4) 성령충만한 예배
3. 그리스도의 중심의 예배 - 4R
1) Retell :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재현하라
2) Remember :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3) Rejoice :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라
4) Respond : 그리스도께 응답하라
4. 신자들을 훈련시키는 예배 - 4l 1) lespire
1)예배를 통해 영감을 받도록 하라
2) lnstruct :설교를 통해 교인들을 가르치라
3) lnvolve :교인들을 예배에 참여시키라
4) lntegrate:예배와 교인들의 실제생활을 연관시키라
5. 새신자들에게 매력을 주는 예배 - 4C
1) Comfortable : 새신자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라
2) Clear : 예배진행을 새신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명확히 하라
3) Convincing : 새신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라
4) Creative : 예배를 창조적으로 변화하라.
@ 여러분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 여러분 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입니까?
@ 여러분 교회의 예배는 신자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고 있습니까?
@ 여러분 교회의 예배는 새신자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합니까?
귀머거리의 예배
슈바이처가 어떤 귀머거리 사내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남자는 한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다.
그래서 하루는 한 성도가 글로 써서 이렇게 물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그렇게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러자 그는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제!"
잘못된 예배자의 3가지 경향
예배학자인 Marrianus H. Micks는
그의 저서 [예배의 기쁨(The joy of Worship)]에서
예배의 잘못된 전형으로 다음의 3가지를 지목했다.
첫째, 우상숭배자
둘째, 미온적인 예배자 (lukewarm-worshippers)
세째, 과열적인 예배자 (overheated-worshippers)
이는 이교도적 경향을 그대로 기독교 안으로 가져온 예배자와
지나친 지성주의자로서 감격과 열정을 갖지 못한 예배자,
그리고 엑스타시(ecstasy)만을 추구하는 감정적인 예배자를 말한다.
한국교회는 이중에서 특히 3번째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 한사람쯤이야
옛날 어느 임금님이 온 국민을 불러 놓고 큰 잔치를 벌리기로 했다. 음식은 왕이 마련하고 참석자는 그저 포도주 한 병씩만 가져오도록 했다. (미국에서는 실제로BYOB라는 파티가 있다고 한다 "Bring YOUR Own Bottle"의 약자로서 번역하면 "당신이 먹을 음식을 가져오시오"라는 뜻이다. 주인은 간단한 음식과 그릇 따위만 제공하여 준다.)잔칫날이 왔다. 사람들이 가져온 술들은 모두다 큰그릇에 모아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 그 포도주를 잔에 따라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술맛은 맹물이었다. 그 이유는 누구 나가 다 남들은 포도주를 가져올 것이니 나 한사람쯤은 술 대신에 물을 가져와도 모르겠거니 했던 것이다. 누구 나가 다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려면 모두가 맛있는 포도주를 가져와야 한다. 그래야 멋진 잔치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 매주 드리는 예배는 반드시 교인 모두가 진심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만일 "나는 믿음도 없는데, 나는 드릴 것도 없는데.."하면서 오늘은 집에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은 예수님이 초대하신 잔치의 기쁨을 깨뜨려 놓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배는 BYOB가 아니라 주신 것을 그 주님 앞에 가져오는 것이다.
다윗의 제단
다윗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였고 선견자 갓의 예언대로 재앙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윗의 쌓은 제단으로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그가 쌓은 제단을 통해서 우리는 예배의 모형을 찾아보게 된다.
1.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나갔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환란의 현장. 하나님께 숨김이 없어야.ex)게하시의 숨김, 흠없는 제물을 원하시는 하나님, 아나니아와 삽비라 우리가 하나니께 나아갈 때도 적나라한 나의 모습이 고백되야 국 이것은 회개로 이어진다. (17)
2. 값을 치루는 예배였다
제 값을 주고 산 제단, 번제는 살아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올라가는 것이다. 예배는 희생이다. "Pay the price!" ex)오늘날 살아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문제,
내가 죽어져야,"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3.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였다.
말씀에 따라 세워지는 제단,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분별하도록"(롬12)
4. 불의 응답이 있는 예배였다.
불이 제물을 살라, 성령 충만, 사함 확신, 새 출발
5. 감사의 제단이었다.(28b)
예배에 대한 공부 1 (1996,1,3) 전주강림교회 안창엽 목사
요한 4 : 19 -24
[ 당신은 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세계적으로 한국교회가 예배드림에 제일 열심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예배가 또 무엇인가?" 를 생각해 본 사람이 얼마나될까요? 교회에 나오면 의례히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형식이되고 나의 삶과는 무관한 하나의 종교적 행위 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배를 왜 드리는가를 알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통해서 나의 인격과 삶이 성숙해 지는 그런 경험 속에서
예배를 드려봅시다.
1. 하나님은 예배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예배 드리는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 4:23). 이 말씀은 예배당에 와서 찬송하고 설교 듣는 정도의 사람 보다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의 예배는 받아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받아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만나고대화가 이루어지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창 1:26) 그것은 당신과 교제하며 대화의 상대 즉 예배드리며 살 수 있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천국)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찬양과 경배로가득찬나라입니다(계4-5장) 그 나라는 천지 만물이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돌리고, 네 생물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다시 드리며 업드려 경배합니다. 이 영광스런 하늘의 예배에 우리가 초대 받은 것입니다.
2. 예배에 대한 우리의 관심
한국교회는 기도, 찬송, 헌금 그리고 예배드림에 열심 있는 교회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중에 가장 중대하고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런 행동이라고 한 빨트의 말에 의하면 바람직하고 자랑스런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배를 드린 만큼 어떤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무엇이며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를 모르고 자기 생각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첫째는 복을 받으려는 생각에서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교(shamanism)의 영향이고 또 주일을 거룩히 여기지 않거나 모이는데 등한히 여기는 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히 복을 받는 길이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성도와의 교제를 이루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3. 예배는 은총을 깨달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배는 억지로 드리는 것도,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쁨과 감격 속에서 드리20), 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계21-22장)이기도합니다.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우리를 모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며(출3:12),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베전 1:1)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은 우리를 어떠한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위에 굳게서서(히11:1) 값지고 보람있게 살게 합니다(요 8:31-32)
그런 점에서 예배는 폰 알멘이 주장한 것 같이 "구원의 축제"입니다.
