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학

[스크랩] 한국의 부흥 역사 (교회사)

수호천사1 2014. 11. 13. 18:03

 

한국의 부흥 역사 (교회사)

 

 

한국 교회의 첫 출발

 


머 리 말

 


세계 기독교역사에는 두 가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있다. 첫 번째는 필리핀의 급속한 복음 화이고, 두 번째는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또 하나의 기적을 산출하였는데, 그것은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이다. 이로써 한국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 교회, 제일 큰 감리교회가 생겼고, 또 교파를 초월하여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도 있게 되었다. 참으로 세계 선교사상(宣敎史上) 신기원을 이룬 사건들이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동북아 중에서도 남북 분단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피를 부른 비애의 땅에서 일어났을까? 이 질문은 세계 목회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과제이며 숙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큼 이에 대한 대답도 나름대로 여러 각도에서 내려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들고, 어떤 학자는 한국인의 종교심을 꼽으면서 종교 심성론적인 해답을 내리며, 어떤 분은 종교 혼합론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역사 환경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뚜렷한 사실은 한국 교회의 부흥은 21세기를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환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부흥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고, 1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진행되어 온 역사과정의 현상이라고 정의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오늘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으며, 기적적 부흥을 주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1991년 필자가 볼리비아 선교지를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 곳 현지 목회자들은 밤새도록 한국 교회의 부흥을 물어왔고, 1994년에는 영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케냐의 다윗 목사도 우리 교회의 초청으로 내한하여 한국 교회를 배우고 간 일이 있다. 1995년에는 미얀마 목사들과 홍콩의 젊은 목사들이 역시 한국 교회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 교회의 초청을 받은 일이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모두 한국 교회의 기적적 부흥의 원인에 쏠려 있었다. 이들과 장시간에 걸쳐 한국 교회가 걸어온 역사의 자취를 추적하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 하셨고, 한국 교인들은 어떻게 쓰임이 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어떤 방향에서 사역을 도왔는지를 설명하였을 때, 저들은 한결같이 한국 교회의 역사과정과 부흥의 원인을 출판하여 해외의 많은 목회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필자도 그것이 한국 교회를 바로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 교회의 역사적인 배경을 통하여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런데 사전에 언급하여야 할 것은 "부흥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점이다. "영적이요 질적인 부흥을 부흥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수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는가?"하는 문제도 분명히 구별지어야 할 문제이지만, 본 논문에서는 이 양자를 모두 포함하여 부흥이라고 하였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할 때만 영적인 것은 <부흥>으로, 양적으로 증가한 것은 <성장>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사를 다음과 같이 시대적으로 구분하였다.

 


복음 전래기 1883-1895

 


제 1회 도약기 1896-1905

 


수난기 1906-1945

 


혼동기 1946-1965

 


제 2회 도약기 1966-1985

 


침체기 1992-

 


아울러, 본 논문에서 취급한 모든 통계는 장로교의 통계와 한국 개신교 전체의 통계만을 소개하였다. 따라서 감리교를 비롯하여 다른 교파의 통계는 필요한 경우 외에는 개별적으로 취급되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또한, 장로교의 통계는 주로 세례교인만을 취급하였는데, 그 이유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야 진정한 교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교회에 출석한 사람들은 이 보다 훨씬 많았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장로교 통계의 출처는 장로교회사 전휘집, <숨겨진 한국 교회사,> 미국 장로교회 주한 선교부의 기록, 한국 장로회 총회의 통계표 등이며, 특히 광복후의 통계는 교파를 초월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인원을 포함하였다. 그리고 통계는 도표와 그래프를 동시에 표시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작은 글이 외국인에게는 한국 교회 부흥의 원동력을 알게 하고, 국내 교역자들에게는 우리의 신앙 역량을 바로 인식하고 재도약을 위한 헌신의 기회를 삼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96. 12. 3.

 


목동 제일 교회에서

 


김대인 목사

 


차 례

 


1. 머리 말

 


1. 복음 전래기 (1883-1895)

 


1. 한국 교회의 첫 출발

 


2. 초기 서울 전도와 부흥

 


2. 제 1회 도약기 (1896-1905)

 


1. 네비우스 정책

 


2. 동학란과 교회

 


3. 선교사의 기여

 


3. 수난기 (1906-1945)

 


1. 공의회 조직

 


2. 새로운 부흥운동

 


3. 백만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

 


4. 3.1 운동 전후의 한국 교회

 


5. 신사 참배와 교회 부흥

 


6. 제 2차 대전과 한국 교회

 


4. 혼동기 (1946-1965)

 


1. 8.15 광복의 의미

 


2. 국토의 분단

 


3. 한국 동란

 


5. 제 2회 도약기 (1966-1992)

 


1. 교회의 재건

 


2. 교회의 분열

 


3. 60년대 이후의 부흥

 


6. 침체기 (1993- )

 


7. 맺는 말

 


1. 복음 전래기 1883-1895

 


1. 한국 교회의 첫 출발

 


한국 교회의 첫 출발은 1883년 5월 16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역사를 모르는 분들은 그런 대로 인정하고 지나가지만, 한국 교회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최초로 내한한 날이 1885년 4월 5일인데, 어떻게 선교사가 도착하기 전에 한국에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는가?"라고 반문을 한다.

 


한국 교회에 일어난 기적은 선교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 교회가 최초로 설립된 것은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이며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1872년, 중국 선교를 목적으로 파송 받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의 선교사 존 . 로스(John Ross 1842 -1915)는 만주에 도착하여 1년간의 어학연수를 받고, 제 1차 전도여행을 시도하였다. 이 때 그는 한 . 중 국경지역인 고려문을 방문하였고, 이곳에서 중국인들과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한국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 다음 해, 다시 고려문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의주 출신 한국인 청년 4인을 한국어 교사로 초빙하였는데, 그를 따라간 청년들은 이응찬 . 백홍준 . 김진기 . 이성하 등이다. 이들은 1876년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 즉시 성경 번역사업에 착수하였으나 한문(漢文) 실력이 충분치 못하여 번역사업이 지지부진하였다. 이런 때 혜성처럼 나타난 또 한 명의 의주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서상륜이다. 그는 1878년에 로스를 만났으며, 1879년에 세례를 받고 성경 번역에 참여하는데, 그의 한문 실력이 특출하여 1882년 3월 24일에 드디어 "누가 복음" 3천부가 발간되었고, 그 해 5월 12일에 "요한 복음" 3천부가 발간된다.

 


서상륜은 성경 출판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국인들의 마음에 복음을 심어 주기 위해 1883년 이른 봄 자신의 손으로 번역 . 출판한 성경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전도를 시작하여 그 해 5월 16일에 <소래교회>를 설립한다.

 


한국 교회는 첫 출발부터 기적적인 하나님의 사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교사가 오기 전, 한국 사람들의 손에 의해 번역 . 출판된 성경을 자신들이 갖고 들어와 직접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한 것이 한국 교회의 시초이다. 그래서 이 소래교회를 교회사가들은 <민족 교회> 혹은 <자생(自生) 교회>라고 부른다.

 


초기 서울 전도와 부흥

 


소래교회를 설립한 서상륜은 두메산골에 조그마한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복음으로 수도 서울을 함락시키겠다는 큰 뜻을 품고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전도의 수단인 성경이 없어 애로를 느끼고 만주에 있는 Ross에게 성경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Ross는 1884년 약 6,000권의 성경을 중국인 상인 편으로 상해를 경유하여 보내 주었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성경의 반입도 금지되어 있었으나 독일인 뫼렌도르프(P. G. Von Mollendorf)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서상륜은 성경을 인수하는데 성공한다. 성경을 입수한 서상륜은 서울에서, 그의 동생 서경조는 소래교회를 중심한 황해도 지역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동참하였던 이성하(李成夏)는 의주지방에서 적극적으로 전도를 전개하였다. 그 결과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세례를 받기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서상륜은 Ross에게 "내한하여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설립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의 보고서에는 당시 서울에 약 300명의 세례지망자가 있었다고 한다.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 열심 있는 전도인들에 의하여 결신자가 생겼고 이로 인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선교사는 내한한 그 해부터 세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이하 "사기 상"으로 표기한다)에는 선교사가 내한한 1885년 여름에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가 세례를 받았고, 1885년 9월에는 소래교회에서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가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서경조는 자신이 세례를 받기 전에 "서울 사람 한 사람과 의주 사람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과 "그해 가을에 자기의 아들이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확인하고 있으며 "그 다음 해(1886년)에 소래에서 5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선교사가 내한한 직후부터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이 사실에 대하여 이광린 교수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라는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즐거운 수확을 거두기 위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에 외국에서 복음을 듣고 돌아온 토박이 신자들에 의하여 개간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수고와 땀흘림은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었으며 복음의 씨는 많은 열매를 맺으며 자라게 된 것이다.

 


이 때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곽안련의 기록과 <숨겨진 한국교회사>를 종합하여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 1>

 

 

 

연도별 세례자 수와 누계

연도 세례교인 수 누계

1885년 4 4

 


1886년 6 10

1887년 16 26

1888년 40 66

1889년 39 105

1890년 0 105

1891년 19 124

1892년 8 132

1893년 14 146

 


이 도표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수적으로는 빈약하지만 세례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한 올바른 관찰과 평가는 한국 교회에 일어난 부흥의 기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 해답을 얻는 방법이다.

 


우선 그 해답은 1893년 선교사 공의회에서 채택한 네비우스 정책이나, 한국인의 종교심 혹은 1895년에 일어난 청 . 일전쟁과 같은 역사적 환경 등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이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 부흥의 기적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며, 오늘과 같은 대부흥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 부흥의 원인을 현재의 시각에서 조명하고 해답을 얻으려면 결코 부흥의 진상을 이해할 수 없으며 정답도 얻을 수 없다.

 


한국 교회의 참 부흥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오늘의 부흥을 뿌리에서 찾는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 교회을 일으킨 신앙의 선배들은 특별한 믿음에 기초하는데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들이 번역 . 출판까지 한 것이다.

 


둘째, 저들은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 이것을 묻어 두는 어리석은 종이 아니라 장사하여 이(利)를 남긴 종과 같이 열심으로 전하였다.

