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코스의 성경적 문제점
1. 알파코스의 요점.
영국의 성공회 신부들에 의해서 시작된 알파코스는 15년 정도 걸린 교정 작업 끝에 한국에까지 보급되었다.
만함이 예수, 성경, 기도, 확신을 가르치는 4주 코스를 만들었고(1976년), 어바인이 주말수양회(성령의 날)를 더해 10주 과정으로 확대한 것을(1981년) 니키 리가 체계화했고(1985년), 니키 검블이 15개 토크 주제로 알파코스를 완성했다(1990년). 언뜻 보면 알파코스의 요점은 ALPHA의 첫 글자 해설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Anyone can come),
“배움과 웃음”(Learning and Laughter),
“식사”(Pasta),
“상호도움”(Helping one another),
“질문”(Ask anything).
그러나 후에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사실 이런 해설에는 알파코스의 정체가 확연하게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과장된 포장이 있을 뿐 아니라(배움 같은), 게다가 많은 것(성령론 같은)이 감추어져 있다. 우선적으로 이 해설에서 드러나는 것은 초청을 통한 불신자전도, 식사를 통한 교제 상호도움이라는 수평적 관계이다.
2. 알파코스의 내용과 문제점.
알파코스가 무엇인지는 교과서처럼 중시되는 니키 검블의“알파 시작하기”(1998년, 영문은 1994년)에 명확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알파코스의 입문서로서 알파코스 운영 방법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 한 권만 읽어봐도 알파코스의 전모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1) 불신자 전도(능력전도)의 문제점.
검블의 설명을 따르자면 알파코스는 전도를 위한 구상으로서 그 주안점은 불신자 전도에 있다. 알파코스가 말하는 전도는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전도이며, 전도를 전 인격(머리와 마음과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능력전도(이적)에 중점을 둔다.
알파코스는 고전적 전도(말씀)와 총체적 전도(사역)를 인정하는 듯이 말하면서도 능력전도(이적)에 주력한다. 바로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11주 과정으로 진행되는 15개의 토크가 사용된다. 이 모든 과정의 정점은 중간쯤에 놓여있는 주말수양회이다.
금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주일 점심에 끝나는 주말수양회는 주로 성령교육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처음에는 토요일 오전에 성령의 정체와 성령의 활동에 관해 각각 간략하게 교육(토크)을 하고 저녁시간에 들어서면서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지 집회가 열린다. 이 집회는 사역시간이라고 불리는데 이때 불신자 전도를 위해 성령 충격요법이 도입된다.
검블은 알파코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진정한 알파코스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알파코스가 말하는 성령의 충격을 가져다주는 능력전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방언이다. 알파코스는 성령충만의 방법을 방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알파코스의 주말수양회에서 종종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
알파코스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방언을 받기를 간절히 구하는 까닭은 성경과 경험을 모두 다 비추어 보건데 방언은 사람들이 받는 최초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는 검블의 주장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며 동시에 비역사적인 주장이다.
성경과 경험은 현상적으로만 보아도 방언이 언제나 최초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의 실수는 자칫하면 성령의 은사를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데 있다.
관점을 바꾸어보면 성령의 은사는 어떤 것이든지 성령에게서 왔다는 점에서 이미 모두 초자연적이다. 게다가 이들의 주장은 마치 사람이 최초의 초자연적인 은사(알파코스의 말대로 하면 방언)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신자가 될 수 없다는 듯이 생각하게 만드는 오류를 저지른다.
성경과 경험이 증거하는 바를 따르자면 신자들 가운데는 알파코스가 말하는 최초의 초자연적인 은사(방언)를 가지지 않은 경우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따라서 마치 소위 최초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아야만 전도가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람을 오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방언 은사 체험을 극심하게 강조하는 알파코스의 주말수양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위적인 방법이 사용된다는 데 있다.