사실 기독교 예배는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심을 축하하며, 그것은 곧 우리의 구원의 축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기쁨 속에서 축제적인 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우리는 예배를 위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햐 하는 우선적인 이유는 구원하여 주신 은총에 대한 감격의 표시라고 말했지만 보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배를 드려야할 이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1;26).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찾지않아도 고사를 지내야 하고 또 무엇인가를 섬겨야 하는 것들은 인간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지었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어 "
카할(qahal)"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 봉사, 교육, 정의의 실현 등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예배를 드리는데 그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당신은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예배자"라고 생각하십니까?
2.당신은 복을 받으려고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3.구원 받은 감격이 당신을 예배드리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4.교회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 2 (전주강림교회 안창엽 목사)
이사야 6:1-8
[ 예배가 무엇인가? ]
지난번 공부에서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 의례히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 버리지 말고, 하나의 종교적 행위처럼 생각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는가를 알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서 나의 인격과 삶이 성숙해 지는 그런 경험 속에서 예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열심히 드리고 있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아 봅시다.
1.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국교회가 예배에 열심히 있는 것은 대부분 복을 받으려는 마음에 있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받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데" 있다고 배웠습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시29:1-2)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있는" (worth)이라는 말과 추상명사를 만들기 위해거 "말 끝에 붙이는 말"(ship)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최선의 가치를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그 가치를 제물로 표현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배 (제사)는 속죄 제와 번제와 화목제가 있었는데, 어떤 예배든지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했습니다. 그 제물은 소,양,비둘기 였습니다. 그 제물의 결정은 예배의 종류가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재산 정도에 따라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최선을 다하면 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양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은다는 말입니다. 또 제물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예물을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한 예배 즉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예배는 첫째 예배시간에 흠이 없어야 하고, 둘째 모든 예배순서 진행에 흠이 없어야하며, 셋째는 찬송과 기도가 항상 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예배의 내영은 하나님과 만남이고 대화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거나, 또 예배를 설교를 듣는 것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정해진 시간(주일)에 정해진 장소(예배당)에서 하나째 변화입니다. 두 번째의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가는 선교의 역군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속사람이 더욱 거룩해지고 또 하나님의 교회 에 충성스런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는 예배드림은 참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4. 예배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드리는 공동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도, 또 하나님의 부름으로 예배당에 나오는 것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도 또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배는 구원받은 개인의 행위가 아니고 구원받은 공동체인 교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끼리의 아름다운 코이노니아가 있어야합니다. 옆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드리는 예배는 좋은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지금도 당신은 복 받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2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있음을 늘 느끼고 있습니까?
3 예배를 드림으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 3
고전14:26-33
[예배순서는 어떤 구조로 되었는가?]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하고 또 예배가 무엇인가도 알았습니다. 여기서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배는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예배를 드려야 하고,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을 [예배순서]라 합나다. 좋은 예배순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그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순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들의 삶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하심이고, 또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살기를 원하심 입니다.(마22:37-40)둘째는 세상에서 빛되고 소금되어 살기를 원하시며(마5:13-16)증인되어 살기를 원하십니다.(마28:18-20)다시 말하면 자기의 모습을 찾고, 항상 사명을 가지고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니는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하는 곳이요, 형제간에 불화하고 죽이게 하는 곳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는 곳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하여도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가 어렵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가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대화함으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예배는 <부르시고-만나고-파송한다>는 구조 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드리고 있는 "예배순서"는 어떻게 짜여져 있고 또 그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는 "계시에 대한 응답" 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계시의 부분(하나님의 초청, 성경봉독, 설교, 축도)이 있고 또 응답부분 (찬송,기도,헌금)이 있어 베의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져 예배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배순서는 두 흐름 속에서 크게 세 토막으로 짜여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살면서 지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만남의 장소로 불러 주시고, 둘째로 부름 받아 나온 당신으 자녀들과 대화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 시키면서 삶에 용기와 소망을 주시며, 셋째로 그렇게 새로워진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 순서는 [부르시고-만나시고-파송하시는] 세 토막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의 순서에도 하나의 언어가 있는 것입니다.
3. 세 토막으로 된 예배순서의 의미
청째 초막은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묵도로 시작하지 않고 "초청의 말씀"(call to worship)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내용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감격으로 백성들이 춤을 추며 찬송을 불렀던 것 같은 그 감격으로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이 기쁨에 앞서서, 이사야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화로다 나여" 하고 참회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던 것 같은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죄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 기쁨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개회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청째 토막입니다.
둘째 토막은 [말씀 속에서 만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성경과 설교를 통하여 우리와 대화를 하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송과 헌금으로 그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으로 책임있게 살아갈 것을 고백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의 정점은 "성찬"입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됨을 확인하고, 또 함께 떡과 잔에 참여한 예배자들이 하나 됨을 확인한 것입니다(고전10:17) 다시 말하면 성찬에서 하나님과 우리 또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과의 깊은 코이노이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셋째 토막은 [세상으로의 파송과 복주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새로워진 사람들에게 사명을 맏기며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여기서 새로워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을 부른 뒤에, "파송의 말씀"을 듣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과 동행하며 (마28:20)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하며 보내는데 그것을 "축도" 라고 합니다.
이런 예배순서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예배가 끝난 뒤에 일주일 동안에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느끼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4. 예배순서들의 다양성
예배순서는 2-3시간이 걸리는 "동방정교회" 예배로부터 예배순서가 전혀 없는 "퀘이커교회" 예배까지 다양합니다. 개신교의 예배순서의 틀은 대개 7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성찬을 예배의 중심에 두는 루터교와 성공회,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두는 장로교,감리교,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그리고 예배순서 자체를 부인하며 삶을 예배로 보는 퀘이커교가 있고, 한국교회에 예배순서를 전해준 자유교회의 예배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순서는 말씀과 성찬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와 그후 약 5백년 동안의 예배순서 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우엇입니까?