 


셋째, 의를 위해 죽음도 각오한 신앙이 부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은 기독교를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었다. 개신교보다 약 100년이나 앞서 전래된 천주교는 세 번의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고, 이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런 사지(死地)에 복음을 반입하고 전파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의 신앙 인들은 이 일을 해 냈던 것이다.

 


교회의 증가

 


초기 한국 교회는 세례 교인의 수(數)만 증가한 것은 아니다. "사기 상"에는 1892년부터 교회도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황해 노회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황해도 지역에는 초기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교회의 증가 속도도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도표 2>

 


연도별 교회설립 수와 누계

연도 교회 설립 수 누 계

1883년 2 2

1884년 7 9

1885년 3 12

1886년 2 14

1887년 2 16

1888년 7 23

 


1883년부터 1888년까지 불과 5년 사이에 황해도 지역에는 무려 23개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엄청난 변화와 발전의 도표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특히 선교사들이 입국하였어도 아직 언어의 장벽과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원인은 무엇이라고 정의하여야 할까?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교회의 부흥의 비결이고 신비이다.

 


첫째, 한국인 평신도 전도자들의 자력전도이다.

 


예를 들면 한치순이라는 평신도 전도인은 자기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였고, 인근 마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결과 몇 년 사이에 9개 처의 교회를 개척하는 성과를 올렸다.

 


둘째,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 밭이다.

 


이 마음 밭은 옥토와 같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을 사회학자들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올바른 진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성이 많은 아테네 시민들은 사도 바울의 전도를 듣고도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심성은 반드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천주교의 박해를 보아온 한국인들은 기독교는 멸족을 초래하는 종교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심이 아무리 강해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은 극히 어려운 사회환경이었다. 따라서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마음의 밭은 성령의 역사 외에는 그 근원을 찾기가 곤란하다.

 


"사기 상"에도 교회가 급속한 속도로 확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893년부터 1900년까지의 수적 증가는 다음과 같다. 이 기록은 전국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수의 증가는 기하급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도표 3>

 


연대별 교회 수와 누계

연 도 교회 설립 수 누 계

1883년 1 1

1887년 1 2

1893년 21 23

1894년 9 32

1895년 18 50

1896년 29 79

1897년 33 112

1898년 27 139

1899년 21 160

1900년 42 202

 


통상적으로 한국 교회의 부흥을 광복이후로 돌리는 경향이 있고,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를 주목하게 된 시점도 광복이후 특히 한국 동란이후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굉장한 속도로 번져갔는데, 이를 "요원의 불길"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 이 "요원의 불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 그리고 답변만이 오늘의 부흥을 이해하고 원인을 규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제 1955년에서 1990년까지의 교회 성장의 도표를 그래프로 표시하여 초창기 한국 교회의 부흥과 비교하여 보도록 한다.

 


<도표 4>

 


연도별 교인 수

연 도 교인 수

1955년 70만명

1965년 120만명

1975년 350만명

1985년 763만명

1995년 1200만명

 


[도표- 1]과 [도표- 4]를 비교하면 교인 증가 곡선이 초창기에도 결코 완만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가 초창기부터 급성장하게 된 이유와 원인을 정리하고, 다음의 과제로 넘어 가도록 한다.

 


첫째, 한국 교회의 성장은 한국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에서 시작된다.

 


둘째, 한국 교회는 시작부터 외부의 협조나 정책, 혹은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발전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과 열정적인 전도, 그리고 자립하려는 강한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만일 부흥의 원동력을 외적 조건이나 혹은 그런 방향에서 이해하고 해답을 구하려면 역사를 왜곡하는 오류를 남길 것이다.

 


셋째, 이런 헌신의 동기는 역사적인 환경보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성경적인 신앙이 토대가 되었으며, 이런 신앙을 주신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부연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부흥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한국인 스스로의 자주적인 의지와 헌신, 그리고 희생을 감사히 받는 성경적인 신앙을 떠나서는 그 원인을 찾을 길이 없다. 이런 것이 지금까지 제시된 여러 도표와 그래프에 나타나 있는 정신이다.

 


2.제 1회 도약기(1896-1905)

 

 

 

1. 네비우스 정책

 


이 부분에서 취급될 첫 번째 문제는 <네비우스 정책>이 한국 교회의 부흥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이며, 두 번째는 동학란을 계기로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내한한 선교사들의 공헌이다. 특히 <네비우스 정책>과 동학란을 연계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진정한 한국 교회 부흥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동학란 이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이때까지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고, 네비우스 정책이 채택되었어도 교회는 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란을 거치면서 갑자기 성장의 머리를 들게 된다. 우선 이 부분을 쉽게 알려 주는 그래프를 소개한다.

 


1. 네비우스 정책

 


통상적으로 한국 교회 부흥의 비결을 <네비우스 정책>의 공헌으로 인식하는 경향들이 있다. 특히 한국 장로교의 경우 더욱 그런 경향이 농후하다. 사실 <네비우스 정책>이 한국 교회에 이바지한 공헌은 무시할 수 없다.

 


<네비우스 정책>이란 1890년 중국 산동성 지역의 미 북 장로교 선교사 죤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를 주한 선교사들이 초청하여 선교정책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그가 소개한 선교정책을 1893년에 조직된 선교사 공의회에서 수정 . 보완하여 한국의 선교 정책으로 채택한데서 붙은 명칭이다.

 


그가 소개한 선교정책을 클라크(Charles Allen Clark)는 "자력전도(自力傳道; self-propagation), 자치제도(自治制度; self-government), 자급운영(自給運營; self-support)" 등으로 요약하였다.

 


이 정책의 중심 이념은 피선교지 교회가 외국인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발전해 가도록 유도함으로써, 능력 있고 강인한 교회로 키우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사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영국 국교회 성직자로써 선교협회 서기로 재직하였던 헨리 벤(Henry Venn)이 실시한 3대 자급원리(三大 自給原理 : three-self Principle)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가 주창한 삼자원리(三自原理)란 선교지의 교회들이 "독립적으로 행정"(self-governing)하고, "자급 자족"(Self-supporting)하며, "자체적으로 선교(Self-propogating)"하는 교회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말의 선교는 대개 이런 방향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고 네비우스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이지 그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다.

 


네비우스는 중국 산동성에서 이 정책에 근거하여 선교를 실시하면서 동양인의 사고와 풍습에 맞도록 수정 . 보완하였고, 이것을 중국보(中國報)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일도 있는데, 내한한 선교사들은 대개 이 논문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강사로 초빙하였다.

 


이런 선교정책은 한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필요에 의하여 수립된 원칙이지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규칙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선교사들에게는 선교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필요했겠지만 정책이 곧 부흥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못한 부분이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선교사가 내한하여 공의회를 조직하고, <네비우스 정책>을 체택하기에 앞서서 이미 한국의 교회들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그래프-1과 그래프-2를 참조)을 어떻게 네비우스 정책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선교정책이 수립되기 전에는 미미하던 성장이 정책 수립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면 충분히 납득이 되겠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껄끄러운 부분이다.

 


이제 다음의 글을 읽으면 <네비우스 정책>을 절대시하는 마음이 약간 수그러들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은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이제는 반대로 자기들의 친척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들은 또한 "자립의 모본을 보여 주었는데, 교회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그 후의 다른 많은 곳에서와 같이 복음이 선교사들을 앞질러 전파되었는데, 선교사들은 언더우드 목사와 마찬가지로 이방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마을들을 방문했던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선교정책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와 영혼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열정, 그리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려는 진실성 때문에 복음을 전하였다고 주창하는 것이 <네비우스 정책> 이전의 부흥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더욱이 당시는 외침(外侵)의 위협을 받아 국가의 독립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교인들은 독립의 소중함을 절대적으로 느끼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에서마저 자주력을 상실하면 안되겠다는 강한 자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자주의식이 자력으로 전도하고, 자력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동기가 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역사적 정황론(歷史的 情況論)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한국 교회가 부흥한 기초는 바로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적 환경론으로는 자립에 대한 의지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복음을 받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구령(救靈)의 열정과 사명감은 설명하지를 못한다. 먼저 뜨거운 사명감과 복음 전도의 실천이 있은 후 교회를 자주적으로 이끌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있게 되는 것이지, 역사적인 형편이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전도해야겠다는 결단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비우스 정책>에도 자주적인 정신이 숨어 있었고, 이런 정신의 공통분모는 역사가들의 시선을 한국인의 사명의식보다는 <네비우스 정책> 쪽으로 비중을 두게 하였다. 이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며,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부흥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만일 <네비우스 정책> 자체가 우수했고, 그 정책만 있으면 기적적인 부흥을 가져올 수 있다면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도 분명한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중국의 교회는 네비우스가 직접 선교하였고, 더욱 확실한 <정책>을 구사하였을 터인데, 중국 교회는 과연 기적을 이루었는가?

 


이 질문은 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지역에 대하여도 적용되는 질문이다. 과연 부흥되지 못한 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정책의 빈곤 때문이었을까? 그런 지역에서는 왜 <네비우스 정책>을 도입하지 않았을까?

 


둘째, 한국의 감리교는 <네비우스 정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다음으로 큰 교단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책보다 중요한 것은 현지인들의 의식이다. 이것을 더 중요하게 강조하여야만 한국 교회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것은 한국 교회만 아니라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지역의 선교에서도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라고 하겠다.

 


2. 동학란과 교회의 부흥

 


1895년의 한국 사회는 동학란과 청 . 일 전쟁 등 전란의 큰 소용돌이로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는 시기였다. 호남과 영남 그리고 충남지역에서 동학도들은 관군과 전투를 벌였고, 전주 성을 비롯하여 지역의 주요 도시들이 동학군에 점령되면서 전투는 확대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진압되고 말았다.

 


동학이란 서학의 반대 개념으로서, 서양의 기독교와 문명이 유입되면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유교적 전통과 사상 그리고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을 체감한 기성 세력들이 자체방어의 수단으로 유 . 불 . 선(孺佛仙)을 혼합하여 만들어 낸 혼합종교를 뜻한다. 그리고 이런 동학 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성취하려한 것이 호전적 동학의 우두머리들이다.

