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스크랩] 기초신앙을 위한 훈련 교재

수호천사1 2014. 7. 30. 12:33

 

기초신앙을 위한 훈련 교재

 

 

 

 

 

 

 


이 교재는 가장 기초적인 신앙훈련을 위해 사용하면 좋습니다.

 

 

제 1 장. 지금 내 신앙의 모습은?

1. 지난 일주일의 삶을 돌아보며, 내가 매주 하는 신앙행위(생활)들을 적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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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이 일들을 왜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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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는 많은 기독교인이 있다. 하지만 그 많은 기독교인이 전부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도덕적이고 선한 교훈을 듣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 친구 따라 교회에 한 두번 왔다가 교회 분위기나 사람들이 좋아서 계속 교회에 나오는 사람,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종교를 하나씩 갖고 있기에 나도 종교를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세상 많은 종교들 중에서 기독교를 택한 사람, 사업, 장사, 정치 같은 세상 일을 하는데 '집사'나 '장로'등의 칭호가 있으면 이익이 될 것 같아 교회에 나오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와는 상관 없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단순한 종교인일 뿐이다. 혹시 나는 그런 종교인은 아닌가? 나의 한 친구가 자기의 종교는 '불교'라고하고 또 다른 한 친구는 '유교'라고 하듯이 나도 '기독교'라고 불리우는 세상 여러 종교 중의 하나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3.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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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질문에 당신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단순한 종교인은 무엇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무엇인지 사도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며 나의 신앙상태를 점검해보자. 


단순한 종교인 => 죽은 신앙

그리스도를 알기전에 바울(사울)은 유대인의 랍비(선생)였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유대교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였던 바리새파 사람이었다.(빌3: 5) 그는 유대의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로서 유대 율법에 통달한 사람이었고 종교적 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행 22: 3) 그러나 그러한 율법과 그의 종교 생활은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살아있는 만남)를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그의 종교적인 열심은 실제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에 사용되었다.(행 9:1 2, 빌 3: 6)

이처럼 '죽은 신앙', '단순한 종교인'이란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바울처럼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게 무미건조한 교리나 신조에 바탕을 둔 신앙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종교인에 대하여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으로 비유하시며 교훈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가스펠) 일을 열심히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도 단순한 종교인에 지나지 않으며 교회에서의 우리의 열심은 바울의 경우처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에 사용 되어질 수도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 살아있는 신앙

그러나 바울(사울)이 대제사장으로 부터 성도들을 잡을 권한을 위임 받고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갈때, 바울의 가는 그 길목에서 예수님은 바울을 먼저 찾아오셨다.(행 9)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교리, 신조에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가지는 것이고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이다. 그렇다고 교리나 신조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 크리스마스면 새벽송을 돌고, 부활절이면 삶은 달걀을 먹으며, 또 고난 주간이 되면 평소보다 조금 더 금욕적이 되고..... ]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식사때면 기도를하고, 주일이면 교회에 가는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적 행위의 반복이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일 보다는 자신앞에 놓인 종교적인 업무에 매여 그 일들을 무의미하게 반복하고 있다.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다시 한번 살펴보자.



제 2 장. '복음(Gospel)'이란 무엇인가?


믿는 이들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 이고, 모든 교회의 슬로건 역시 세상의 복음화 이다.
그렇다면 '복음(Gospel)'이란 무엇인가?


1. 나는 복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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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롬 1: 2)은 복음을 무엇이라 이야기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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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의 말씀(롬 1: 2)에서 '그의 아들'이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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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것(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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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포함한다. 실제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된 내용들과 성취된 부분들을 하나 하나 주의 깊게 확인해보자.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의 무거운 짐은 벗겨졌다. 내가 너를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왔으며 나는 너의 죄, 너의 불완전함을 인하여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에서 부활했으며 세상 마지막 날에 나는 다시 올 것이다. 너는 이 사실을 믿으면 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제 3 장.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가?


1. 만약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의 신앙에 어떤 학점을 주겠는가? (아래 학점 중에서 하나를 택해 표시해 보자.)


A B C D

2. 롬 1: 18-32을 읽고 여기에 기록된 인간의 모습에 무엇을 느꼈나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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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들에게는 어떤 학점을 주겠는가?