2. 예배순서는 어떻게 이루어 졌습니까?
3. 개신교 예배의 틀은 몇가지나 있습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 4
사도행전 2 :37-42
예배의 요소(계시부분) 이해
예배가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에 예배는 두 흐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부분인데 "초청의 말씀- 성경봉독-설교- 축도"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부분인데 "찬송- 기도-헌금" 입니다. 성찬예식도 계시의 부분이지만 다음 자세히 하기로 하고 오늘은 계시부분의 [초청의 말씀][성경봉독][설교]에 대해서만 공부하겠습니다.
1. 예배를 시작하는 하나님의 초청 (call to worship)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예배를 시작할 때에 강대상의 종을 치며 "묵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종을 치는 것이나, 묵도를 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보나, 외국의 예배 순서를 보나 예배의 시작은 묵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초청"(Call to Worship) 또는 예배의 부름 인 것입니다.
예배를 하나님의 초청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배가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온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더나가서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대개 성경 구절을 읽기도 하지만, 교독문처럼 인도자와 회중이 주고 받는 형식도 있으며, 성가대가 노래로 초청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때의 성가대의 노래는 송영이 아니고 초청의 내용에 곡조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2. 말씀선포인 성경봉독 (scriptual Lession)
개신교는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 봉독은 설교하기 위한 예비 작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경봉독 그 자체가 설교와 똑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이고 그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책이 성경중에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복음서] 가 봉독 되었습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안에서 나타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더 분명히 해주기 때문에 [구약]도 읽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기 위하여 사도들의 [서신]을 읽기
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어 왔지만, 4세기 경에 이르러 신약을 복음서에서 한 곳, 서신들에서 한 곳을 읽기 시작하여 예배시간에 성경을 세 곳이나 읽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읽기 시작했고 다 읽고 나면 회중은 "아멘" 하며 화답을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Preaching)
설교는 영원한 복음을 현재화 하고, 개인화 하며, 현실화하는 신비라는 설교학의 어려운 설명 보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쉽게 이해합시다. 행 10:33에 있는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말씀이 설교가 무엇이고 또 우리는 설교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위에서 말한 성경에서 [주께서 당신 (설교자) 에게 명하신 모든 것]이 설교입니다. 즉 설교는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씀이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설교자에게 주어서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봉독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그 말씀을 어떻게 알아듣기 쉽게 전할까?"를 기도하며, 또 "어떻게 하면 이말씀 앞에서 결단할까?" 에 대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또 설교를 듣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옥토가 준비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 10:33에는 설교를 듣는 태도도 가르쳐 주는데, "주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그 주님의 말씀"
을 듣기 위하여 지금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태도를 취할 때 은혜를 받게 되고 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행10:44). 고넬료는 "주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그 말씀"을 듣는다는 생각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림"(행10:24)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또 설교를 듣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전도 할 때에 니느웨 백성이 회개했던 이야기와 , 천사가 찾아갔지만 듣지 않고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증명을 해 줍니다.
4. 하나님의 이별의 인사인 축도(Benediction)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신 뒤에 다시 세상으로 파송을 하는 것입니다. 축도는 이제 삶의 자리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주신 작별 인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우리의 인사와 크게 다른 인사입니다.
세상은 마귀가 제 때가 가까운줄을 알고 두루 삼킬자를 찾아 다니는 곳이지만 그세상에서도 꼭 승리하며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있게 하겠다는 약속의 인사입니다. 모세와(출 3:12) 예레미야(렘1:8) 는 이 말씀으로 승리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약속 (마28:20)을 이미 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
1. 당신은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2.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3.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합니까?
4.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에 하나님의 파송을 확신합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 5
예배소서 5:15-21
[예배의 요소(응답부분) 이해]
예배가 [계시에 대한 응답] 이기에 예배의 순서에는 두흐름이 있는데 , 그 청번째 계시부분(초청의 말씀/성경봉독/설교/축도/)에 대하여는 지난 시간에 충부히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 이시간은 두 번째의 응답부분인 [기도][찬송][헌금]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1. 예배에서의 기도
1) 개인 기도와 공중기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성령안에서 하나님과 내적인 교제를 가지게 될 때에 기도의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 때의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시간에 누가 기도를 인도하던지 간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전부가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도하는 사람은 회중이 무엇을 기도하기를 원하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2) 기도의 유형
우리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에 보통 4번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묵도 다음에 [기원]을 합니다. 이것이 이 예배를 성령님이 도우셔서 모두 정성스럽게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수 있게 해달라는 간단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는 첫 번에 [죄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6:1-8에 나오는 이사야의 하나님 체험에서 나오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회기도"라고 하는 장로님들이 인도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회기도라기 보다는 "중보의 기도" 또는 "목회기도"라 불리어온 기도입니다. 성도들의 시앙, 정으로운 사회, 건전한 나라, 세계 평화 등을 위하여 온 교회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승리하는 삶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후기도]인데 설교의 말씀을 가지고 회중이 결단하는 시간이고, 네 번째는 예물을 드린 후에 [봉헌기도]는 복을 비는 내용보다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3)기도의 종류
우리는 [자유기도] 만을 선교사들로부터 받았지만, 주기도문과 같은 [성문기도] (또는 예전기도)도 오랬동안의 전통을 가졌고, 성구영신 예배 때에 드렸던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교독식으로 드리는 [연도](Litant)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은 충분한 내용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기 전날이나,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와서 기도할 내용을 기록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록한
것을 그대로 읽어도 훌륭한 기도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리는 찬송
우리는 왜 찬송을 불러야 하고 또 어떻게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 교육을 받지못하였습니다. 찬송은 유대교로부터 물려 받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하여 주신 은총을 기리는 예식이니(출15:19-21.계511:14) 감격과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찬송가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두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찬송] 과 [복음성가]입니다.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멘"이 있는 것은 찬송이고, 없는 것은 복음성가 라고 보면 좋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예배시간은 찬송을 부르고, 예배시간이 아닌 때는 복음 성가를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설교를 들은 후에 결단을 표현하는 찬송을 부를 때에는 아멘이 없는 것도 그 내용에 맞는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 순서에는 찬송이 4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이 다 다른 것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 부르는 것은 사 6:2-4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 나라를 체험했을 때에 천사들이 합창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회찬송"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죄를 용서 받은 사람들이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이 찬송을 "영광송"(gldria patri)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 후에 부르는 찬송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내용의 찬송입니다. 사실은 설교 후의 기도나 찬송이나 , 헌금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적인 것입니다. 막지막 축도 전의 송영은 예배를 마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에서 "송영"(送榮)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근에 예물을 바치면서 1장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에 마음을 보태서 감사와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인데 하나님은 아름다운의 하나님이기에 최선의 화음과 선율로써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찬양에 참여하여야 하기에 찬양의 중간이나 끝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3. 나와 나의 모든 소유를 주님께 드리는 헌금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바쳤던 것 같이 (마2:11).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것 같이(요12:3),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께 무덤을 바쳤던 것 같이 (마27:57-61)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으로 나와 내 소유를 주님께 드리며, 주님께 헌신 하겠다는 예배자의 신앙고백입니다. 예배에서 이 시간이 예배의 절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재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기
1.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이 몇가지라고 생각합니까?