 


이런 동학의 기세는 한반도의 남쪽에서만 성행한 것이 아니고 소래 교회가 있는 황해도에도 소요를 일으켜 관군의 무기고를 탈취한 동학도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서학의 본거지인 소래와 소래 교회를 포위하여 일대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이 때 소래에는 캐나다 선교회 소속 청년 선교사 매켄지가 상주하며 한국의 풍습과 언어를 익히고 있었는데, 동학군이 소래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소지하였던 엽총 등 무기를 파기하면서 평화를 종용하였으나 동학 도들은 계속 포위망을 압축하여 들어왔다.

 


이때 주변 마을에서 전란을 피하여 많은 사람들이 소래 마을로 피난을 하였고, 이들 피난민들 중에는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평일에는 동학 도에 호응하는 이중적인 생활을 통하여 자신들의 구명(救命)에 신경을 쓰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소래 교회는 약 80 여명이 모이는 성황을 이루었고, 이 사람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넓은 예배 공간이 필요하게 되어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동학의 위협에 교인들과 주민들은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감지한 소래 교회의 지도자 서경조는 용기를 내어 동학군 진중으로 홀로 들어가 동학군의 최고 지도자와 직접 면담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교회를 공격하는 이유에 대하여 묻고, 아울러 동학의 경전을 놓고 일대논쟁을 전개하였는데, 그의 해박한 한문지식은 결국 동학의 최고 지도자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동학 도들도 역시 신사답게 서경조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세우며 포위망을 해제하고 말았다.

 


이로써 소래는 일약 황해도 지역의 피난처로 각광을 받게 되었고, 전란을 피하여 오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 약 300 여명의 신도들이 모이게 되었다. 결국 1896년 소래 교회는 예배당을 신축한지 1년만에 증축하는 감격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다. 공격해 오는 적군 깊숙이 단신으로 들어가 최고 사령관과 담판을 한 일이나, 그들의 경전으로 동학 도를 설득하였다는 것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 후에도 동학과 관련된 놀라운 사건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황해도의 동학이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최고 지도자는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으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서경조는 동학의 지도자가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구출하기로 작정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마침내 사형집행 직전에 그를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은 "원수를 사랑하라"(마5:44)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전 가족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으며, 그의 후손 중에는 목사가 되어 소래 교회를 담임하기도 한다. 이 사건과 교회의 부흥과는 깊은 함수관계가 있다. 사실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이제 동학란 이후의 교회 성장을 도표를 통하여 읽어 보도록 한다.

 


<도표 5>

 


연도 세례교인 수 연도 세례교인 수

 


연도 세례교인 수 연도 세례교인 수 연도 세례교인수

1891년 119 명 1901년 4.998 명

1892년 127 명 1902년 5.481 명

1893년 141 명 1903년 7.207 명

1894년 193 명 1904년 8.756 명

1895년 253 명 1905년 11.036 명

1886년 9 명 1896년 661 명 1906년 12.215 명

1887년 25 명 1897년 1.045 명 1907년 18.083 명

1888년 65 명 1898년 2.007 명 1908년 25.153 명

1889년 104 명 1899년 2.007 명 1909년 30.337 명

1890년 103 명 1900년 3.914 명 1910년 39.384 명

 


이상의 수는 물론 세례 교인만을 기준한 것이다. 세례교인의 수와 교회에 모이는 사람의 수는 동일하지 않으며, 일반 교인과 세례교인의 수적 비율은 1900년대 초반까지는 3.6:1로, 1907년부터 1942년까지는 평균 2.6:1로 평균비율을 잡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의 혼란과 생활의 곤경은 결코 교회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성장에 도움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사회적인 환경이 교회를 성장시킨 요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동학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소래로 피난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래가 황해도지역의 피난처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황해도의 동학군은 소래를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곳은 결코 안전지대일 수 없었다. 이런 소래를 피난처가 되도록 한 것은 단순히 피난민이 몰려왔기 때문이 아니라 소래를 피난처가 되도록 축복하신 하나님의 사역과 이에 동참한 서경조의 희생과 수고, 그리고 그가 실천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흥의 동기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희생과 사랑은 소래로 유입된 많은 피난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향도(嚮導)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면 바른 역사의 해답은 얻을 수 없다.

 


이로부터 10년 후의 일이지만 1904년에 발생한 노 . 일 전쟁도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샤프 목사(Rev. C. E. Sharp)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다.

 


한국 백성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대 문명이 20세기의 비상시국에 있어서는 무용한 것임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는 나라들이 모두가 최고의 문명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도 낡은 것으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것을 찾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기독교가 일종의 문명으로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문명으로 생각하였다는 언급은 교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반드시 영적인 요구에 의해서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은 세상의 절박한 환경과 미래의 희망을 위해 교회를 선택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런 환경을 이용하여 택한 백성을 부르시는 섭리를 행하신 것이다. 사회적인 역경이 백성들로 하여금 교회를 선택하도록 유도하였고, 이로 인해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생각은 오늘의 기적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만일 이것이 전부라면, 이것은 교회의 부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피난민 수용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소래 마을을 피난처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올 수 있도록 한 것과,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유도한 것은 초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맺어진 열매이다.

 


1890년대의 한국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와 아울러 초대 한국 신앙인들의 헌신에 가장 큰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 때부터 부흥의 그래프는 급상승의 방향을 잡게 되는 것이다(도표 5 참조).

 


3. 선교사의 기여

 


하나님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토양에 복음의 씨를 주실 때 참으로 특이한 방법으로 주셨다. 통상적으로 피선교지에 교회가 생기고 교인이 생기는 것은 선교사의 수고가 있은 후에 그리 되는 것이나 한국은 그런 상식을 뛰어넘는 기적을 통하여 교회가 정착되었다. 이 부분은 이미 간략하게 논하였기 때문에 재론을 피하기로 한다. 그러나 내한한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기여한 부분도 지대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첫번째, 내한한 선교사들은 세례를 통하여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 전도인들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믿기로 작정하였으나 목사가 없어 세례를 받을 수 없었던 결신자들을 거두어들이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임명하며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유도한 것은 내한한 선교사들의 몫이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4:37)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부분이다.

 


두번째, 거두어들인 신앙의 열매를 양육하는 일도 선교사들의 몫이었다. 당시 한국인 전도인들은 성경은 읽을 수 있었으나 폭넓은 기독교의 지식은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1890년부터 사경회를 시작하였고, 한국의 평신도 전도자들은 열심으로 이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892년부터 언더우드는 신학반을 조직하여 앞으로 한국인 목회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이 실시한 성경공부는 참으로 한국 교회를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한 원동력이었고, 초창기 한국 교인들의 성경공부에 대한 열심도 대단하였다. 그 실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904년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60%의 신자들이 이러한 사경회 가운데 한 곳 혹은 그 이상 여러 곳에 참가하였다.

 


제자양육을 통하여 선교사들은 헌신을 자원하는 많은 한국인 평신도 전도자들을 영적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식 신학교육이 퍽 늦게 시작된 것이다. 미국 장로교 본부의 승인을 받아 마페트(S. A. Moffett)가 평양에서 신학교를 개설한 것은 언더우드가 내한한 지 15년이 지난 후이며, 서울의 신학반을 시작한지도 1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이다. 그래서 정식 신학교육은 1901년부터 시작되어 1907년에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그 해 6월에 7인의 졸업생이 안수를 받고 목사로 장립되었다. 선교사가 내한한 지 무려 22년만에 한국인 목사가 생긴 것이다.

 


이때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마페트 선교사의 고백에 의하면,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한국인 지도자를 요구하는 소리가 열화와 같았다"고 하였고, 이런 한국 교회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가 실시하는 신학반의 진도가 느린 것을 감안하여 마페트는 단독적으로 목사 양육의 수속을 밟은 것이다. 이것이 수도 서울에 신학교가 세워지지 않고 평양에 세워지게 된 이유이다.

 


선교사 내한 22년만에 7인의 목사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 교회의 수와 교인의 수에 비하여 너무 늦고 빈약한 감이 있다. 당시 한국 장로 교회의 교세는 세례 교인이 18,061 명이고, 교인 총수는 72,968명이며, 교회 수는 전국에 785 개처나 있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성경번역 사업이다. 하나님은 한국에 기독교를 전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주셨다. 그래서 중국에서 서상륜을 통하여 성경을 번역 . 출판하였고, 일본에서 이수정을 통하여 성경을 번역 . 출판하게 하였으며, 처음으로 내한하는 언더우드는 이수정이 번역 . 출판한 마가복음을 지참하고 내한하였다. 그는 내한 2년만에 한국인 조사 서상륜의 협조를 받아 이수정 역을 수정 .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그가 자신이 번역 . 출간한 것처럼 가장한 수정본은 미국 성서 공회에서 해적판으로 지목하고 말았다.

 


그 후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 . 출판하기 위해 정식 기구를 만들고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였으나 짧은 어학실력 때문에 의욕만큼 성과가 따라주지 못하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한국인 조사들을 성경번역에 동참시킴으로써 빠른 속도로 번역이 진척되었다. 드디어 1900년 9월 9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단권 신약성경 출판 기념예배를 드렸고, 곧이어 구약 성경번역에 착수하여 1911년 3월 완역 . 출판을 하고, 5월 성서주일에 출판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것이 선교사들이 한국의 선교 현장에 기여한 부분이다.

 


이 성경은 출판 후 1년만에 8천부가 판매되는 놀라운 실적을 기록하였다. 이 사실은 성경 출판이 늦었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성경을 읽고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의 열망이 얼마나 강력하였는지를 입증해 준다. 이런 열망 없이 교회의 부흥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열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 교회가 부흥한 이유와 원인을 규명할 수 없다.

 


이제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하여 선교사 자신들이 남긴 글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1895년에 평양으로부터 보고된 연례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평양에서의 활동은 이제 개척 전도의 단계를 지나서 확고한 기반을 닦기 위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교회는 발전하고 팽창하기 시작하였으며, 평양과 그 변두리 지방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으로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이 보고서는 계속해서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의 주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세례교인과 초신자들이 모두 열렬한 복음 전도 활동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전도 활동을 하고 우리 선교사들은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 해 주어야 했다."

