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먼저 서울에서 목회를 했는데 약 10년 이상 목회를 하고 실패했습니다. 그 전에 여러 가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게 있었는데, 그렇게 많이 주신 것들을 가지고 목회를 하니까 어디 가서 목회를 해도 부흥이 빨랐습니다. 개척하면 지하실에서도 금방 일 년만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언제든지 부흥이 잘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 개인의 어떤 달란트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은사 때문에, 특별히 말씀에 대해서 능력을 주셔서 개척만 하면 굉장히 부흥이 빨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성격을 다스리지 못해서, 성질이 아주 불같이 급해서 그냥 순종하지 않는 교인들이 있으면 하루 아침에 싹 내보내 버렸습니다. 한 명만 남고 다 나가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명 데리고 다시 지하실에 이사 가서 또 개척하면 부흥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목회를 한 것이 한 10년 반쯤 됩니다. 좀 부흥하고 나면 차분하게 안정기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런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다가 기분 나쁘면 제 성질대로 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목회 경험들에 대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회개가 됩니다. 그야말로 성질대로 했습니다. 제가 살아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습니다. 독재로, 카리스마적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이번에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횃불회관에서 하는데 제 아내를 잠깐 30분 세웠더니 이 사람이 전국의 목사님들 앞에 나가서 “우리 목사님 별명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엿장수’이고 하나는 ‘히틀러’입니다.”라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제가 목회를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반대라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신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경매가 진행되고, 그래서 완전히 빈손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하도 교만하게 목회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는 신학교도 망하게 하시고 교회도 경매에 넘어가게 되어 하루아침에 빈손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김포에 들어가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2년 만에 천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2년 만에 천 명 된 게 아니고 처음 3년 가까이는 고생을 했습니다. 60명 되기까지 제가 고전했습니다. 서울에서는 그렇게 고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서울에서는 목회하면 일 년 만에 엄청났습니다. 그랬는데 김포에 가서 3년 동안 목회하는데, 장년 60명이었고, 그 곳 텃새도 굉장히 심했습니다. 한 몇 년 지나 60명이 되었는데,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제가 하고자 하는 대로 목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목회하겠습니다.”
그때 제가 손을 바짝 들었습니다. 그때 열흘 동안 금식하는데 3일만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목회를 했는데 60명에서 1,000명 되는데 2년이 걸렸습니다.
지하실에서 60명이 모여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목회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겠습니다.”하자 하나님께서 “중국에 가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중국에 갈 만큼 건강하지 못했는데 중국의 지하신학교에 강의를 가서 일주일 동안 강의하고 왔습니다. 서해상공 비행기 안에서 제가 응답받은 것이 “평신도 능력 극대화,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우리 교회로 돌아가 평신도 능력 극대화 운동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에 갔을 때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평신도 여집사님이 예수 믿은 지 15년 만에 전도를 했는데 교회를 300여 개나 세웠습니다. 얼마나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나는 이게 뭐냐, 서울에서 10여년 목회하다가 실패하고 김포에 와서 지금 3년째 목회하는데도 60명 가지고 이렇게 절절매는데 아니 여집사 하나가 15년 만에 어떻게 300여개의 교회를 세웠단 말인가?’ 그분이 저에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목사님!”하면서 반찬을 잘해서 대접을 하는데 생각해 보니 제가 먹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아, 이걸 내가 먹어야 되나!’ 300개 교회가 모두 이분이 평소에 한 번 심방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 평신도에게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제가 중국에 가서 평신도에 대해서 강한 충격을 받은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하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오는데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 이것을 딱 단어로 하나님께서 지혜로 주시는데 강력한 감이 왔습니다. ‘바로 이거다! 우리 교회에 가서 빨리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을 벌여야지.’ 전 그때 세미나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전국 목회자 세미나, 이런 생각은 없었고 우리 교회에 빨리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을 적용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그것을 적용했는데 그렇게까지 빨리 부흥할 줄은 예측을 하지 못했습니다. 