검블의 말을 따르면,“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가”라는 토크 끝에 자신이 성령을 초청하여 방언 은사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방언 은사가 내리기를 기도하겠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사람들에게 일어나서 눈을 감고 성령을 받기 원하면 손을 앞으로 내밀라고 요구한다. 그가 이렇게 요구하는 이유는 몸의 언어가 사람이 느끼는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물을 받을 때 손을 내미는 것처럼, 이렇게 내민 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성령을 받기를 원한다는 표시가 된다고 그는 믿는다.
우리는 이런 주장에 대하여 곧바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첫째는 사람에게 어떤 권위가 있기에 감히 성령을 초청하여 은사를 내리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성경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이런 포즈가 필요하다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방언 은사와 관련하여 알파코스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방언 은사를 받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인위적인 방법을 더 사용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알파코스는 방언을 말하기 위하여 자기최면을 강요한다.
알파코스는 방언을 말하고픈 사람은 입을 열고 모국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 외의 다른 말로 말하기를 시작하라고 강요한다. 이것은 솔직히 말해서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억지로(자의로) 아무렇게나 말하고는 방언이라고 생각하는 자기도취(최면)행위이다.
둘째로 알파코스는 사람들에게 방언 따라 하기를 강요한다.
알파코스는 사람들이 방언을 받도록 기도할 때 가장 큰 장애가 심리적인데 있다고 본다. 첫소리를 내는 순간이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이다.
알파코스는 일단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보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알파코스의 진행자는 이러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런 어려움을 설명한 다음에 자신이나 다른 기도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따라하는 것으로 시작해보라고 권한다. 그런 후에 진행자는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도록 천천히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알파코스의 이와 같은 방언 조작행위는 협동설에 의존하는 것 같은 치명적인 문제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알파코스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알파코스는 이것야말로 성경이 보여주는 사상이라고 강변한다.
2) 토크의 문제점.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알파코스에는 15개의 토크가 준비된다. 토크는 요점, 예화, 적용이라는 세 가지 형식을 띠면서 대략 45분 정도 소요된다. 토크는 주로 토의식(질의응답)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자주 참석자들은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토의를 좋아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알파코스에 의하면 토크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십자가에 달리심을 말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알파코스는 하나님과의 관계란 회개와 믿음과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을 받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은사적 체험을 가리킨다.
바로 여기에서 알파코스의 신학이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알파코스의 토크에는
삼위일체론이나 예정론 같은 교리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알파코스에도 성장사다리라고 부르는 양육 체계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성령론에 치중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신학을 결여하고 있다.
알파코스의 신학적인 문제점은 대표적으로 교회론에서 잘 나타난다.
먼저 소그룹에 중점을 두는 알파코스의 교회론적인 문제점으로 다음과 같이 일반적인 것들을 지적할 수 있다.
알파코스는 12명 정도로 이루어진 그룹을 가장 이상적인 크기로 간주한다.
알파코스가 이렇게 소그룹의 인원을 제한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알파코스가 소그룹의 중요성을 말할 때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을 인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파코스는 절대로 2명 또는 3명으로 이루어진 소그룹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서 알파코스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사람들의 수평적인 관계를 중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알파코스는 소그룹을 우정(사람들 사이의 관계)을 개발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여긴다.
이에 더하여 알파코스는 행사에의 참여가 마치 구원의 표증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경향이 매우 짙다.
그러나 알파코스의 교회론 문제는 이렇듯 일반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론과 관련하여 알파코스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점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검블이 쓴 “인생의 의문점들”이라는 책에는 마지막 부분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는 신약성경에 100개가 넘는 교회에 관한 이미지와 비유가 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를 언급한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미지이다.
검블은 교회(에클레시아)를 사람들의 모임(집회/회중)이라고 정의하면서, 전 세계의 신자들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교회(핍박받는 교회, 제3세계 교회, 자유세계의 교회)와
지역교회(대규모교회, 중간규모교회, 소규모교회)로 구분한다.