 


이처럼 한국교인들은 선교사들보다 앞장서서 전도를 하였고, 선교사들도 초인간적인 노력으로 세례 지원자들과 초신자들을 가르쳤으며, 신앙이 약한 자들을 훈련시킴으로써 '후원'의 책임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3.교회의 수난기 (1906-1945)

 

 

 

1. 공의회 조직

 


1901년부터 한국인들은 직접 교회정치에 참여하는 기회가 선교사들에 의해 부여된다. 그때까지 교회의 여러 사안들은 선교사 공의회에서 일방 처리하여 왔었다.

 


선교사 공의회는 1893년 1월 28일 한국에 내한한 선교사들이 출신지와 국가를 초월하여 한국에서 하나의 장로교를 설립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고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ment)를 설립하였으며,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한국인 장로들과 선교사들이 합동으로 모이는 공의회가 조직된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내한한 지 15년,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된 지 9년만의 일이다.

 


제 1회 합동 공의회에서 가결된 가장 중요한 안건은 흉년으로 굶주린 지역 주민들을 위해 전국 교회가 구제헌금을 하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의 선배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는 사업을 통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 하였고, 이런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었다.

 


이 공의회 시절에 일어난 사건 중에 특기할 만한 일은 감사절의 제정이다. 한국의 감사절은 미국교회에서 시작된 감사절과는 그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감사절 때마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소개되는 감사절의 유래는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의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간 청교도들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시어 많은 양식을 주시니 감사예배를 드렸고, 이것이 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다고 하는 Message이다.

 


그러나 한국의 감사절의 시작은 다른 측면의 감동이 있다. 1904년의 한국 사회는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없었고, 부패한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 때문에 서민들은 자신들의 양식마저 빼앗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해에 회집된 공의회에서 전국의 교회가 구제헌금을 할 것을 가결한다. 실로 그 때의 한국 사회는 굶주려 있는 이 때에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서경조는 "한국에 복음이 들어와 많은 동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도처에 교회가 세워지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전국 교회는 감사일을 정하여 하루를 즐겁게 보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감사절 제정을 제안한다.

 


굶주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구원을 감사하는 감사의 정신과 신앙이 한국 교회의 감사절 속에 숨어있는 신앙의 숨결이다. 육신보다 영혼을 중요시하고 굶주린 육신의 허기짐을 영혼의 풍성함으로 달래며 감사하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감사의 신앙이 한국 교회의 신앙이었고 이런 신앙은 기근이나 전쟁, 혹은 모진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뿌리요 부흥의 기적을 이룬 힘의 원천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1900년 한 해에 세례교인 수가 30% 이상 증가하였고, 선교사들은 연례보고서에 "사람들이 너무 빨리 증가되고 있지 않는가?.....(중략)....이와 같이 빠른 성장은 아무런 영적 근거도 없이 수효만 많이 모아 놓은 것이 아닌가?......(중략).......여러 가지 증거는 그것이 영적 근거 위에 확고하게 기초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 근거는 바로 역경과 굶주림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주님은 환자를 고칠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10:52)고 하셨다. 주님은 한국 교회의 선배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고, 그 말씀은 그대로 응답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는 감사의 열매를 얻게 된 것이다.

 


2. 새로운 부흥운동

 


한국 교회사는 한국의 교회가 급 성장하는 몇 번의 고비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1907년의 부흥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부흥에 대하여 한국 교회사는 대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원산에 있는 미국 남감리회, 미국 침례회, 캐나다 장로회 등에 속한 선교사들의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1903년부터 기도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임은 정기 사경회(Annual Bible Conference)로 발전하였고 1904년에는 미국 남감리회 소속 하디(Robert Alexa Hardie, 1865-1949)를 강사로 초청하여 기도회를 인도하게 하였는데, 그는 자기가 선교사업에 실패한 것은 믿음이 약하고 성령 충만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하였다. 이 말에 도전을 받은 선교사들은 크게 각성을 하면서 회개를 한다. 이런 진정한 회개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은 1906년 8월 하디를 강사로 초빙하여 사경회를 개최한다. 이때 평양의 길선주 목사는 누구보다도 빨리 성령을 체험하였고, 그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큰 회개운동이 일어나면서 부흥의 물결이 확산된 것이다.

 


이런 교회사의 기술은 1907년도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대체로 두 가지 실수를 범하고 있다.

 


첫째는 1907년의 부흥 운동의 기점을 원산에서 발생한 선교사들의 회개운동에 두면서 부흥운동을 선교사들의 업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1907년의 부흥을 돌발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성장 그래프를 보면 1907년의 부흥은 1895년 이후로 일고 있는 성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돌발적인 부흥운동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지금까지 지속되는 교회 성장의 후반부에 속하여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1907년의 부흥은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되어야 하며, 부흥의 진실을 역사는 밝혀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부흥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적 각성운동을 통하여 교회가 정화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며,

 


둘째, 교만하고 우월감에 사로 잡혀 있었던 선교사들과 교인들이 깊은 회개를 통하여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의 기회를 다지는 운동이 되었으며,

 


셋째, 교회가 본연의 자세를 찾아가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부터 언급하려 한다.

 


180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외국의 상선과 군함들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이로 인하여 국내 사정은 불안하게 되었고, 결국 군사적 위협 하에 외국과의 불리한 통상협정을 맺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895년도의 청 . 일 전쟁은 청국의 패전으로 끝을 맺었고, 1904년의 노 . 일 전쟁도 역시 강대국 러시아의 패전으로 끝을 맺으면서 신흥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은 눈앞에 다가오게 된 것이다.

 


주변의 강대국을 무력으로 제압한 일본제국은 1900년대에 들어 서면서는 노골적으로 침탈의 마수를 뻗게 되었는데, 1904년 제 1차 한 . 일 협약을 체결하고 고문정치(顧問政治)라는 명분으로 일본의 고문관들이 외교, 경제, 군사, 경찰, 학부, 궁내부 등의 실권을 장악하고 말았다.

 


1905년에는 강권적으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였고,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후, 한일 신협약(新協約)을 체결하면서 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다. 그리고 각부의 차관에 일본인을 임명하여 소위 차관정치(次官政治)를 단행한다. 1910년에는 한일합병을 통하여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고 말았다.

 


이런 정치 현실과 국가의 위기를 목격하고 있는 국민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이런 시국에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교인들의 가장 큰 무기는 기도이다.

 


1905년에 모인 장로교 공의회는 추수감사절후 1주일 동안 국가를 위해 전국 교회가 특별 기도회를 진행할 것을 가결하였고, 상동교회에는 매일 새벽 구국 기도회를 가졌다. 이 때 매일 수 천명이 모여 구국기도를 하였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 국권이 찬탈 당함으로써 성도의 기도는 헛되고 말았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두 가지로 응답해 주셨다.

 


첫째,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되는 것보다 질적으로 부흥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교회의 양적 부흥은 1895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는 추세였다. 그러나 1907년을 중심한 기간에 모이는 집회마다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양적인 부흥보다 영적으로 정화되어 갔고 신앙적으로 성숙하게 되었다. 이것이 1907년을 전후한 부흥의 색깔이다.

 


이 사실은 한국 교회 성장을 그린 그라프의 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도표 6>

 


연도 세례교인 수 교인 총수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록

 


연도 세례 교인 수 교인 총수

 


1905년 11,061명 37,407명

 


1906년 14,353명 56,943명

 


1907년 18,061명 72,968명

 


1908년 21,230명 94,981명

 


1909년 30,337명 119,273명

 


이 통계는 1907년에 부흥의 실체를 보여 주는 것이다. 교회 성장의 곡선이 1907년을 기하여 급격하게 상승하지 않고 지금까지 성장해 오는 추세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신입 교인의 수는 약간 곡선이 상승세를 타고 있으나 세례교인의 증가는 완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1907년의 부흥은 한국 교회의 수적 성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그래프는 보여 주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백낙준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러한 부흥이 비기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운동이었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되찾게 하는 일이었다. (백낙준. 1832년부터 1920년까지의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역사. 평양: 숭실전문학교 출판부. 1928. 364쪽).

 


둘째, 이 때의 부흥운동은 교회 구성원의 "물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인들이 교회를 선택한 큰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계층을 구분하면 일반 민중계층과 상류층의 식자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 민중이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순수한 영적 이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부패한 관리들의 착취에서 보호받기 위해서이며, 지식층 인사들이 교회를 선택한 이유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국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들에게는 애국과 기독교 신앙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였다. 그러나 국권이 찬탈 당하니 저들은 신앙을 가져야 할 목표를 상실 당하고만 것이다. 그들은 이상 교회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제 저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찾아 조국을 떠나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어 교회는 순수한 신앙의 공동체로 남게 된 것이다.

 


1907년 사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선교사들의 회개이다. 이들은 한국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고 다만 선진국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우월감과 교만함으로 일관하였고, 이런 처사는 자신의 선교 사역에 실패와 한국 교인들과의 마찰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개를 통하여 양자의 간격이 좁아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때의 부흥 운동은 선교사들의 회개에서 시작하여 한국 교인들에 의하여 심화되고 토착화된 회개 운동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전택부. 한국교회 발전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158쪽).

 


사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은 함경도의 전계은과 평양의 길선주이다. 특히 길선주는 1905년부터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여 세계 기독교의 불가사의를 창조한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적 특징은 한국의 토착 종교인 미신에 심취되어 있었던 사람들로서, 성령 강림을 가장 먼저 체험하였고 이를 기초로 부흥의 불길을 유도한 것이다.

 


이상의 조건으로 보아 1907년 전후의 부흥운동은 양적인 부흥이라기보다 질적으로 정화되는 과정이라고 평가해야만 한다.

 


3. 백만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

 


1910년부터 1911년까지는 "백만명 구령운동"의 열기를 내 뿜으며 전국 교회가 전도에 전념하는 시기였다.

 


이 "백만명 구령운동"은 개성지역의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제창되기 시작하였고, 장로교도 이에 적극 호응하여 열심으로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황해도 재령에서는 신자들이 신청한 전도일 수가 모두 1만일에 달했고, 평양에서는 1천명의 청중이 개인전도에 바치겠다고 약속한 날 수가 모두 2만 2천 일에 달했다. 이 기간 동안 수백만 권의 소책자와 70만 권의 마가복음이 판매되었고, 대구의 어느 전도집회에서는 4,5백명의 결신자가 생겼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결심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자 그렇게 많은 결신자들은 4,50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 후 얼마 안 가서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James E. Adams. Annual Personal Report to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U. S. A. (Taegu. Korea 1910-1911) (64쪽)

 


이 사실에 대하여 제임스 아담스 목사의 논평을 들어본다.