2. 당신은 찬송을 부를 때에 흥분과 감격에서 불러본 일이 있습니까?
3. 당신은 헌금시간에 어떤 의미로 예물을 드립니까?
예배에 대한 공부 6
사도행전 2:43-47
[성찬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
1. 예배에서의 성찬
처음 교회의 예배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성경은 말했는데, 처음부터 예배에서 성찬이 규칙적으로 베풀어 진 것을 뜻합니다.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간의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 모였고(행20:7), 고린도 교인들은 "먹기 위해"(고전11:33) 매주 첫날 모였던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처음부터 성찬이 주일예배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기록상으로는 2세기 초에 순교자 져스틴이 로마 황제에게 보낸 변증서에 매 주일마다 성찬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16세기 종교
개혁이 있기까지는 예배에서 성찬이 핵심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보면 처음 교회에서부터 약 5백년까지는 설교와 성찬이 함께 있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카톨릭이 되면서 점차 설교가 없어지고 성찬(미사)만 있는 예배를 드렸으며, 다시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설교를 회복하여 설교와 성찬이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려 했는데, 개신교는 점차로 설교만 있고 성찬이 없는 예배로 변했습니다. 다시 19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설교와 성찬이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는 드리는 운동을 시작했고 최근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순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리마 예식서" 입니다.
2. 성찬은 복음 전체를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요약으로써 표현됩니다. 그 사건을 집약해 오는 역사적 과정에서 성찬(미사) 중심의 예배도
생겼고(동방정교회,천주교,루터교회,성공회 등), 복음선포(설교) 중심의 예배도
생겼습니다.(장로교를 중심한 개신교들) 그 전통을 신학화 하고 절대화 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배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사건 즉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인데, 예배는 이것을 설교로서 선포하고 성찬으로 행동화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회상하고 기념하는 정도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한 식탁에 모여서 주님이 수난을 당하시고 대속적인 죽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았음을 생각하고 그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이 무덤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확인합니다. 성찬에서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 속에 들어감으로 그분과 우리가 하나를 이루며, 그분의 지체가 되어 살아가며, 함께
지체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가 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은 주님이 나타나시는 현장이 됩니다. 그리고 성찬은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복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선포하게 됨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이 복음의 도전에 분명하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우리가 살아났는데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요? 우리는 지금 주님의 지체로서 살
아가고 있을까요? 주님 다시 오실 것인데 당신은 항상 때어 있습니까?
3. 성찬에서 중요한 것
성찬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빵을 떼고 잔을 붓은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북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마26:26-27) 라는 말씀에 따라 4가지 행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봉헌]과 [감사의 성별기도]와 [빵을 떼는 일]과 [나누어 주는일] 입니다.
첫째, 봉헌인데 빵과 포도주를 식탁에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각자가 빵과 포도주를 드리면 그 일부를 성찬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물질 대신 헌금을 드림으로 봉헌의 의미가 희미해 졌고 또 개신교에서는 떡과 초도주를 성찬상에 미리 개인용으로 만들어 놓음으로 그 의미가 약화되었던 성입니다.
둘째, 감사와 성별기도인데 주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북하시고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감사의 기도가 예식에 나타난 것은 2세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나 3-4세기경에 와서는 어떤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인사][Sursum][목사의 기도][Sanctus][Anamnesis][구원에 대한
감사][Epiclesis][봉헌][중재와 기도][송영][주기도]등으로 복잡해졌는데 칼빈은 "성찬 제정어" 와 "성별기도"만을 원했고 후에 개혁 교회는 [성령의 도움을 위한 기도](Epicleis)를 찾아 보탰던 것입니다. 성찬이 없을 때에는 이 기도를 설교 전에 했습니다.
셋째, 손으로 하는 행위 곧 빵을 떼는 일입니다. 빵을 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파괴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고집, 이기심, 자기자랑, 등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의 빵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떼야 하며 한 잔으로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것을 목사는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리 빵을 나누어 놓고, 잔들을 나누어 놓는 것은 선교사들이 미국의 자유교회의 관습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넷째, 빵과 잔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것은 다락방 예식의 완성인데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희생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예식이며, 하나님께 나가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빵과 잔을 받지 않으면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6:53) 성찬을 받을 때에는 우리처럼 하는 방법도 있고, 성찬상으로 나와서 조용히 무릅을 꿇고 받는 것도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공부 7
히브리 12:1-3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사는 예배는 교회력의 문제입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들이 [교회력](The Chistian Year) 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까운을 입고, 그 위에 색깔 있는 영 대를 두르고, 또 강대상에 드림천을 내리기도 하며, 대강절과 사순절 같은 교회력의 여러 절기들을 구체적으로지키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교회력은 교회의 좋은 전통이었는데,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루터교를 제외하고) 교회력이 카토릭적인 제도라고하여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개혁교회에서는 교회력이 사라졌다가, 1940년대부터 다시 교회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교회력은 한 해동안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한 중요한 계획입니다.