2년 만에 천명으로 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가서 첫 번째 주일날 모아놓고, 그때 사실 우리 교회에 90명 정도의 교인이 모일 때였습니다. “이제부터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을 펼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하셨으므로 아제부터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을 벌일 겁니다. 자신 없는 분은 빨리 옆에 온누리교회도 있고 삼광교회도 있고 하니 다 가세요.”라고 했습니다. 그걸 잘못한 것입니다. 계속 “그냥 차분히 계세요. 몇 명만 뽑겠습니다.” 그래야 되는데 자신 없는 분은, 각오가 안된 분은 옆에 있는 교회로 다 가시고 아주 단단히 각오가 된 사람만 남으라고 한 달 동안 예배시간마다 광고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30명이 그냥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60명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평신도 극대화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두 번째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오후 예배 때 평신도 능력 극대운동 훈련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냥 한꺼번에 싹! 그런데 우리 교회는 11시 예배나 오후 예배나 인원차이가 한 서너 명 차이밖에 안 납니다. 주일 오후 예배에도 다 나옵니다. 그러나 오후 예배 시간에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두란노서원에 대한 것을 읽고 ‘아 뽑아야 되는 구나! 뽑아서 따로 훈련을 시켜야 되는 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8~9절에 보면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석 달 동안 열심히 전하는데 그 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사람도 있지만, 순종 안 하는 사람도 있고,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 안이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아 따르는 사람도 있고, 또 반발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마음이 굳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따로 뽑아서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다고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2년 동안 훈련시켰는데 소아시아! 그러니까 로마의 한 속주이지만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나라보다 더 큰 지역입니다. 터어키! 우리나라보다 더 큰 나라인데 그 한 나라가,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것입니다. 그 한 나라가 복음으로 다 뒤덮여졌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2년 동안 그 곳에서 사역했는데 거기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막 나가면서 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나라가 전부 다 말씀을 들었다.”한다면 다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제가 ‘아하 그게 아니구나. 전교인을 할 게 아니고 일부를 뽑아서 해야겠구나!’하고 깨닫고 일부를 뽑아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건강이 너무 안 좋았는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작년에 세미나를 시작하면서부터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세미나를 시작할 때부터 건강을 주시고 살이 찌게 하셨습니다. 저혈압이 아주 극도로 심했고 새벽기도회 인도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거의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오후가 되서야 조금 나아지는 상태였습니다. 영양실조도 극심했습니다. 목회하는 데 건강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토요일 하루만 산책을 조금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강단에 서면 그때는 땀으로 양복이 다 젖을 정도로 강력하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저는 설교를 길게 하면 한 시간 20분, 짧게 하면 50분이고 보통 한 시간 설교인데 그 한 시간 동안 아주 강력하게 전합니다. ‘전하다가 죽어도 좋다.’할 정도로 전합니다. 그리고는 이틀 동안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감당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는 2년 동안 저는 거의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동안 심방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도 심방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부교역자도 없고 전도사도 없고 심방전도사도 없습니다. 저 혼자 다 합니다. 우리 교회는 혼자 다 해도 됩니다. 우리 교회에 부목사님 한 분을 청빙했는데 세미나 총무 목사님으로만 일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보에만 부목사로 넣어 놓았지, 교회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새벽 예배를 인도하지 못하니까 우리 부목사님이 새벽예배를 인도해 주는 것, 이거 하나뿐입니다. 심방은 일년에 한 번 정도 장례식이나, 목회자가 안 하면 안되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교구장들이 수십 명인데 저는 그들의 이름도 잘 모릅니다. 집이 어딘지, 무얼 해서 먹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섭섭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러한 것들이 아주 체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이사 온 권사님이, 안수집사님이니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사 오면 곧바로 전도해 버리니까…….