 


"한국사람들이 실시하는 꾸준한 개인적인 전도 방법이 서양사람들이 실시하는 집단적 전도집회보다 훨씬 더 우수하며 그 결과도 훨씬 더 항구적이다."

 


이 말은 한국인에게는 한국인 체질에 맞는 전도방법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도 열기를 내뿜었던 백만명 구령운동이 무위로 끝을 맺은 이유가 무엇일까? 많은 교인들이 전도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였고 헌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의로 끝을 맺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게 줄기차게 상승하던 교회 성장의 그래프가 전도에 열중하였던 그 시기에 오히려 침체의 방향으로 선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우리는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첫째, 한국인의 체질에 맞고 결신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전도방법은 개인전도이며 관계전도이다. 이런 전도방법이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이유는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이교문화(異敎文化)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작정한 사람들이 그 순간부터 부딪쳐야 하는 사회는 이교적인 세계이고, 초신자들에게는 이런 환경을 헤쳐나갈 능력이 사실상 부족하기 때문에, 이들을 관리하고 양육해야 할 책임 있는 지도자가 그들 곁에 있어야 한다. 이런 지도자의 양성 없이 결신자를 양산하는 것은 실패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꾸준한 개인전도 방법이 "훨씬 더 우수하다"( 서명원. 앞의 책. 64쪽).

 


첫째,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이런 개인 전도방법에 의해 성장한 것이다.

 


둘째, 당시 한국인들의 관심은 복음보다 삶의 문제가 더 심각하였다. 일제의 통치를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에게 농토를 약탈당하고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으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하는 행열이 줄을 잇게 된다. 이민의 물결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다음의 글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한 교회의 거의 모든 신자들이 빈 건물만 남겨 두고 이민을 가 버렸다. Annual Report of Board. (From the annual report of Pusan Station). New York. 1913. 67쪽

 


국가를 잃은 이 나라의 주인들은 모두 허탈해 있었고, 일제의 강압 정치로 인해 살길마저 막막해진 민중들의 가슴에는 애굽을 찾아가는 아브라함과 같이 중국의 간도지역으로 이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시기에 영적으로 위로를 주며 힘을 공급해 주려는 선교사들의 열정과 의도는 매우 좋았지만 현실은 의욕을 따라 주지 못하여 새로운 결신자를 얻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백만명 구령운동"은 구호도 좋고, 포부도 대단하였으며, 의욕도 넘쳐 있었지만 얻은 소득은 별로 없는 빈껍데기의 운동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해리 로디스(Dr. Harry Rhodes)는 "백만명 구령이란 구호 자체가 잘못 정해진 것이었다"(Some think that the slogan itself was a mistake)고 하였다. H. A. Rhodes. A.M., D.D.,(1934).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UME 1 Seoul, Korea.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Department of Education. 287쪽.

 


그러면 만주로 이주한 신앙인들은 그곳에서 신앙을 지켰는가? 아니다. 저들은 생활이 안정되기까지 오랫동안 영적으로 방황하게 되는데 다음의 보고문이 이를 증명해 준다.

 


1921년까지는 만주에서 보고된 세례교인 수가 겨우 1.566명에 불과하였으나 1941년에는 10.503명으로 성장하였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록

 


요즘 한국 교회는 "예수 초청" 잔치를 개최하고 하루만이라도 교회에 나와 복음을 들으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 성과는 역시 백만명 구령운동 때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된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흥하는 한국 교회라고 하여 모든 정책, 모든 전도방법이 그대로 적용되고 부흥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어느 국가나, 민족이나 지역을 막론하고 그 지역 특성에 맞는 전도방법과 정책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역사의 교훈이다.

 


4. 3 . 1 운동 전후의 한국 교회

 


1919년은 독립과 얽힌 사건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찾아온 해이다.

 


1910년에 주권을 강탈당한 우리 민족은 주권회복을 위하여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는데,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하였으나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무력에는 무력'으로라는 생각으로 의병활동을 통한 무력항쟁의 방향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잡았으나 역시 일본의 정규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는데, 때로는 경제적 자립운동과 민족교육 등으로 방향을 잡기도 한다. 이렇게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며 애태우는 우리 민족의 가슴에 독립의 가능성과 희망을 제시해 준 인물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다.

 


1918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포함한 14개조의 세계 평화 안을 선포하였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국내외에 있는 민족운동가들은 민족독립의 기회를 맞는 듯이 기뻐하였고, 희망 중에 사기충천하게 된다. 이런 시점에 불행히도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서거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고, 이런 민족감정은 거족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을 폭발시킬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 주었다. 결국 1919년 3월 1일,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계 인사 15명과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 16명, 그리고 한용운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 2명 등 도합 33인이 민족을 대표하여 대한독립을 선언한다.

 


이로부터 약 2개월간, 한국인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열창하였고, 일제는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을 향하여 사정없이 총탄을 쏟아 부음으로써 한국 강산은 피로 붉게 물들고 말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희생이 많았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지역의 특성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지방의 만세운동의 현장에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역할을 하였고, 교회는 일제의 억압으로 고통을 받는 이 민족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입장은 한국 교인들의 입장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저들은 교회가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 뿐 아니라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선교사들 자신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였다. 선교사들이 이런 입장을 고수한 것은 교회와 교인들이 입을 타격을 생각하여 취한 행동이지만 이것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였다. 민족의 중심에 서서 자진하여 피를 흘리는 교인들을 보는 민중들의 시선은 존경과 경이로움이었다. 그래서 3 . 1운동이 끝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교회가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이 교회 성장에 해로울 것이라는 선교사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피 흘리는 희생 없이는 결코 교회는 자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닐까?

 


선교사들의 보고문을 통하여 당시의 처참하였던 사정들을 살펴본다. 재령 주재 피이터어스 목사(Rev. A. A. Pieters)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두 교회에 속한 남자들은 거의 모두가 항거운동에 참가하여 싸웠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도피하였으며 따라서 지금 교회는 여자들만 남아 있다.(A. A. Pieters. Annual Personal Report to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 (Chaeryung, Korea 1919)

 


비극적인 상황에서 교회와 교인들은 희생하였고 피를 흘렸으며 그 피의 대가를 주님은 교회 성장이라는 것으로 지불하여 주셨는데 다음의 도표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도표 7>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록 통계표

 


연도 세례교인 수 교인 총수

 


1917년 68.230명 149.526명

 


1918년 68.506명 160.909명

 


1919년 69.047명 144.062명

 


1920년 69.025명 153.915명

 


1921년 72.138명 179.158명

 


1922년 75.866명 187.271명

 


이 도표에서 보는 것은 3 . 1운동이 발생한 당년에는 교회에 참석하는 일반 교인의 수가 약간 감소하는 현상이 있었으나 세례 교인의 수는 줄지 않고 있다. 그리고 1921년부터는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새 신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일년 동안에 5.5%의 증가를 이룬다. 피 흘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귀한 대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고통과 희생 속에서도 교회가 계속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은 평양 지부의 보고서를 통하여 읽어본다.

 


기독교인들은 옥중에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닌 동료 죄수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곤경 속에서 듣는 복음의 증거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개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기쁨을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 고향에 돌아와서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다.(서용원, 앞의 책, 74쪽).

 


독립 만세를 부르며 피를 흘리고, 고문을 당하는 한국 백성과 교회를 하나님은 끝내 외면하지 않으셨고, 옥중에서도 동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을 위해 뜨겁게 희생한 그들의 노력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분명히 지불해 주셨던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린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국가의 독립 대신 더 좋은 하늘 나라의 소망을 이 백성들 가슴에 심어 주셨고, 김익두 목사를 사용하시어 다시 큰 부흥의 불길로 응답하셨다고........."

 


1920년대를 전후하여 활약한 한국의 무디, 김익두 목사는 신유의 은사를 통하여 이 민족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서 많은 환자가 치유되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나타났고, 눈으로 하나님의 큰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 다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치유의 손길을 통하여 육신의 질병과 아울러, 민족독립을 열망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민족의 아픈 가슴과 영혼을 치유하시면서 복음과 천국의 소망으로 채워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부흥은 치유의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제의 침탈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으며 힘을 잃었던 한국 교회는 1910년 이후 성장이 멎고 침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독립만세운동으로 많은 교회가 공동화의 현상까지 겪게 되면서 불투명한 미래를 맞았지만, 하나님은 치유의 은총을 통하여 다시 부흥의 곡선을 상승하도록 축복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후 7년간 계속되는 교회 성장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감리교에서는 "백년 전진" (The Centenary Advance)이라 불리고, 장로교회에서는 "전진 운동" (The Foward Movement)이라 부르는 조직적인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20부터 1925년까지 5년간 약 30%에 달하는 성장을 보게 된다. 이 시기의 선교사들의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4천개에 달하는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거의 모두 이 전진운동을 위한 특별 부흥집회가 열렸으며, 1920년 한해 동안에 5,603명의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Annual Report of the Board. New York. 1923).

 


이제 3 . 1 독립운동과 관계 있는 보고문을 소개하면서 이 장을 끝맺는다.

 


"아마도 1919년-1920년의 해처럼 그렇게 역경 속에서 일을 시작하여 그렇게 밝은 전망으로 끝맺은 해도 없었을 것이다.(Annual Report of the Board. New York. 1922).

 


5. 신사 참배와 교회 부흥

 


한국 통치를 계속하려는 일제에게 걸림돌이 되는 존재는 교회라는 공동체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이 집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서서히 접근해 오기 시작하였는데, 그 방법은 세 가지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힘과 폭력으로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합법적으로 어용화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압력으로 예속 단체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가시화된 것은 1910년의 안악 사건과 1911년의 105인 사건이다. "안악 사건"은 황해도 안악 지방의 기독교 우국 인사들을 일제히 체포하여 고문한 사건이며, "105인 사건"은 평북 선천지방의 기독교인 약 700명을 체포하여 투옥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강압적인 방법으로는 기독교인들을 제압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유신회라는 어용단체를 만들어 한국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였다. "105인 사건"이 폭력에 의한 기독교탄압이라면 유신회 사건은 기독교를 합법적으로 말살하려는 사건이었다.