+ + + +

혹시, 롬 1: 18-32을 읽고 "나는 저들처럼 타락하지 않았어, 나와는 별 상관이 없을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교회를 다니는 나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착해야 할 것 같아서 길에서 만나는 걸인들에게 백원짜리 하나라도 꼭 던져주고 그런 내 자신의 모습 속에서 '나는 그래도 이만큼 착하다' 하며 위안을 얻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아는 마음이 없다면 그들은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다. 시험볼 때 컨닝을 하는 사람, 앞 못보는 걸인의 깡통을 차버리는 심술 궂은 사람과 비교해서 그래도 나는 뭔가 다를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들은 '자신이 죄인이며 추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아무개보다는 배나 선량한걸... 나는 비교적 선하고 도덕적으로 살아가는데..." 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나를 향하여 앞서 이야기한 롬 1: 18-32 의 타락한 인간들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로마서 2장 1절) 이 말은 아마도 바울 자신을 향한 고백일수 도 있다.


2. 롬 2: 1-16을 읽고 그 느낌을 다시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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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기 전까지는 바울은 악한 세상을 경멸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속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일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러한 참된 자기 성찰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3.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가? (롬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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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여 꽤 선한 편에 속한다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두 남들에게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은밀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계속 가면을 만들어 쓰면서 선한 사람인양 나타내 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의지하는 일 보다는 종교적인 계율을 앞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계율들은 우리들을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들로 만들뿐이다.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예수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마음을 닫고 있는 탓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종교라는 거짓된 게임을 보고있기 때문이다.(롬2:23,24)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학점과 같은 어떠한 등급도 메기시지 않는다. 전등은 형광등인지 찬란한 오색등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류가 흘러서 불이 들어오는 것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누구의 삶이 더 화려하고 도덕적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받아서 그 빛을 발하는가 아닌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야구선수에는 3할 대를 치는 훌륭한 선수가 있는 가하면 1할 대의 저조한 선수도 있다. 하지만 100타수 100안타의 10할의 타율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10할의 타율을 요구하신다. 어떠한 사람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3할 대의 훌륭한 선수라고 할지라도 3번 타석에 들어서면 2번은 아웃을 당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우두커니 서서 삼진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고 간혹 2루타 정도를 치고 기뻐하는 모습을...]



제 4 장. 왜 중생(거듭남)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


교회란 중생한 사람들이 모이는 거룩한 사회이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기독교인은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인, 흰두교인 등과 마찬가지로 세상 여러 종교 중의 하나인 '기독교'라는 종파의 교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거듭남이란 필수 조건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창1: 27) 따라서 창조 당시의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었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함(창 3)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회복하고 끊어진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거듭남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단 한가지 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거듭남이다.


1. 거듭난다는 뜻은 무엇인가? (요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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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다는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난다는 뜻이다.(요 1:13)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이다.

내가 로보트를 만들었다고 해서 로보트가 내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아들은 나의 생명(씨)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2. 하나님의 생명은 무엇인가? (요 1: 4-5, 요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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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된다.

 


제 5장 : 나는 구원(거듭남)을 받았는가?

위의 질문은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가?' 또는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가?' 등의 질문과 동일하다.(제4장 참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제를 어렵게 생각하고 있다. 교회를 수년간 다닌 사람들, 매 주일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은 이세상의 어떤 일 보다도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문제들을 해결해 가며 구원에 관한 자신을 갖도록 하자.

1. 성경은 어떤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가? (요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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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자가 상의 강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눅 23 : 39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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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출애굽시의 첫 유월절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성도들의 영적 구원을 예표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처음난 것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하면 그 집에는 무서운 재앙이 그냥 지나가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재앙의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하지만 각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을 것이다. 시키는 대로 문설주와 인방에 피는 발라 놓았지만 정말 재앙이 그냥 지나갈 것인가 불안해 떠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 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은 집은 어떤 집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출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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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분명히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에는 재앙을 피해가게 하셨다. 집안의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두려워 떨었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의 구원을 기뻐 찬양하였건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이면 구원해 주셨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날마다 기뻐하며 찬양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은 했지만 누군가가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왠지 선듯 대답할 자신이 없는가?