1. 교회력의 시작과 그 의미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3대 절기인[유월절][오순절][장막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음을 유월절을 통하여 늘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게 오순절을 주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광야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장막절을 주었던 것입니다. 기억하고, 감사하며, 재헌신을 하는 것을 축제라고 한다. 절기는 예배를 축제화 하게 합니
다.
교회력도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고, 감사하며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주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게 하고, 또 성령을 주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함으로 한 해를 주님을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성령님의 인도 속에서 열매를 맺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이 미국으로 가면서 [추수감사절-어버이 주일-어린이 주일]등이 보태졌고 또 한국에 오면서 [송구영신 예배-삼일절-광복절] 등의
예배가 더해 졌습니다.
2. 구체적인 교회력
교회력은 [성탄절]-[부활절]-[성령강림절]이라는 세 절기를 골격으로 이루어집니다. 성탄절을 의미 있게 지내기 위하여 [대강절]을 설정했습니다.
한 해를 주님 기다리면서 시작하라는 뜻이고, 또 처음 주님이 오셨을 때의 비극을 두 번째 오실 때에 되풀이하지 말자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Christ-mas) 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역사 속에 오셨음(His-Story)을 축하하면서,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처럼 그리스도(Christ)를 예배(Mas) 하게 합니다. 성탄절 후에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날 비로서 공식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여 [현현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에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사순절]을 두었습니다. 40일 간 자기를 살피며 참회하면서, 꾼을 것 끊고, 버릴 것은 버림으로 믿음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날로 교회에서는 제일 중요한 절기입니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부활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주일 밤이나 수요일과 새벽 기도회와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후로 한 곳에 모여 10일 동안 합심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내려 주심으로 교화가 탄생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성령강림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은 약 6개월인데 다음 대강절까지를 왕국절 또는 [삼위일체주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8월말일까지를 성령강림절로 하고 남은 3개월 동안을 삼위일체 주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3. 교회력의 색깔과 성서일과
교회력은 색깔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색깔도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색깔이 주는 감정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이것이 정리되기까지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의미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의 영 대(stoic)와 드림천 (우리 교회에서는 성가대의 스카프와 강단의 주제 글씨 등도) 의 색깔이 대강절과 사순절에는 기다림과 참회의 색깔인 [보라색] 이고, 성탄절과 부활절은 순결과 환희와 승리의 색깔인 [초록색]을 씁니다.
교회력에는 주님의 일생을 주심으로 성경을 배열해서 3년 주기로 성경을 다 읽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읽을 성경은 [구약-서신-복음서]이렇게 3번을 읽는 것이 전통입니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이기에 2번 읽는 경우도 있고 , 세 번을 읽을 때에는 그 예언인 [구약]을 먼저 읽고, 복음이 어떻게 삶이 현장에서 이루어 가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신]들을 읽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설교와는 상관없이 집사들에 의하여 예배 시간에 읽혀졌습니다.
자기 스스로 공부하기
1. 교회력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합십니까?
2. 교회력의 골격은 어떤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까?
3. 교회력의 색갈:보라,흰색,빨강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예배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
예배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는 신랑 신부의 주례사를 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여 말한다.
"잘 살아보려고, 사랑하려고 너무 애쓸 것 없습니다.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둘이 함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주일날마다 꼭 나와서 함께 예배하라. 이것만 지키면 사랑의 힘을 얻고 사랑의 지혜를 얻어서 잘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만 바로 이루어지면, 그리하여 내 영혼이 소생하게 되고 성숙하게 되면 그에 따라 모든 문제가 절로 풀린다. 예배가 '최우선'임을 명심 또 명심을 것이다.
올바른 예배위한 5가지 수칙
서울 상도교회 대학부 지도를 맡고 있는 진홍경목사가 `올바른 예배를 위한 5가지 지침'을 내놓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예배를 방해하는 `사단'을 물리침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위해 지켜야 할 사항들을 소박한 사례를 곁들여 다루고 있다.
진목사는 이 교회가 펴내는 기관지 `사랑의 띠' 최근호에서 우선 많은 크리스천이 주일예배에 몰두하기 위해선
첫째`복잡한 현실에 부대끼는 삶'의 먼지를 털어버릴 것을 강조한다.
생활현장에서 갈등과 이해관계속에 허우적거리다 보면 선뜻 말씀과 기도에 몰입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에 이 같은 자세는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잠을 이겨내는 것.
초대교회에서도 전도자 바울의 설교를 듣던 젊은이 유두고가 2층 난간에서 졸다 떨어지기도 했다는 예화를 들며 예배드릴 때 가장 큰 장애중 하나가 졸음이라고 지적했다.진목사는 예배 중 졸릴 때마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서곤 했던 어느 성도의 예를 들며 각성을 촉구했다.
세째,통성기도시에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도 예배를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했다.타인과 기도음성의 높낮이를 맞춘다거나 시간을 조절하는 것 또한 바람직스럽지 못한 태도라는 것.