 


일제는 그후에도 기독교에 대한 감시활동을 계속하였는데, 때로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밀정을 잠입시키기도 한다. 즉 1922년에는 평안북도 동천에서 열린 할리 코빙통(Miss Hallie Covington)양의 사경회에 일제의 밀정이 잠입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부흥은 계속되었는데, 1920년에서 1925년까지의 교회 성장의 통계를 보면 약 30%의 성장을 보였고, 세례교인의 수도 69,000명에서 89,000명으로 증가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성장은 외부의 힘이 가해지면 수그러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딛고 일어서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1925년의 보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런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어떤 곳에서는 분명한 성장이 보고되었으며, 교회 전체는 1925년쯤에는 큰 성장을 나타냈다. 1926년에는 강계에서 몇 개의 새로운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고 많은 새로운 신자들이 생겼다.

 


1910년에서 1930년까지 교인 증가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 8>

 


연도 세례교인 수 교인 총수

 


1910년 39.394명 140.470명

 


1915년 62.083명 145.616명

 


1920년 69.025명 153.915명

 


1925년 89.879명 198.823명

 


1930년 91.270명 194.507명

 


<그래프 8> 1910-1930년의 교인 증가 현황 (단위 : 천명)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집요하여 1930년을 넘어서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神道)의 종교행위를 국가의식이란 호칭으로 개조하여 한국 교인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신사참배 사건이며, 이로써 일제와 한국 교회는 정식으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이 일의 포문은 1935년 11월 평양의 숭실 전문학교(Union Christian College) 교장 죠지 매큔(G. S. McCune)과 숭의 여학교 교장 스누크(V. L. Snook)가 평남지사로부터 신사참배를 종용받는데서 시작된다. 이런 요청을 받은 매큔은 평양의 27개 교회 목사들과 협의 끝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매큔과 스누크는 결국 면직되어 강제출국을 당하고 말았다. 그후 교회 지도자들은 계속 신사참배를 강요받았고, 교인들 가정에는 일제가 보급한 우상의 감실(龕室)을 설치하여야 했으며, 예배 시작 전에 동방요배와 같은 국가의식을 강요받게 되었다.

 


장로교의 경우, 1938년 9월 10일에 개회된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이 가결되었고,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총리사가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런 결과만을 놓고 생각하면 매우 수치스런 일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면 부득이 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일제는 일차적으로는 유수한 교회 지도자 개개인에게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언질을 받아내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하였고, 총회 총대들에게는 신사참배를 지지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총대들은 검거하여 총회에 참석할 수 없게 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결의안이 표결되는 때에도 사회자는 찬성만을 묻고 반대는 묻지 못하게 하였다. 이 일에 항의하려는 총대는 총대의 수만큼이나 많이 잠입하여 총대들의 행동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제지되고 말았다.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물리적인 힘에 밀려 굴복한 것이다.

 


그후 교회는 본격적인 핍박을 받게 되었는데, 민족주의적 색채가 있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교인들은 해외로 망명을 하던지 아니면 교회를 떠나야 했고, 많은 교회는 폐쇄되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시작된 것이 천막집회이다. 그러나 이런 집회도 일본 경찰의 감시 때문에 참석하는 인원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에드워드 아담스 박사(Dr. Edward Adams)는 1938년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년 전에 나의 천막집회는 저녁에 300명으로부터 1,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지금 우리의 집회는 겨우 300명밖에 참석하지 않는다. 5년 전에 한 주일 동안의 집회에서 100명으로부터 200명에 달하는 결심자가 생겼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결심자는 50명을 넘지 못한다.

 


이런 외적인 압력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지만 결코 세례교인의 수는 줄지 않았고, 일반 신자들이 교회로 모여와 새로 결신 하는 새 신자의 수도 변함이 없었으므로 성장의 속도는 여전하였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세상 국가의 힘이나 경찰의 힘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럴 때 교회에 모이는 신자들은 오히려 더 신앙적으로 확실한 고백을 하였고 순교도 각오하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 신사참배의 문제는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저지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부흥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8년까지의 흐름을 도표를 통하여 보도록 한다.

 


<도표 9>

 


연도 세례교인 수 예배참석 인원

 


1925년 89.879명 193.823명

 


1926년 91.266명 194.408명

 


1927년 94.588명 159.060명

 


1928년 87.983명 177.416명

 


1929년 90.544명 186.994명

 


1930년 91.270명 194.678명

 


1931년 94.728명 208.912명

 


1932년 104.578명 258.216명

 


1933년 103.530명 281.918명

 


1934년 108.392명 298.431명

 


1935년 115.379명 323.974명

 


1936년 119.955명 341.700명

 


1937년 125.225명 356.281명

 


1938년 133.717명 362.077명

 


<그래프 9> 1938년까지의 교회의 흐름 (단위: 천명)

 


이 통계에서 발견되는 것은 1928년에 세례교인 수가 약간 감소한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 교적부에 이름은 있으나 실제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묵은 가지 정리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실제로 교인의 수가 감소한 것은 아니다.

 


6. 제 2차 대전과 한국 교회

 


1940년 이후의 한국 사회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과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다. 대동아공영(大東亞 共榮)을 명분으로 내세운 일제는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탈하더니, 1937년 7월 7일에는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1941년 12월 8일에는 미국을 향하여 선전포고를 한다. 이때부터 한국 교회는 일제의 형언할 수 없는 핍박에 직면하게 되었고,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된 것은 물론이고 1,200여 교회가 문을 닫았고(Annual Report to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U. S. A. New York. 1946.) 교인의 수도 감소한다.

 


이것을 도표를 통하여 보도록 한다.

 


<도표 10> (대한 예수장로회 총회록 통계표)

 


연도 세례교인 수 예배참석 인원

 


1937년 125.225명 356.281명

 


1938년 133.717명 362.077명

 


1839년 134.894명 360.838명

 


1940년 121.410명 328.648명

 


1941년 134.834명 355.754명

 


1942년 110.805명 249.666명

 


이 도표는 일반 교인들의 수는 급격하게 떨어졌지만 세례교인의 수는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들은 신앙을 잘 지키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한국 교인들의 진실한 모습이었다.

 


1942년 이후, 한국 교회는 일제의 최후 발악적인 핍박을 받게 되는데, 1943년 3월에 "조선 혁신교단"이 조직되었고, 1943년 5월 5일에는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총회 명칭도 바꾸고 말았다. 그리고 감리교는 벌써 오래 전, 일본 감리교와 합동하기로(1938, 10, 10)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교회를 자신들의 예속 단체화하는데 성공한다.

 


이때부터 저들은 본격적으로 박해를 가하는데, 성경과 찬송가를 삭제 또는 변경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여 모세 5경과 요한계시록은 성경에서 떼어버리도록 명령하였으며, 일본말로 찬송도 부르고 설교도 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는 저녁예배를 금지시켰고 예배당을 군용 공장으로 징발하기도 하였다.

 


1942년의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는 1,000개의 교회가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을 공출하여 일제의 무기 생산에 사용하도록 헌납하기로 가결시켰고, 전국 교회가 비행기 제작 헌금을 실시하여 1,890원(당시 환율로 미화 7만 불) 상당의 돈을 거두기도 하였다. 과연 일제는 한국 교회를 탄압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리한 전쟁을 수행하는데 이용까지 하였다. 그래도 만족하지 않은 일제는 결국 1945년 8월 18일을 기하여 한국의 전체 교회 지도자들과 유능한 교인들을 말살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명단을 작성하였으나 시행 3일전에 패전함으로 한국 교회는 전멸을 면한 것이다.

 


구약 에스더서에 있는 일을 일제는 20세기 중반에서 시행하려고 하였는데, 하만의 손에서 유대인들도 구출하신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일제의 마수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한국 교회의 부흥이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런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있던 일제 말의 한국 교회는 참으로 암담한 지경에 처하여 있었는데, 이 때 상황을 김양선 목사는 "한국 교회의 교인의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김양선, 앞의 책)고 하였을 정도이다.

 


4. 혼돈기(1946-1965)

 

 

 

1. 8.15 광복의 의미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마수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광복의 날이다. 이때 온 국민은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였고, 옥중에 있던 민족 운동가들과 신사참배를 거절하였던 많은 성도들이 자유를 얻어 출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도 역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세계 제 2차 대전 중의 한국 교회는 수난과 진통의 계절을 보냈다. 성장은 멎었고, 교인의 수는 하강 국면에 처하였을 뿐 아니라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일어난 하강 곡선을 침체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몸부림의 곡선이라고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극심한 핍박 중에도 교회는 결코 전멸의 늪 속에 아주 빠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예가 일반 교인들의 수는 급격하게 줄었지만 세례 교인들의 수는 줄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광복과 함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한국 교회는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힘차게 성장과 부흥의 기치를 들게 된다.

 


2. 국토의 분단

 


광복을 맞은 이 강산에는 또 다른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이 큰 시련의 한 가운데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강압으로 각종 교파가 단일 교단으로 통합되었었는데 광복과 동시에 과거의 교파로 분리되면서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진통을 겪게 된 것이다.

 


둘째, 38선으로 국토와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이다. 이때의 북한에는 남한보다 더 많은 세례교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불가항력적으로 공산치하에 남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 11> 남북한 교인 대비 표

 


연도 북한교인 수 남한교인 수

 


1938년 72,877명 53,088명

 


1939년 74,990명 52,180명

 


1940년 73,912명 38,364명

 


1941년 73,434명 48,044명

 


1942년 66,660명 43,342명

 


광복 직후 남북한의 교세를 비교하면 북한이 월등히 많았는데, 그것은 광복 직후의 현상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초창기부터 내려오는 추세였다. 이제 교회사에 나타난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00년부터 서북에 비중이 크게 기울기 시작하였고 1910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곧, 그해 신도 수는 ........(중략)........ 황평(黃平)이 23,483명인데 반하여 기청(畿淸)이 2,975명이라는 대비가 된다. 8대 1의 비율이었다.