나의 모습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구원하셨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 질문에 언듯 대답을 못하는 성도들을 미혹하는 무리들이 있다.(ex: 권신찬의 '구원파') 그러나 우리가 육신이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났는지 기억을 못하는 것처럼 거듭날 때도 우리가 어떻게 거듭났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지 우리 속의 영이 성령에 의하여 변화되어서 현재 내 삶 속에서 나의 인격에 변화가 있는 것을 볼뿐이다.(내 몸이 존재하는 것을 보아 내가 태어난 것을 아는 것처럼...)

물론 어떤 한 순간의 특별한 체험이나 감정의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중생과 필연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제 6 장. 중생한 사람의 죄의식


구원(중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복음의 내용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중생 후에도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죄를 안 지으려고 하지만, 결국 또 죄를 짖고.. 그리고는 다시 회개하고... 이러한 행동을 계속 반복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며 '나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다.

또, "오늘은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 결심 했다가도 갑자기 나타나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달콤한 유혹들 앞에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래서는 안돼 이건 좋은 일이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애를 써보아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나는 정말 왜 이럴까?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왜 이런 문제들을 과감히 쳐부수지 못할까?"

우리는 죄인 된 모습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왔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다. 그러나 죄를 좋아하는 옛 성품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안에 계속 존재하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새 성품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갈등을 겪게 된다.

위대한 신앙의 용장 바울도 로마서 7장15절 이하에 이와 똑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사탄은 항상 성도들의 죄를 일깨움으로서 성도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고 한다.

"네가 감히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 너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이러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느냐? 그런 네가 어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설쳐댈 수 있느냐 ?"

1. 이런 사탄 앞에 당신은 지금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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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마서 3: 24, 8: 1-2 과 8: 31-39 를 읽고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답해보자. (롬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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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의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칭의(稱義)란 받을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선물)다. 이처럼 '칭의'란 자기의 힘으로는 의로워 질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을 누가 의롭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성도의 구원은 영원 전부터 계획되었고 정해진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훼방 세력에 의해서도 파기되거나 변경되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우리의 죄 값이 모두 지불됨은 물론, 그 범죄의 사실도 모두 깨끗이 지워진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도 사하여 주셨다.

그리스도 인들은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에게서 죄의 권세가 제하여 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한 자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가? 문제는 당신이 당신의 죄된 습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혼자 계속해서 죄의 습성과 싸우기를 원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리스도는 폭력으로 당신의 생애에 들어오시지는 않는다. 당신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 당신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의 로보트도 아니다. 모든 자극과 유혹에 둔감한 프라스틱 덮개로 덮힌 로보트가 아니다. 그리스도 인에게도 죄의 유혹은 여전히 있다. 과거에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죄를 범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성화)에는 세 가지가 있다.

지위의 성화,
경험의 성화,
궁극적인 성화가 그것이다.

지위의 성화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라는 의미에서 성화 된 자라고 말할 때의 성화를 의미한다. 궁극적인 성화는 환전한 성화로 하늘 나라에서의 영생의 단계 즉, 예수님이 오실때 입게 되는 영화를 의미한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험의 성화이다. 경험의 성화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죄에 대해 승리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제 7 장. 중생한 사람의 삶


1. 중생한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갈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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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한 사람은 성화되어지는 삶을 살아야한다.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음으로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함을 명심하자.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육에서 난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 7 8)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자기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길 때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자동차에 비유해 보자. 내 인생의 자동차에는 예수님이 타고 계신가? 예수님을 태우지 않고 나혼자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가? 내 자동차에 예수님이 타셨다면 과연 어느 좌석에 타셨는가? 혹시 예수님을 트렁크 속에 태우고 내 인생에서 아무런 역활도 못하시게 하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조수석에 앉히고 "예수님 제가 운전하다 졸면 잠도 깨워주시고 힘들어 할 때면 격려도 해주세요!" 라고 예수님께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조수석에서 나의 운전하는 모습을 지켜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자, 이제 잠시 내 인생의 자동차를 멈추고 예수님께 자동차의 핸들을 맞기고 나는 조수석으로 물러 앉아 보라. 나의 인생의 자동차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무사고를 기록할 것이다.