우리 교회는 거의 불신자 전도가 90%입니다. 불신자만 집중적으로 전도하는데 이사온 사람을 전도하다 보면 그 중에 집사님이나, 권사님이 간혹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자들이 예수 믿은 지 두 달 석 달 만에 구역장 되는 경우들이 흔해서 어려움이 좀 많습니다. 집사님들 숫자가 적습니다. 그래서 권사님들이나 집사님이나 안수 집사님 등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에 오면 이해가 안 됩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교회냐고 묻습니다. 심방이라는 것은 물어보지도 않고 춘계ㆍ추계 대심방도 없고 사업을 한다는데 개업예배 드려주는 것도 없고, 아파트를 사면 입주예배도 안 드려주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만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끝이 나야 됩니다. 수요예배 때에 이 사람들이 들어올 때 생각과 나갈 때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려야 됩니다. 매 예배 시간마다 엄청난 은혜를 받고 가면 심방이라는 게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지금도 건강은 그렇게 좋은 편이 못 되기 때문에 전국 목회자 세미나 인도하는 것, 그거 간신히 하고 우리 교회 예배드리는 것만 간신히 합니다. 예배는 주일에 두 번, 수요일에 한 번, 그리고 목요세미나 다섯 시간을 인도하는 것이 끝입니다. 목요세미나 다섯 시간 인도할 때는 간혹 마비되는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손이 마비되는 경우도 조금씩 있는데 그래도 세미나는 끝까지 강력하게 진행합니다. 그것 빼고 나머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가 욕을 먹는 경우가 있는데 대형 교회에서 집회 인도자로 초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훈련시켜 달라.” “우리 교회에 와서 몇 십 주년 기념 예배에 설교해 달라.” 그런 것을 제가 건강상 하지 못합니다. 지금 보면 살이 쪄서 좋은데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이 시작될 때 교재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방법이 있었는데 새벽에 어떻게 해서든지 아주 간신히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입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훈련시켜야 되는데, 무슨 훈련 시켜야 됩니까?”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 영감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고 때로는 성경의 어떤 한 구절이 떠오르게 하든지, 어떤 단어든지 뭔가 떠오르면 메모를 합니다. 저는 기도할 때 꼭 노트와 연필을 놓고 기도합니다. 어디든지 갈 때 항상 메모지를 가지고 다닙니다. 언제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사는 것입니다. 그때 기도하고 “하나님 인도하는 대로 살겠습니다.” 결단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메모지나 조그만 수첩이나 펜 하나, 이건 항상 지니고 다닙니다. 잘 때에는 머리 맡에 놓아 둡니다. 새벽 한 두시에도 갑자기 깨면서 어떤 영감을 주실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가 일 년에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하려고 불켜고 그러다 보면 그걸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때 감이 왔을 때 적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목회해야겠다는 마음이 지금도 강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지, 제가 똑똑해서 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아서 된 것도 아니고 능력 있고 어떤 달란트가 있어서 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도할 때에 영감을 받으면 “자 오늘 훈련이다. 열 명 모여라!” 그러면 열 명 모아 놓고 한 세 시간 훈련시킵니다. 그런데 그 훈련이 훈련시키기 몇 시간 전에 기도하다가 받은 것이기 때문에 참 뜨겁습니다. 그렇게 훈련을 시켰습니다.
평신도들이 실제로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참 대단합니다. 우리 교회의 평신도들은 능력 극대화가 이루어져서 상당합니다. 1년 365일 하루종일입니다. 쉬는 날이 없고 어제 같은 날(현충일)이 오는 걸 싫어합니다. 그러면 전도를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나가면 저녁입니다. 우리 교회는 전체가 그렇습니다. 과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사도행전 5장 42절을 보면서 오늘 교재에 나온 부분 28가지를 간단하게 살펴보며 넘어가겠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장 42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초대 교회에 이런 일이 진짜 일어날 수 있습니까? 믿어지지 않았는데 우리 교회에서 해보니 정말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날마다 쉬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캉스를 제일 싫어합니다. 전에는 설, 추석을 싫어했는데 이제는 설과 추석이 돌아오기만 하면 시집은 다 구원 대상이 됩니다. 그날은 시집 동네로 갑니다. 강사 훈련 다 받았으니 가서 한 사람씩 방으로 데리고 가서 성경으로 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집사님들은 시골에 가면 “올 추석에는 시집이다.” 그러면 시집 동네에 부흥이 일어나 버립니다. 그러면 시골 시댁 동네 교회가 아주 수지 맞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이 가면 한 명 딱 골방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일대일 성경공부를 합니다. 일대일로 30분씩 다섯 번만 전하면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깨어집니다. 금방 마음이 뜨거워져서 목사님에게 연결하면 신앙이 굳게 섭니다. 시어머니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훈련되면 추석이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현충일이나 공휴일은 싫어하고, 바캉스 싫어하고, 놀러가는 것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전도하는 게 너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이때에 역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초대 교회에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오늘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변질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자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말씀이 다 동일하다면 왜 교회만 그러하지 못한 것입니까?