 


서울은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먼저 전도를 시작한 곳이지만 교세가 북쪽지방보다 못하였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 부흥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지역에는 외국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부터 복음이 전파되었고 교회도 자력으로 세워졌었다. 따라서 이 지역 교회와 교인들은 복음의 선각자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복음 전파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1885년 현재로 성경이 5,944권이나 반포되었고, 1888년에는 누가복음서가 5만 여부나 반포되었다는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북한 교회가 국토의 분단과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존폐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국토 분단과 공산치하에 들어가게 된 현실을 직시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선 위기상황을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1945년 12월초 "북한 5도 연합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46년 6월 12일에는 남한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가 개회됨으로써 교회가 자연적으로 남북으로 분리된다.

 


북한 사회에서 교인들은 북한 당국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광복 직후 북한의 많은 교인들은 지방자치단체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하여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하였다. 이런 현상은 소련 점령군이나 공산당의 입장으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고, 탄압의 이유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교회와 교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보다 더 가혹한 탄압과 핍박을 받아야 했다.

 


북한의 교회가 공산당 정부와 본격적으로 마찰을 빚은 것은 1946년 11월 3일(주일)에 감행된 김일성 정권의 총선거 일로 정하면서부터이다. 이때 5도 연합노회는 주일선거 반대를 결의하였고, 이로써 북한 정권은 물리적인 강압만으로는 교회 말살이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고 "기독교도 연맹"(Christian League)이라는 어용기구를 통하여 교회의 치리권을 장악하고, 교회를 자멸토록 유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1949년 이 기구를 결성하고 교회와 신학교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에 반대하거나 탄압을 받는 교계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사선을 넘어 남한으로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유입은 곧 남한 교회와 교인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라고는 할 수 없고, 다만 남한 교회가 부흥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동기가 되었을 뿐이다.

 


3. 한국 동란 (1950-1952)

 


38선으로 인한 남북분단은 약소민족의 비운을 체험케 하는 사건이었으나 점차 민족을 이념적으로 분단시키는 방향으로 역사는 흘러갔다. 그리고 소련의 군사력에 기대고 있던 북한 공산당정권은 1950년 6월 25일 주일 아침에 무력으로 남한을 침공함으로써 비극적인 민족상잔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전쟁으로 많은 교회가 파손되고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으나, 전쟁에서도 살아 남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였다.

 


더욱이 한국 교회는 폭격의 잿더미 속에서 하나님께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고, 부산 피난 당시에는 천막 교회였지만 새벽마다 성도들의 기도소리는 뜨겁기만 하였다. 이 새벽기도가 있었기에 한국 교회는 살아 있었고, 성도들의 눈물은 이 민족 앞에 다시 큰 부흥의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더욱이 6 . 25 동란이 끝났을 때, 성도들은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사건이 생겼는데 그것은 전쟁 중에서도 교회는 더욱 부흥하고 성장하는 불가사의한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한국교회가 당한 영적 시험은 6 . 25 동란과 같은 전쟁의 고통이 아니었다. 동란이 끝난 후 외국의 구호물자가 유입되면서 교회는 내적 문제로 진통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신앙생활이 목적이 아니라 구호물자를 얻기 위해 교회에 출석하는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고,

 


둘째, 구호물자의 불공평한 분배는 교회의 내분을 불러왔으며,

 


셋째, 구호물자가 중단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물질적 욕구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던 신자들은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감으로써 교회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 때의 성장을 '밀가루 부흥'이라고도 한다.

 


구호물자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기구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관심을 갖게 하는 정도의 효과 외에는 별로 효과가 없다. 미국은 지금까지 많은 나라에 막대한 원조를 주었지만 그것으로 기독교 국가가 된 곳은 한 곳도 없다는 사실로도 이것은 입증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절대적인 신앙과 기도가 있어야 부흥되며, 전쟁과 가난 중에도 말씀이 충만하면 성장할 수 있으나 오히려 노력하지 않은 물질은 영적 성장의 장애요소가 될 뿐이다.

 


이런 사례를 예루살렘 교회가 초창기에 경험하였다.(행6:1-2).

 


5. 제2 도약기(1950-1985)

 

 

 

1. 교회 재건 (1953 - 1960)

 


전후 월남한 교인들에 의하여 교회가 곳곳에 세워지면서 서울과 남한 일대는 교회적으로 지각 변동이 일어난다. 많은 교회가 도처에 세워지면서 과거 서북지방에서 부흥의 횃불을 올렸던 기세로 부흥의 불길이 번져간 것이다. 이 때 월남한 목회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전도를 하였고, 선교사들도 기동성 있게 움직였다.

 


이때의 부흥의 모습을 도표를 통하여 보도록 한다. 이 통계는 한국의 주요 개신교 교회(장로교 . 감리교 . 성결교 . 침례교)의 세례교인 수이다.

 


 

 


<도표 12> (서명원, 앞의 책, 289쪽)

 


연도 장로교인 수 전체교인 수 비고

 


1952년 231,473명 261,664명

 


1953년 250,000명 307,388명

 


1954년 103,594명 151,894명 감리교 누락

 


1955년 - 75,232명 장로교 누락

 


1956년 - 121,752명 장로교 누락

 


1957년 550,853명 783,079명 장로교 통계 불확실

 


1958년 110,788명 224,563명 침례교 통계 포함됨

 


 

 


이상의 그래프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짚어본다.

 


첫 번째, 1955년과 1956년의 교인의 수가 급격하게 떨어졌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의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여 통계를 집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더욱이 장로교의 통계가 누락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한국에서 장로교의 교세는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1957년과 1958년의 통계의 급격한 변화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이 통계를 제공한 서명원은 1950년대의 장로교의 분열에 기인한 것이라고 논평하고 있다. 즉 분열된 교회들은 이전의 교인 수를 자신들의 교인수로 보고하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세 번째, 매우 신빙성이 있는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45년의 교인의 수를 382,800명으로 추산하였고, 1955년의 교인 수를 1,324,258명이라고 하였다.

( 한영재. <기독교대연감>. 서울: 기독교문사. 1986. 696쪽.)

 


10년 사이에 무려 3배에 가까운 성장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 통계가 신빙성을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 어느 통계를 보든지 한국 교회는 6 . 25의 전란과 폐허, 그리고 극심한 빈곤과 교회의 분열 속에서도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계속적인 성장 원인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첫째, 한국을 공산군의 세력에서 지켜준 미국이 기독교 국가였고, 한국 초대 대통령과 장관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도 기독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의 파괴는 새로운 질서를 창건하는 요인이 되었고, 이런 것은 정신적인 면에도 작용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원인이 되었다.

 


셋째, 동란이 끝나면서 외국의 각 교파들이 선교사를 파송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남침례회가 그런 예라고 한다.(서명원. 앞의 책. 266쪽).

 


그러나 필자는 이 때의 부흥의 원인으로 동란시 한국 교인들의 뜨거운 기도를 첫 번째로 열거한다. 기도 없이 교회는 부흥될 수 없고, 기도 없는 부흥은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북한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월남하여 각처에 교회를 개척하고 헌신적으로 전도한 결과이다.

 


세 번째는 전쟁으로 인하여 심령이 모두 허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았고, 이들에게 주님은 성령의 강한 역사를 체험하게 한 것이다. 주님은 과거에도 독립을 염원하여 피를 흘린 대가를 영적 은총으로 채워주시면서 교회를 부흥시킨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이때에도 주님은 영적인 은총을 내리신 것이다.

 


네 번째는 이때 주로 사용된 전도 방법은 개인전도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이웃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6 . 25 동란 이후의 부흥은 영적인 부흥이었고,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라고 평가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통계의 그래프 상으로는 잠시 침체하는 하강 곡선을 그리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다음에는 다시 크게 반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교회가 침체되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당시 한국의 상황이 혼란하여 정확한 통계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김양선목사는 1955년의 부흥을 평가하기를 "영적으로 부흥한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6 . 25이전보다 교회와 교인 수가 배로 증가하였다"고 하였다.( 김양선, 앞의 책).

 


2. 교회의 분열

 


이 때에 한국 교회는 또 다른 진통을 겪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의 분열이다. 한국 교회가 분열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신사참배 문제이다. 신사참배의 후유증은 광복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1951년에 장로교단에는 제 1차 분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1954년에 또 다시 총회가 분열되었고, 1959년에는 '에큐메니칼파'와 '보수파'의 분열이 다시 발생한다.

 


마포삼낙(Dr. Samuel Hugh Moffett)은 1961년을 기점으로 분열된 장로교의 통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도표 13> 교단별 교인 대비표

 


통합측 375,000명

 


합동측 220,000명 (1951년과 1959년에 분열)

 


기장측 114,000명 (1954년에 분열)

 


고신측 66,000명

 


혹자는 교회의 분열이 성장에 기여한 점도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즉, 분열된 2개의 교회 혹은 교단은 서로를 의식하면서 경쟁적으로 전도를 하였기 때문에 부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과 분쟁은 교회 밖의 불신자에게 교회에 대한 회의와 실망, 그리고 환멸을 가중시켰고, 결과적으로 불신자를 교회 안으로 인도하는데 최대의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교회의 내적 분열과 진통은 장로교만이 아니라 감리교에도 있었으나 다행히 내적 시련으로 끝을 맺음으로 분열은 없었고, 꾸준한 성장을 가진 반면, 성결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는 6 . 25 동란 후에 많은 성장세를 보였으나 1961년에서 63년까지 2년간 분열의 진통을 겪으면서 타격을 받는다.

 


이제 장로교회의 교단별 교세 신장을 도표로 제시한다.

 


<도표 14> 장로교 교단별 교인 증가 현황

 


예장 통합 예장 합동 예장 고신 기장

 


1961년 375,000명 220,000명 66,000명 114,000명

 


1970년 504,728명 530,600명 64,209명 194,794명

 


1979년 968,402명 1,090,309명 183,488명 212,044명

 


이 그래프는 많은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첫째, 고신측과 기장측은 분열 당시에도 미약한 교세였으나 그후에도 여전히 미약한 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교단의 특징은 모두 극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신측은 강한 신앙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에 기장측은 자유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한국의 교인들은 극단보다는 중도적인 신앙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통합측은 분열 당시는 최대의 교세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합동측에 압도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역시 신앙 노선의 차이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통합측은 외국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분열 당시는 여러 가지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으나 한국 교회가 초창기부터 중요시하였던 자주성의 상실이 문제로 작용하였고, 신앙노선이 자유주의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 침체의 원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반면 합동측은 선교사의 지원이 없어 처음에는 애로사항이 많았으나 후에는 자급 자족하면서 오히려 더욱 큰 힘을 얻게 된 것이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음은 개혁주의 신앙노선을 끝까지 보수한 것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인의 성향은 자유보다 보수적인 경향이 농후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믿는 신앙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말씀을 고수하는 교단이 부흥하게 된 것이다.