넷째, 또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져서도 안된다고 강조한다.자신의 감정상태와는 무관하게 하나님께 일관되고 신실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아울러 진목사는 “술자리 유혹이나 TV 오락 등 사소한 생활주변의 쾌락 때문에 예배에 빠져선 안될 것”이라고 충고하면서 “예배시간은 반드시 엄수하고 잡담은 삼가는 등 경건한 예배를 위해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스라엘 회당의 예배모습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당에 몇년전에 가 보고 무척 놀란 것이 있다. 예배가 11시다 하면 한 시간 전에 가도 이미 그때부터 와 있다. 와서 웅성웅성한다. 여기서 얘기하고 저기서 차도 마시고 한다. 보통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전에 온다고 한다. 이렇게 와서 서로 이야기하고 교제하다가 보면 에배시간이 된다. 그냥"예배 드립시다"하고 말로 한다. 아주 옛날 방법대로 한다. 종치는 것도 아니고그렇게 에배 드립시다, 하면 우르르 들어간다. 들어가면 우리처럼 묵도로 시작하고 뭐 그런 것도 없다. 그냥 찬송을 부른다. 서로 순을 잡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걷고 물결치듯 몸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찬송을 부른다. 이렇게 찬송을 부르는 것이 예배의 시작이다. 이렇게 하여 대개 한 시간 반 정도, 어떤 때는 두 시간 정도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마친 다음에 보면 한쪽에서는 할아버지와 손녀 손자이 같이 손목 잡고 아코디언을 치면서 춤을 춘다. 그러는 한쪽에서는 이야기를 나누고, 한쪽에서는 또 찬송들을 부르고- 도대체 아무리 기다려도 집에를 안간다. 보통 오후 세시가 되어야 다 집으로 간다고 한다.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사는 셈이다. 그날은 아주 그렇게 사는 것이다. 집으로 갈 때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두 집, 세 집이 모여서 간다. 이렇게 모여가지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식사를 하고야 집에 돌아간다고 한다. 심지어 회당이 어디로 옮겨가면 아예 그리로들 이사를 간다. 집이작고 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회당 가까이로 가는 것이다. 집을 뺑 돌아가면서 옹기 종기 모아놓고 소위 Jewish village, Jewish town을 만들어 산다. 어디가나 대단하다. 그래서 그 속에서 신앙생활 하고, 또 서로 윤리 생활, 도덕 생활, 심지어는 사업도 한다. 바로 그런 일 때문에 온 세계 사람들이 유대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저희들끼리만 너무 친하니까. 이런 면이 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저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 그들은 자기네를 하나의 큰 가정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늘 함께 모이며 식사를 한다.
잘못된 예배자의 3가지 경향
예배학자인 Marrianus H. Micks는 그의 저서 [예배의 기쁨(The joy of Worship)]에서
예배의 잘못된 전형으로 다음의 3가지를 지목했다.
첫째, 우상숭배자
둘째, 미온적인 예배자 (lukewarm-worshippers)
세째, 과열적인 예배자 (overheated-worshippers)
이는 이교도적 경향을 그대로 기독교 안으로 가져온 예배자와 지나친 지성주의자로서 감격과 열정을 갖지 못한
예배자, 그리고 엑스타시(ecstasy)만을 추구하는 감정적인 예배자를 말한다.
한국교회는 이중에서 특히 3번째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장례식 설교
1.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아무도 어머니 배속에서의 일을 기억못하나 그것은 사실 ->천국도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2.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안식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도다/사랑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아니다
목자의 품에 안긴 양같이 ,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 같이 평안이다
누가 '사랑하는 자인가?' - 하나님의 자녀이다. ->'영접하는 자'
3.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승리입니다
죽음 앞에는 장사가 없어, 오직 그리스도인 만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주님과 함께는 곧 승리
4.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나그네같은 세상 / 한계 속의 육신
어린아이 -> 장성한 어른, 희미한 것이 -> 확실해지는, 무질서->
하나님의 분명한 질서
4. 그러기에 ( ㅇ ㅇ ㅇ) 을 생각하며 우리는 무슨 맘을 가져야
하겠읍니까?
ㅇ 고인이 죽음에 대해서는 싸웠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순종/ 우리도,
ㅇ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하는 엄숙한 교훈을 깨닫자
ㅇ 고인에대한 불효의 아쉬움은 신실한 믿음생활로 보답하자
정성껏 드리는 예배
저희 목사님께서는 성도들의 예배드리는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교회 설교단에 서서 예배 드리는 설교 시간에 앉아 있는 전체 교인들을 살필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목사님의 설교에 경청은 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칠때쯤 해서 교인들이 한 눈을 판 것을 알게 되면 참으로 당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즉, 목사님의 설교에 잘 경청할 수있는 훈련이 잘 된 사람만이 예배에서 진정한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여 참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정성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집을 나서기 전에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하는 헌금 준비도 중요하지만,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거룩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즉 미움, 분노, 불만, 초조 등을 담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서는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각종 예배활동에 적극 참여야 합니다.
즉, 찬송을 열심히 부르고, 기도 인도자의 인도에 따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성도와의 교제 시간에 기쁨과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다음은, 듣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열심으로 조심성 있게, 그리고 사료깊게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으로 갈급한 심령이 되어서 우리들의 혼잡한 영혼을 가라앉히고, 즐겁게 예배드리며, 정성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그 넘치는 은혜를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설교가 은혜롭지 못하다고 목사님을 탓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라고 하여 만능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합니다.
참으로 예배에서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은 예배 시간에 뜻과 정성을 다 드린 사람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
죠지 워싱톤의 주일성수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의 거주지며, 매장지로 유명한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을 종종 방문한 사람이 이렇게 쓰고 있읍니다.
"누구도 죠지 워싱턴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는 없었읍니다.
나는 안식일 아침마다 마운트 버넌을 방문했는데, 그의 아침의 식탁은손님으로 가득했읍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내객(來客)이 있다는 것은,조금도, 하나님을 무시(등한시)하는 구실로는 되지 않았고, 보다더 좋은모범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얻어지는 만족을 잃어버리는 구실로도 되지않았읍니다. 왜냐하면 그는 방문객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집에 머무는 것이아니라, 언제나, 그들을 교회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어느 찬양 모임에서 어느 자매가 너무도 기뻐하며 손뼉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을 드리고 있었다.
그 모슴을 보는 사람마다 "저 자매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그 자매를 바라보았다.
얼마 후에 늦게 들어온 한 중년여자 성도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더니 마친 그 자매옆에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살짝 웃으며 공손하게 부탁을 했다.