제 8 장. 믿음을 통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자들에게는 영생이 보장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어떤 믿지 않는 이들은 '기독교는 현실과는 관계없는 미래에 대한 허황 된 약속이고, 기독교인들은 지옥 불을 피하기 위한 화재보험 증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다'라고 비난을 한다.

1. 이 비난에 대해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기독교는 영생에 대한보장을 해주는 것 말고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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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믿음에는 구원이라는 궁극적인 것 이외에도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 실제적인 결과가 따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도 이 실제적인 결과들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면 이 실제적인 결과들이 무엇인가 살펴보도록 하자.


2. 인간들이 그들의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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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은 행복, 확신, 평화, 사랑, 안전, 성취, 희망 등등 이다. 모두 표현 하는 언어는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3. 그리스도인이 얻는 첫번째 (롬 5 : 1-2 새번역, 공동번역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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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얻어서 이것을 기쁨으로 경험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칭의'후 얻는 체험의 출발점이며 필연적인 결과이다.

4. 그리스도인이 얻는 두번째 (롬 5: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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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지켜 주시는 것을 안다.(롬 5: 8)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인들은 평안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혀도 기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문제들이 우리에게 인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고(롬 5:3-4) 그 문제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 대해 당신은 아마 아래와 같이 반문할 지도 모른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어디에 있는가? 나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좌절하는데... 나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 직장을 구하기 위해, 마침내 맡은 일을 끝내기 위해 기도도 해보지만 나의 소원대로 되어지지만은 않는데..."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좋지 않은 어떤 일에 부딪히더라도 결국은 잘 해결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롬 5: 8) 이것은 마치 녹화해 놓은 스포츠 중계를 보는 것과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팀이 이겼다'는 라디오 뉴스를 전해들었다면, 집에 돌아와서 녹화해 놓은 경기를 시청할 때는 우리 팀이 초반부터 처참할 정도로 지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걱정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라디오 뉴스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우리는 현재의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그러면 현재의 어려움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5. 녹화해 놓은 경기를 볼 때 우리 팀이 위기에 처해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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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나운서의 말을 믿고 잠잠히 TV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우리들이할 일은 없다. 그러면 곧 우리는 엄청난 역전극을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해야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령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 지고있는 경기의 상황이 보기 싫다고 TV를 꺼버리고 허탈해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경기를 시청하면서 라디오 뉴스의 보도가 어떻게 현실화되는지를 예의 주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그 어려움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게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6. 당신은 하박국 선지의 찬송에 무엇을 느끼는가? (합 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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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세상적인 축복을 받는 것만을 강조하며 고난이나 십자가를 도외시하고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아니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인 조건에 집착하여서 "하나님 xx를 주십시오! " 하며 하나님께 매달린다. 하지만 우리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욕심을 채우기 위한 세상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겠다. 다시 말해서 '그러므로 감사한다'가 아니라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감사한다'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7. 그리스도인이 얻는 세번째(롬 5: 8, 11, 8: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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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안다.(롬 8: 32) 자기 아들을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실 정도로 사랑하신 이가 그보다 못한 것은 얼마든지 나에게 주실 것을 안다. 또 그 사랑으로 지금도 나를 보호하고 계심을 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롬 5: 11,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처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뻐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제 9 장. 과연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가?


1. 롬 8: 28의 말씀을 아래에 적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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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그리스도 인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악조건을 자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투적인 말은 아닌가?

2. 나는 롬 8: 28 말씀에 대해 평소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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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의 '모든 것'이라는 귀절 대신 현재 나의 고민, 문제들을 넣어 읽어보자. 또 반대로 나의 좋은 일, 기쁜 일을 넣어 읽어보자. 정말로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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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전제 조건을 포함하고있다. 로마서 8장 28절을 전반부에 주의하여 다시 한번 읽어보자.