 


3. 60년대 이후의 부흥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의 부흥에 대하여 경이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계속 성장해 오기는 하였으나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제가 부흥되고 대형 교회가 세워지면서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한국 교회 자체는 진통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먼저 사회적인 여건이 그러하였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세워졌으나, 뚜렷한 역사의식의 결여 때문에 정권유지에만 몰두하였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차질을 빚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우국지사들은 외면을 당하고,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의 추종자들이 참정권을 얻음으로써 일제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이 때부터 대한민국의 역사는 왜곡되기 시작하였고, 정권 말기에는 부패와 불법으로 4 . 19 학생 봉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 후에 정권을 인수한 민주당 정권은 당내 내분과 정치역량의 부족으로 뚜렷한 정치 방향을 잡지 못하였고, 일반 민중은 집단행동으로 자기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그릇된 인식으로 초등학생들까지 데모를 하는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 결과로 5 . 16 군사 쿠데타를 유발하게 되었고, 겨우 싹 트기 시작한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군사 독재에 유린되고 말았다. 이들 군인 집단은 경제 개발을 최대의 정치 이슈로 삼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경제가 부흥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런 사회적 혼란기를 이용하여 기독교계는 많은 이단 운동들이 유입되었는데, 그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이 용문산에서 기도원 운동을 하던 나운몽의 신비주의적 대중집회였다. 그리고 그와 보조를 같이 하던 박태선이 독자적으로 대중집회를 시작하면서 결국 자신이 감람나무가 되는 웃기는 일을 자행하였고 신학을 기초한 신앙의 정립이 안된 무분별한 기성 교회와 교인들은 신비주의 운동의 거센 바람에 강타를 당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이 에큐메니칼운동을 등에 업고 기세를 올리게 되었고, 오순절 교회의 성령운동과 은사운동도 역시 한 몫을 하면서 한국 교회는 신학적 혼란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이비 신학교와 기도원의 난립으로 목회자들의 지적 수준도 저하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기복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60년대 이후의 한국 교회는 신학적인 순수함을 상실한 채 신앙 노선 상으로 어려운 국면을 겪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바라는 운동도 없지 않았다. 즉 미국의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도 집회, Explo 74로 일려진 대중전도운동 등 성장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도 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회 성장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는데,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었는가? 교회에 유입된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미신적인 사고와 세속적인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는 없었을까? 우선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이유부터 찾아보도록 한다.

 


첫 번째, 신비주의 운동도 부흥에 한 몫을 하였다. 저들은 올바른 신앙을 공급하지는 못하였지만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일조를 한 것만은 사실로 인정하여야 한다.

 


두 번째, 오순절 교회의 성령운동과 은사운동이 정통적인 기독교와는 많은 부분에서 거리가 멀지만 수적인 부흥을 일으키는데는 일조를 하였다고 인정하여야 한다.

 


세 번째, 사회의 경제적인 발전이다. 우선 이 과정에서 많은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고, 이로 인하여 도시에는 대형 교회가 생겼고,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영적인 필요보다 현실적인 성공과 풍요에 기대를 걸고 교회를 찾는 사람이 늘어났고, 이것 또한 수적으로 성장을 가속화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네 번째, 기성 교회들의 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신흥 교파들의 성장을 보면서 기성 교단들도 각성하여 전도를 하였고,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주력을 한 것이다.

 


다섯 번째,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은사운동이나 신비주의 운동의 허점을 알게 되었고, 한국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인 성경 교육을 장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양적인 성장만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던 교회들이 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수적으로 성장하던 교회가 차츰 질적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건실한 신앙생활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본 논문에서 주로 취급한 통계가 세례 교인을 기준으로 한 이유는 그래도 세례를 받고 신앙 고백을 하여야 신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1,200만 명이란 수를 발표하였는데, 이 수는 세례교인의 수는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진정으로 부흥이 되었는가, 아니면 물량적으로 팽창한 것인가? 이것을 이제는 가려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6. 침체기(1992- )

 

 

 

6. 침체기와 그 진단 (1992- )

 


성장일로에 있었던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추기 시작하였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기도의 열기는 식었고, 전도의 열기도 식어가고 있다. 교인들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세상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고, 생활의 여유와 함께 신앙의 열기 대신에 세상적인 오락과 여가를 즐기는 쪽으로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양식 있는 목사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던 교회의 공동화 현상은 점차 눈앞에 다가오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21세기를 예비하는 한국 교회의 지상과제가 될 것이다. 이제 최근의 통계, 곧 교인 증가가 현저하게 둔화된 도표를 제공하면서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과제를 숙제로 제공한다.

 


<도표 15>

 


연도 교인증가 수

 


1993년 200만명

 


1994년 210만명

 


1995년 400명

 


7. 맺는 말

 


필자는 한국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구령(救靈)에 대한 뜨거운 사명감과 열정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명감의 출처는 <네비우스 정책>도, 종교심이나 역사적 환경도 아니라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인간편의 조건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성경을 근거한 신앙이다. 하나님은 제도화된 기독교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순수한 복음을 먼저 주셨고, 신앙을 가진 후에도 열렬하게 성경을 읽고 공부하였다.

 


둘째는 열심 있는 기도이다. 새벽기도는 세계 어느 국가에도 없는 교회제도이며, 새벽기도의 부흥은 곧 교회의 부흥으로 목사들은 확신하고 있다.

 


셋째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런 구원의 기쁨을 다른 형제들에게 전하려는 열의로 가득한 것이 초대 한국 교회 신자들이었다. 이런 사명감 때문에 저들은 자진하여 복음을 전했으며, 이런 신앙적인 열정은 결국 오늘의 한국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한국 교회가 사회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오늘의 일이 아니다. 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산업사회로 전환되었고, 많은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면서 도시 교회들이 대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목회자들은 영적인 부흥보다는 물량적인 성장과 거대하고 화려한 예배당 건물에 신경을 쏟기 시작하면서 목회 성공의 기준도 교인의 수와 헌금의 액수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목회자들의 의식구조가 물량적이며 세속 방향으로 변화되니 자연적으로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도 변질되었고, 그 메시지를 받는 성도들의 의식도 물량주의, 상업주의로 바뀌게 되었고, 현실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기복 신앙 형태로 변질해 버린 것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한 교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교회 안에 머물면서 축복을 탄원하였지만, 경제성장과 함께 생활에 여유가 생기니 교회 안에 머물면서 영적인 평안으로 만족하기보다는 향락주의적인 삶에 차츰 물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세상맛을 체험한 교인들은 좀처럼 경건한 삶을 살게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한국의 고유한 가치관과 기독교적인 가치관은 사라지고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적인 가치관이 팽배해졌고, 세상과 교회의 선이 명확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서 한국 교회의 침체 원인을 다음과 같이 규명하는 분이 있다(이상규 박사).

 


첫째, 경제 성장과 함께 종교적 갈망이 쇠퇴해진 결과이며,

 


둘째, 자동차의 보급으로 여가 문화가 발달하였고 이런 사회 풍조에 교인들도 동화되었기 때문이며,

 


셋째, 기성 교회의 영적 . 도덕적 윤리적 권위가 상실되어 세상과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며,

 


넷째, 이단들의 활동 때문에 당하는 부정적인 영향들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오늘을 진단하는 경우도 있다.

 


첫째, 기복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생활 수준의 향상과 함께 기도의 제목이 사라진 것이 침체의 원인이고,

 


둘째, 물질적이며 향락주의적으로 의식구조가 바뀌면서 도덕적인 기준이 모호해졌고, 이것은 죄의식의 결여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단적인 예가 대형의 부정 부패사건에 기독교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십자가의 의미가 희석된 것인데, 십자가는 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는 불응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나는 평안을 누려야 한다는 기독교 본질의 왜곡 현상이 나타나면서, 희생적인 삶의 정신을 희석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겸하여 젊은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정인경 목사).

 


첫째, 신앙의 본질이 교회에 전수되지 않았고,

 


둘째, 괴물 같은 영성에 환멸을 느꼈고,

 


셋째, 예배의 경건성이 상실되었고,

 


넷째, 정직한 대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모든 말은 현실을 진단하는 말들이다.

 


이제 필자가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오늘을 진단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1,200만이라는 기독교인의 수는 진실한 것이며, 이들은 모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인가?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한 후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유입될 때, 그들 중에는 이교적인 사고와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기독교의 옷만 갈아입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이것은 중세 교회를 타락하게 하였던 것처럼 지금 한국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 중에는 이교적인 생각과 생활을 그대로 가지고 겉모양만 기독교인이 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몇%나 될까? 겉모양만 바꾼 신자들이 있는 한 한국 교회의 부흥은 거품부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한국의 종교인구의 총수는 한국의 인구보다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종교 단체는 자신들의 신도 수를 실제보다 더 많게 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승하던 성장의 그래프가 둔화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런 이유에서 그래프가 둔화되었다면 크게 염려할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수적인 침체의 곡선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자체 정화 작업을 지금 이루어 가고 있고, 이런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추수 때에 곳간에 들여지는 것은 알곡이지 쭉정이는 아니다.

 


둘째,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의식 때문에 전도를 통하여 세상에서 유입되기만을 바라고 있었고, 사회를 향한 향도의 역할을 해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숫자에 자만하지 말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을 역사는 바라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그런 사명을 감당할 때 재도약의 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셋째, 과거 한국 교회가 성장하던 그런 놀라운 성장의 역사가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 일고 있는 선교의 열기는, 한국 교회는 수입하는 교회에서 선교로 돕는 교회로 성숙해지기를 원하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한국 교회는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깊으신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겸허함이 있었으면 한다. 이것이 21세기를 맞는 우리의 자세요, 성숙한 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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