"저. 들어가게 조금만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대 손을 들고 기쁜 모습으로 찬양을 하던 그 자매는 방해받는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어휴"하고선 아주머니를 못본채 하고선 계속 찬양만 드리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찾아 갔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받으시는 예배와 찬양은 어떤 것일까?
주님은 분명 우리의 삶속서도 동일하게 드려지는 그런 삶의 고백으로서의 찬양과 에배를 원하실 것이다.
주일낮예배 한번에 만족해서야
교회가 교인들의 주의를 끌고 빠짐없이 줄석하도록 하기 위해 재미있는 행사를 많이 하도록 많은 프로그램으로써 사람에게 구걸하고 편향하며 이 문제로 경쟁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이미 지탄받을 숱한 문제거리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교회는 비록 교인의 출석율이 역사상 가장 높은 것으로 기록 된다
하더라도 교인 수 만을 위해 경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태적인 작태가 일어나는 이유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는 세번째 명령에서 찾아야만 한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붑준의 교인들이 일주일에 한번만 화끈하게 출석할 수 있는 보다 큰 교회를 더 좋아 한다는데 있다. 또한 큰 교회에 나가게 되면 정규적인 임무를 맡으라고 요구하는 기회들이 최소한으로 줄어드는 이점이 생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박받기를 좋아하지 않은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기회가 되면 드리거나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무성의한 입으로만의 예배를 청산해야 한다. 하나님 외에 것에 대한 충성과 관심이 하나님께서만이 차지하셔야 할 마음의 여지를 빼앗을 때 히스기야 시대에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알 숭배가 재현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있어서는 그 신이 그들의 배이며 어떤이들에게는 그들의 직업이. 가족이, 책, 친구가, 혹은 여가, 휴가, T.V.나 스포츠나 야망이다.
주일예배 빼먹은 장로님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이 해주셨던 이야기 한토막 소개합니다.
K대학교의 K교수님은 학문적으로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잘 알려지신 학지이시고, 또 신앙적으로도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계시는 장로님이십니다. 제가 여지껏 만난 그리스도인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며 그분을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깨우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신실하신 장로님이신데...그런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K교수님도한번은 주일예배를 빼먹는 실수를 하셨습니다. 당시 연구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마감기일때문에 논문을 쓰시느라고 주일 아침까지 컴퓨터 앞에 붙어 계셨다는데. 이 분이 시간을 보니까 도저히 주일예배 갔다와서는 완성할 수가 없겠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논문을 마저 다 완성해서 세이브시켜 놓고 저녁에 설교하시기로 약속된 교회에 가서 설교는 하셨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다시 컴퓨터를 켜고 논문 마무리를 하려고 보니....아 글쎄 주일 한나절 내내 열심히 썼던 그 논문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답니다. 분명히 파일을 세이브 했는데 말입니다.
K교수님은 원래 과학기술원에 계셨던 분으로 컴퓨터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한 전문가이십니다. 그러니 그 분이 실수하셨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주일예배도 빼먹고 열심히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면서 완성해놓았던 논문인데 그냥 사라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그날 밤을 꼬박 새우시면서 다시 쓰실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먼저 쓰셨던 논문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K교수님 왈.
"장로나 되어가지고 일때문에 주일예배 빼먹었다고 하나님께서 슬쩍 치워버리셨나 봅니다. 하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7:33)
주일예배를 위한 희생
막16장 마18장
리델(Eric Liddell)은 철저한 청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육상의 여러 분야에서 가령 200m,400m,800m, 등에서 세계기록을 가지고 있었는데, 1924년 올림픽 경기에서도 당연히 금메달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승전날이 주일이라는 점 때문에 경기를 포기하고 예배에 출석하였던 사람이다. 그는 주일성수뿐만 아니라 흑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늘 흑인 선수들과 포옹이나 악수를 나눔으로써 기장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관중들을 의아스럽게 하기도 했다. 그당시 까지만 해도 흑인들과의 관계가좋게 보이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때로 뉴스거리가될 정도였다.
이렇듯 신앙이 강한 리델은 선수 생활을 마치고 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믿는자의 책임]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 당시미국인들이 멸시하던 중국에 선교사로 나가 많은 고생을 했다.
그는 평생을 중국에서 보냈으며 가난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곳에서 생을 마쳤는데 후에 그를 기념하는 전기가 나왔다. 그것이 <날으는영국인>(The Flying Scotsman)이었다. 이것이 영화화되어 1982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는데 그때의 영화 제목이 <불수레>(Chariot of Fire)였던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뛰어난 목사나 신학자도 아니지만 그는 신앙인의 원칙을 지킨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산사람이었다.
중국의 예배처소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저 중국에 가면, 북한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우선 중국 전체를 생각하지 말고 우리 조선족, 한국사람들이 한 250만 내지 300만쯤 되는데, 이 분들은 전부 한국말을 한다. 어떤 분은 중국말 한 마디도 못하는 분도 있다. 한국말로만 산다. 그런 분들이 있는데 이 분들이 예수를 많이 믿는다. 교회는 내가 헤아려본대로는 한 20여 교회가 있다. 건물도 있고 목사님도 있는데, 목사님은 전체적으로 열 명도 안된다. 그리고는 <처소>라는 게 있다. 처소라는 것은 어느 집 가정이다. 거기서 모이는 것이다. 예배단 건물은 없고 가정에서 모여 예배드리는데, 그런 데 가볼라치면 좌우간 시간도 없다. 내가 가서 딱 앉아 있으면 어느 사이에 소문이 났는지 좍 모여든다. 잠깐 사이에 삼십 명 모인다. 이삼십 분만 기다리면 그렇게들 모인다.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 지금 거기에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무엇으로 예배를 드리느냐하면 - 거기서 지금 제일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방송이다. 아침 다섯시 반에 여기서 내가 새벽기도 인도한 것이 녹음돼가지고 방송으로 나간다. 그걸 전부 듣고 받아 적는다. 내가 가서 노트를 몇 개나 얻어왔다. 그렇게 매일 아침 들으면서 기록하는 것이다. 다 기록을 한다. 그 기록한 것을 보니까 아주 거의 정확하게 요점을 다 받아 썼다. 그렇게 들은 것을 주일날 사람들 모아놓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 곽 목사님 설교 중에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이야기 죽 하면 이거 듣고 찬송 듣고 기도하고 '아멘'하고 끝나는 것이다. 그게 예배이다.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다. 대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처소 가운데는 삼백 명 모이는 데도 있다. 이십 명, 삼십 명, 열 명, 백 명... 아주 많이 모인다. 그런 처소가 천 개나 된다. 내가 주소를 파악하고 있는 것만도 750개이다. 여기에 지금 목사님도 장로님도 집사님도 없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사람 설교하라, 이거다. 누구든지, 누가 설교를 하면 모두들 그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설교하는 것으로 믿는다.