그는 보편교회를 공간적으로만 이해하고 시간적으로는(과거, 현재, 미래) 이해하지 않으며, 지역교회를 성경의 지지를 따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 성장학 연구가들의 견해를 따라 크기로만 구분한다(따라서 그의 교회론에는 성경구절이 하나도 인용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알파코스의 교회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입증된다. 검블의 주장을 살펴보면 교회(에클레시아)와 관련하여 주로 수평적 차원으로 회중을 강조할 뿐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라는 수직적 차원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회중도 없다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단락에서 치명적인 문제점은 교회에게 붙인 백성 개념이 전혀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백성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사실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검블의 생각대로 하면, 왕이신 하나님과 백성인 교회에 각각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둘째로 검블은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이미지로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됨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신자들이 형제자매로서 사귐을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는 단지 이 사실로 교회를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만 부각시킨다.
검블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훨씬 진리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예를 들면, 예정과 선택<엡 1:3-14>; 부활과 중생<벧전 1:3-12>).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진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예배든 사역이든 무엇에도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알파코스에서는 이 점이 너무나 약하다(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검블은 형제자매의 사귐을 모든 문화의 장벽을 초월한,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기분 좋은) 사귐으로만 설명하는 데서 문제점을 일으킨다. 이것은 교회론과 관련하여 너무나 보랏빛 나는 사귐만을 알려주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런 설명은 교회를 아주 잘못 이해하도록 만든다.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의미의 사귐만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진정한 사귐에는 신랄한 질책으로부터 나오는 고통도 있기 때문이다(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한 것처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관하여 가르치실 때 이런 점을 강조하셨던 것이다(마 18장). 다시 말해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권징과 치리로서의 사귐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이다.
셋째로 알파코스의 지도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하는데 특히 성도들의 하나 됨과 다양함을 제시하면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론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순전히 수평적인 차원에서만 설명한 것이다.
이와 달리 신약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할 때 무엇보다도 수직적인 차원을 중요시한다(에베소서, 골로새서).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은 채,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의 관계만을 언급하는 것은 교회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도록 만든다.
불행하게도 검블의 책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말하지 않으면서 몸인 교회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이루신 질서를 버리고 다시 무질서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엡 1:10).
신약성경은 교회론에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또한 구별된 권위의 분량을 감당하는 직원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엡 4:11).
넷째로 신약의 교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거룩한 성전이라는 이미지가 도입된다.
알파코스는 신약의 교회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정의하면서 교회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성령론에 편중된 교회론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교회가 삼위일체론적인 교회로 나타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이 구절에 의하면 교회의 건립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은 목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건립의 범위이며, 성령은 건립의 도구이다.
또한 알파코스에서는 교회론에서 만인제사장설을 언급하면서 평신도 신학을 옹호한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설은 본래 구원론에서 나온 것이지 교회론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직제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중점을 둔다.
마지막으로 검블의 책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이미지로 설명되는데, 여기에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목적이 빈약하게 서술되었다.
맺는 말.
위에서 진술한 것처럼 간략하게 살펴보아도 알파코스는 성경이해에 결핍현상을 진하게 빗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해의 부재는 반드시 신학의 부재를 낳는다. 특히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성령론에 심각한 편향성을 나타낸다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성령체험을 실현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인위적인 조작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국산 알파코스는 1999년부터 한국교회에 거의 무비판적으로 도입되었는데(알파코리아), 그 후 놀랍게도 훨씬 더 많은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첨가된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요소들이 첨가되었다기보다는 본래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늘날 목회의 방향이 이렇게 설정되는 까닭은 아마도 목회자들이 현실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성장을 요구하는 현실 앞에서 목회자들은 양적 부흥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알파코스 식의 “재미”가 한 몫을 톡톡히 해내는 것 같다. 사실 현대의 목회에서는 재미 때문에 사람이 모이는 현상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면 결국 진리의 전달은 소홀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진리는 사라지고 재미만 남는다.
진리에 의한 재미(요이 4; 요삼 3-4)가 아닌 다른 재미는 교회를 위험하게 만들뿐이다.》
'교회성장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교회 성장을 위한 지도력 (0) | 2013.04.04 |
---|---|
[스크랩] 교회 성장학 (0) | 2013.04.04 |
[스크랩] 교회성장과 신학 (0) | 2013.04.04 |
[스크랩] 교회 성장학 (0) | 2013.04.04 |
[스크랩] 교회성장학 (0) | 2013.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