'모든 사람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었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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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 될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가 쉽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대신 자포자기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인생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역경과 고난은 우리가 그런 환경 속에서도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좋은 시험이다.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들이 놓이는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불의의 사고, 고난, 좌절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지' 하고 결심을 한다. 그러나 곧 실망한다.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담!' 하며 자신에 대해 유감을 느끼고 '아무도 나를 도와줄 이가 없다.' 며 실망하고 비관한다. 그리고는 곧 '나라고 뭐 별수있나!' 하며 비관에서 체념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내가 곤경에서 위로해줄 사람을 필요로 할 때 그리스도는 나를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신뢰로 응답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도우시려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의 약점과 문제점들과 죄악을 하나 하나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우리들을 다듬으시기 위해 여러 가지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또, 우리들 각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계획이 모두 다르기에 우리들이 처하는 상황과 처지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데 있다.



제 10 장.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유일한 법


1.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유일한 법(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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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고(롬 13: 10),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유일한 법은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법이 정하는 테두리 안에서의 정당한 행동보다도 더 위대한 것을 추구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남을 생각하고 고려하는 사랑의 법이다.

2. 나는 내 안에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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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았고 거듭났다. 나는 내가 하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안다. 나는 주일이면 교회 봉사도 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성탄 카드에 성경 구절을 적어 보내기도 한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 또,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 나는 .... 하지만, 나의 심리작용은 언제나 제일 먼저 나 자신에 대해 염려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3. 그러면 사랑은 무엇인가? (마 22: 39, 롬 12: 9, cf.고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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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타인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남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내가 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내게서 받은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라." 이것이 우리 선생님이신 예수님의 원리이다. 내 실속부터 다 차리고 나서 남을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들 중 많은 부분들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다. 사랑을 입에 담는 내가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이 '인척 가장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한다.

또,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한다. 이것은 악을 회피하고 방관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선하게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도 많은 죄와 악에 둘러 싸여 있기에 쉽사리 그 상황에 익숙해져 버리고 무디어진다. '나는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으며, 곧 그것들과 타협을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법을 배우게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피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선을 위해서 살기는 하지만 선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진정으로 고백을 하는가? 또 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고 고백을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그러한 고백은 이기심 없는 순수하고 실제적인 사랑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이기심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권리 청원서를 들고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내 주위에 그런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때문에 '왜 내가 먼저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런 사랑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또 내가 그런 사랑을 하기 시작하면 사회적으로 많은 것들을 잃을 수도 있다. 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정도에 따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실제 행동에서 그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제 11 장. 내가 아주 잘하는 짓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많이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것들을 읽고 느낌을 서로 이야기해 보자.

"그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남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는데, 그 여자는 좀........."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것 같아 !"

1. 나는 언어속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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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에는 각양각색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나는 위와 같은 종류의 말들을 해왔고 또, 내 자신도 그러한 말들을 들어왔다.

위의 말들의 형식을 빌리면 우리는 자신은 거룩해 지면서 교묘하게 남을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이라는 문구에서 당신은 무엇을 느끼는가? 물론 이 말이 좋게 사용될 때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말 그 사람을 세워주고(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그의 잘못된 형식을 지적한 후(하지만....)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가 그런 부분은 우리도 함께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를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부분은 이런 표현을 할 때 남을 판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는데, 그 여자는 좀........." 이 표현도 앞부분의 표현이 많은 경우 남을 판단하기 전에 판단하는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어구로 많이 사용된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 !" 이 말은 정말로 근사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잘 새겨 읽어보자. 하나님의 뜻을 가장하고 있지만, 분명히 이것은 내 생각이다.(내 생각으로는....)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켜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정말로 우리가 피해야 할 일이다.




제 12 장.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우리는 생활 속에서 '어떤 것은 어떻게 해야 되며, 어떤 것은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하는 많은 문제들을 직면한다. 그런 우리들에게 로마서 14장 1절부터 12절은 우리의 행동윤리의 기본원리를 말해주고 있다. 로마서 14장 1절부터 12절까지를 읽어보자.

당시 로마 교회에는 유대교에서 개종한사람, 이방종교에서 개종한 사람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따라서 그런 이들에게 '이런 것은 해야 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많은 이견들이 있었다. 특히 '고기'의 문제는 그들에게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고기란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거리낌없이 고기를 먹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어떤 이들은 특별히 돼지고기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다.