오늘 본문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영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물론 다른 데서 들은 얘기도 있고 성경을 본 것도 있고 또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 들은 이야기도 있다. 어째든 그 모든 것을 다시 여기서 기억하면서 회생, remind하는 것이다. 다시 기억나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누누이 설명을 하게 된다. 이것이 설교의 원조이다. 이런 예언의 말씀이 있고 그리고 방언이 있다.
예배(禮拜)
1.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
전세계의 크리스챤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할머니인 코리텐 붐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다. 소련의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올리려고 하는데. 예배당 문을 걷어 차면서 두명의 소련 군인이 들어 닥쳤다. 기관단총의 총뿌리를 겨누어 흔드는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5분간의 시간을 준다. 예수를 버리고 살 사람은 5분내로 예배당 밖으로 나가라. 예배당 안에 남아 있는 자들은 5분 후에는 모두 죽음을 맛볼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이 무서운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용기의 믿음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견디고 있는 순간.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시계를 바라보고 서 있던 군인들은.
“마지막 50초다. 또 나갈 사람은 없느냐..”
라고 소리를 쳤다. 남아 있는 성도들의 얼굴은 모두 거룩한 표정으로. 자기들의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비장한 모습들이었다. 드디어 군인들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더니 총을 땅에다 내려 놓은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들이여. 우리 두 사람은 크리스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진정으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크리스챤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주님께 함께 경배를 드리실까요.”
찬양의 권세
찬양은 아주 귀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오직 찬양으로 섬기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고, 그 찬양으로 모든 어두운 권세를 이기는 것이다.
어떤 부부가 있었다. 부부간에 재미있게 살아야 하겠는데, 부인이 잔소리가 많아 바가지를 긁기 일쑤였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또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자꾸 시비를 걸어왔다. 견디다 못한 남편은 대꾸했다가는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더니3절 부를 때에 부인도 따라 부르더란다.
2절까지가 문제이다. 잔소릴 들어가면서 끝까지 찬송을 부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찬양으로 모든 절망, 모든 어두움을 다 이길 수 있다. 이것이 곧 예배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태양모를 쓰고 예배 드린 청년
커다란 태양모를 쓴 채로 예배 드리는 청년에게 집사가 찾아가서 말했다.
"예배 시간엔 모자를 벗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는 것이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 큰 모자를 쓰신 이유를 물으니, 왈(曰) "저는 교회 나온지 4개월 가량 되는데, 누구하나 말해 주는 이 없음으로, 큰 모자라도 쓰고 있으면 말해 줄까 해서 썼더니, 벗으라고 말해 주는 분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패전독일의 교회창립 기념예배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독일의 폐허는 너무나 비참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족들이 한 집에서 살아야 했으며 퀀센트에서 집단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COLOGNE라고하는 도시에는 커다란 교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는 새고아치는 무너지고 창문은 다 깨어지고 기둥은 기우뚱 ㅅ있었습니다.
전후독일 백성은 ㅇ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 방법을 잃은채 절망과 어려움에 깊이 빠져 있었섭니다. 이띠 어느 한 사람이 쓰러져가는 그 교회의 창립 700주년을 기념하는 계획을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소색은 퍼져 나갓습니다. 700주년을 기념하는 그날 폐허된 교회에는 30,000명의 실망한 독일인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700주년 기념예배가 시작되자 오랜 실망과 눈물속에 가슴과 믿음은 산산 조각이 났던 그들의 눈에서는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드노ㅠㅍ아지기 시작했섭니다. 힘차게 울려 나오기사작한 찬양과 함께 오랫동안 막혔던 하나님을 향한 그등의 마음과 가숨은 감사와 찬양으로 열리기 사작했습니다.
그래도 700년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그들이 용기만 내어도 그 교회를 다시 세우려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그들은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페허가 되었던 700년돈 교회는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얘기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복구하는 동안 절망했던 독일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은 이상스럽게도 뜨거움과 감사로 되살아났으며 그 새마음은 새독일 건설이라는 다음단계로 불붙어 갔습니다. 그 다음 그들은 집을 지었으며, 교장을 짓고, 회사를 지어 갔습니다. 결국 그 도시는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놀리는 자들
어떤 사람이 교회내에서의 30분 간의 시간이 졸려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나서 집에서는 신문을 만화부터 구인
광고까지 몇시간씩 샅샅이 뒤져 읽는다면, 그는 누군가에게 농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사람이 일요일은 그의 유일한 휴식일이라고 말해 놓고도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낚시하러 가거나, 등산을 가
산에서 온종일 보낸다면그 역시 누군가에게 농담을 하는 셈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의자들은 너무도 딱딱하고 불편하다고 말하고, 야구장의 딱딱한 시멘트 스탠드에 앉아서
보슬비까지 다 맞아 가면서 22명의 선수들이 서로 서로 밀고 당기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그도 역시 누군가에게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한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물건을 사러 다니고, 다른 사람을 만나러 다니고,
텔레비젼을 보며, 등산을 가고, 화투 놀이를 즐기고, 외출해서 한 때를 즐긴다면, 그는 과연 누구를 놀리고 있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에게 농담하고 하나님을 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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