또 '이교도가 제물로 사용한 후에 시장에 내다 파는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대한 논쟁은 상당히 까다롭게 제기되었다. 이교도의 제사에 사용된 고기는 제사 후 아주 싼 값으로 시장에 나왔고 또 제사에는 좋은 동물만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제사에 사용된 고기는 질도 좋고 맛도 좋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의 제사에 사용된 고기를 먹는 것은 생각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여겼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은 단지 나무, 돌의 조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 제물로 사용되었던 고기를 먹는데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

3. 이런 문제에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무엇인가? (롬 1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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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드리는 날짜에 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

4.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금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볼 때 내가 취할 태도는 무엇인가? (롬 1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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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금하여 행하지 않는 일들을 행하는 다른 형제를 보면 곧잘 '믿음이 연약한 형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을 '믿음이 연약한 형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행하는 그런 문제들로 인하여 내가 실족하고 걸려 넘어진다면 오히려 내가 더 '믿음이 없는 연약한 사람'일 수도 있다.

많은 형제들이 술과 담배에 관한 생각을 했으리라 생각을 한다. 술과 담배라는 문제로 우리는 형제 자매에 대해 서로 곧잘 판단한다. 또 술과 담배를 위의 구절들을 이용해 곧잘 합리화하기도 한다.

2. 나는 술과 담배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술과 담배에 거리낌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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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또한 한때 술과 담배에 관해서 관대하고 너그러운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다. 초대 교회의 고기 문제와 예배 드리는 날짜에 관한 문제(그 외의 여러 문제)는 위에서 살펴본 바울 사도의 이야기처럼 믿음대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더욱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때 술과 담배는 이들의 문제와는 좀더 다른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초대 교회의 고기 문제와는 별개로 술과 담배로부터 멀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술과 담배가 죄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술의 사용을 권한 것처럼(위장병을 위해) 이것들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술과 담배를 사용하는 주된 이유는 긴장의 해소, 세상 근심과 걱정의 해소, 울분과 기쁨의 표현, 괘락의 목적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크리스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술로서 그것들을 잊으려하고 긴장과 생활의 초조를 담배와 술이라는 세상적인 방법에 의존한다. 하지만 크리스챤들은 모든 일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처리해야 하기에 기쁜 일은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슬픈 일은 하나님께 아뢰며 신앙적인 방법으로 해결 해야한다.

따라서 신앙 인이라면 반드시 세상 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들로 문제들을 해결해 가야할 것이다.

 


제13 장. 형제, 자매에 대한 태도


1. 진실하라. 정직하고 솔직하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순수하라. 나를 경건한 사람인양 꾸미려 하는 '- - 인척' 하는 가면은 모두 벗어 버리라.

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당신이 동의 할 수 없는 습관이나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형제를 판단하거나 '믿음이 약한 형제'라고 부르지 말라.

3. 형제를 용납하라. "나는 그를 용납하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참을 수 없어." 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진정한 '용납'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들은 자의식에 따라 느끼고 좋아하고 판단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가치관이 바뀌고 입장이 달라지면 바뀌게 마련이다. 용납의 진정한 의미는 나의 가치 기준을 강요하지 않고 현재 있는 그대로 이 사람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으셨음을 기억하자.

4. 이해하라. 이해함이 없이 용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어불성설)이다. 이해함이란 평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이해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모든 것을 생각해 주는 것이다.



제 14장 :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모든 크리스챤들이 이러한 질문을 한다. 진지한 마음으로 혹은, 호기심으로..... 자신의 계획을 다 짜놓은 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묻기도 하고 매일 공식적으로 묻기도 한다. 또 하나님의 뜻을 종합 계획을 짜주시는 컴퓨터와 같이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동기와 그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따라다니는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라는 두 방향에서 생각해 볼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관한 문제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명이나 봉사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한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이다.

1.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지신 성품에 대한 보편적인 뜻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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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지신 사명과 봉사에 관한 개별적인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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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점차 변해가는 것을 원하신다. 따라서 나의 성품에 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사명(봉사)에 관한 개별적인 하나님의 뜻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봉사하려고 애쓰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섬김을 원하시기 이전에 우리가 진실로 그분의 것이라는 보장을 받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 즉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기를 더 원하신다.

무엇이 세상적이고 무엇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나 자신의 마음의 동기이다. '이일들 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허울 좋은 이유인가 아니면 실제적이고 참다운 동기인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란 말을 들을 만큼 행동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또 교회에서 '활동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행동하는 법도 쉽게 익힐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다.

3.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적어보자. (참고, 마 1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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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은 하기가 쉽다. 물론, 이 고백이 잘 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책임져 주신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어떠한가?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참된 안식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하나님은 나의 영혼만을 구원하시지는 않았다. 나의 손과 발과 귀를 포함한 나의 몸 전체를 구원하셨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육체로 행하는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대로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나의 성품이 변화되시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내가 나의 전체를 드려서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 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다.

우리의 몸을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일년에 한 두 번 특별한 때에 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드려야한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고 움직일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을 수 있고 당신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그 전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해 보라.

4. 로마서 12장 2절을 읽어보자. (참고, 고전 7:31, 갈 6:14, 딤후 2:4, 히 11:24 25, 요일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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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세상이 너를 그 틀에 넣어 찍어 내지 못하게 하라.'고 번역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항로를 잡을 수 있게 돕는 세 개의 불빛이 있다. 그것은

1)성경,
2)성령의 내적 증거 그리고
3)외적인 조건이다. 이 세 가지가 일치할 때 나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다 하나라도 일치하지 않을 때는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는 가장 근본적이며 일차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무시하고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뒷바침해 줄 성경 구절을 찾기 위해 성경을 뒤적이며 성경이 자기의 생각에 동의해 주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2)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성령을 쫓아 행할 때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필요할때 단추를 누르면 나오는 식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이어 우리는 외적인 상황들을 잘 살펴야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조각품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한다. 또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은 이러이러하실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모양을 만들어내어 주일만 되면 그 조각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일하시지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을 강제로 다스리시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데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지도자(순장)들의 자기 점검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고 모든 성경 해석의 촛점은 그리스도에게로 맡추어져야 함을 명심하자. 구약의 모든 사건들과 인물들은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위한 사건이고 등장 인물들이다. 또 구약의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모형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떠난 성경 해석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1. 자신이 중생(거듭남)했는지 확인하라.(요일 1: 12, 계 3: 20)
   자신의 중생의 확신없이 영적 지도를 할 수 없다. 소경이 길을 인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눅 23: 39 43)

2.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 가 확인하라.(시 66: 18)
   자신의 죄악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남을 지도할 수는 없다.

3. 지도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는 자세가 좋다.

4. 사랑(아가페)을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하라

세상적인 사랑(에로스: 이성간의 사랑, 스톨케: 친족간의 사랑, 휠리아: 친구간의 사랑)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후회가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 이러한 사랑은 우리 안에서는 저절로 생겨날 수 없으므로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5. 사랑과 봉사로 섬김에 대한 모범을 보이라.(요 13: 5, 눅 14: 10)

    윗권위, 아래권위 모두에게 섬김에 대한 모범을 보이라. 선배로서의 권위의식은 이제 버리고......

6. 불필요한 말과 사나운 농담을 삼가고 행동으로 감동시키고 생활로 영향을 미치라.
    말을 받는 이들이 영적 지도자의 모든 말을 농담으로 여겨 버리면 그 지도자는 영적인 지도를 할 수 없다.

7. 일을 하는 가운데 불평과 불만으로 하지 말고 항상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라.

8. 어린 자의 신앙을 탓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주어진 영혼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라.

   (요 2: 24-25)

9.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하라.(눅 11: 13)
    성령 충만 = 말씀 충만 = 예수 충만

10.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말고 보이지 않는 일에 역점을 두라.
     성령은 소리가 없고(요 3: 8) 사탄은 떠든다.(막 5: 5)

11. 자기에게 애정이나 존경이나 사랑을 모으려 하지말고 모든 것의 촛점을 그리스도께로 맞추라.(행 12: 23, 요 3: 30)
    자신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이 됨을 기억하자.

12. 나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절대 순종하고 존경하라.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므로 나의 윗 권위인 지도자들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자.(삼상 15: 22) 또, 나의 영적 지도자들은 나를 위해 항상 깨어서 기도함을 생각하고 그들의 권위에 순종하자.(히 13: 17)

13. 내 지식으로 감동 시키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믿고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두라. (히 4: 12)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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