자, 이제 깊이 생각해 봅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교회를 초대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목회학적인 측면으로 초대 교회라고 말하면 잘못입니다. 신학적인 측면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라는 것은 ‘처음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빠져나갈 길이 생깁니다. 그게 아니고 사도행전에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보고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아니고 모델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걸 기도하셨고 처음에 교회 시작할 때에 ‘바로 교회는 이거다.’라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델 교회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생각이 많이 바뀌어집니다. 만약 모델 교회라면 지금 우리 교회는 이단 아닙니까? 즉 ‘다른 것’아닙니까? 사이비 아닙니까? 초대 교회는 날마다 쉬지 않았고 평신도 능력 극대화는 상상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우리 집사님들 보면 “난 전도하다가 죽는 게 소원입니다.”하는 집사님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전도하다가 죽는 게 소원인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빌립집사님이 가서 전하면 엄청난 역사, 불같은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서 전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모델 교회가 핍박받으니까 다 피난 갑니다. 뭘 먹고 사느냐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고 피난 가서 전도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 가서도 또 전도했습니다. 이것이 모델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교회를 우리가 초대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모델 교회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교회를 초대 교회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 교회는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고 지금은 이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초대 교회가 모델 교회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면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초대 교회를 기록하게 하시고, 말씀대로 믿고, 우리에게도 본받으라고 기록된 말씀이라면, 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동일하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하고 이 때에 역사하신 성령이 지금도 동일하시고, 이때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시다면, 지금도 이런 교회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초대 교회를 모델 교회라고 할 때 다들 이단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의 모습을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내 교회는 초대 교회, 모델 교회에 비하면 이단이라고 하든지, 우리 교회는 그래도 초대 교회에 조금 가까이 갔다고 생각된다면 사이비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함량이 떨어진다.’고 하든지 해야 합니다.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다. 만약 초대 교회가 아니고 모델 교회라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신약, 약속하신 것이고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가 일어난다고 아주 하나님이 확약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역사는 반드시 일어난다고 하나님이 확약하신 것이기 때문에 저는 여기에 대해서 어마 어마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가슴이 뜨겁습니다. ‘이 엄청난 이 복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평신도 능력 극대화훈련을 실제로 실시해 보니 평신도들은 지칠 줄을 모릅니다. 심방전도사님, 교육전도사님, 부목사님들은 다 지칩니다. 제가 세미나 인도하면서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을 하니까 특히 전도사님들에게 욕을 많이 먹습니다.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이 시작되면 목사님들이 가자마자 부목사 그만두라고 하지, 교육전도사 그만두라고 하지, 심방여전도사 다 그만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들 길러서 평신도들로 다 한다고 하니까 여전도사님들이 전화해서 “목사님! 저도 주의 종인데, 그럼 저는 어디로 가란 말이예요?”합니다. 그래서 ‘아 그것 참 큰일이다.’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면 개척 하면 될 거 아닙니까? 무기만 있고 능력 있으면 안방에서 조그마한 현판 달아놓고 목회해도 안방에서 3부 예배드릴 것을 확신합니다. 안방 목회를 왜 못합니까? 상가나 지하실보다 안방목회가 훨씬 더 부흥하기가 좋습니다. 확실한 무기만 준비하면 그렇게 됩니다.
“하여튼 우리 현재 교인은 이단이다.” 이렇게 말해야 우리가 문제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래도 우리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모델 교회에 근접했다.”라고 한다면 사이비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런 생각을 가져야 우리가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서지면 평신도들이 다 부서집니다. 우리에게 불이 붙으면 평신도들에게도 다 불이 붙습니다. 지금 횃불회관에서 목회자 10주 세미나를 하는데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많이들 오시는데 전 그렇게 많이 오실 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오시는데 모두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오십니다. 그런데 세미나 첫 주부터 끝 주까지 “내가 박살이 나면 평신도들이 다 박살이 나는 것이다.”하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입니다. 내가 불붙으면 전 교회가 불이 붙는다, 내가 깨지면 전 교회가 깨지는 것이라는 강의가 세미나 10주 동안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안 붙고 저들에게만’ 불을 붙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책에 의지해서 지식적으로 준비해서 머리로, 맨 정신으로 목회하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제 정신으로 목회하는 자들이 문제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렇게 했지만 이제는 맨 정신으로, 제 정신으로 목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아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목회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그것은 아주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실수 하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감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말씀을 주셔서 믿고 나가면 반드시 그것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로운 것이 하나님의 미련한 것보다 못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의 미련한 것보다 못합니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가 치유인데 우리 교회에서 작년까지, 작년 부흥할 때에는 제가 신유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암도 낫고 불치병들도 많이 나았습니다. 못 걷는 사람, 팔 다리가 줄어들어서 짧은 사람을 두고 기도했는데 비틀비틀하면서도 걸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기적적인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 영혼 구원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교회 부흥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부흥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손해가 납니다. 나올 때에는 병 낫기 위해서 나왔는데, 병이 나아 버리니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 좀 애를 먹인 다음에 안수해야겠구나!’ 생각하고 3주 기간을 잡았습니다. 그냥 신유가 아니고 3주 동안 훈련을 받고 성경공부하고 난 사람만 안수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수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하겠습니까? 프로그램에 의한 신유, 프로그램에 의한 치유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평신도 능력 극대화훈련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강사 훈련, 전도자 훈련, 구역장 훈련 등이 있는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무리 불치병이라도 다 나았습니다. 어떻게 나았는 줄 아십니까? 그냥 따라다니다 보니 나아 버렸습니다. 안수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공부에 참석하여 은혜 받고, 강사 훈련 받고 자기도 뜨거워져서 가서 말씀을 전하는데 뜨겁게 성령 충만하고 그러다 보니까 병자의식이 없어져 버립니다. 자신이 병자라는 생각, 병들었다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너무나 바쁘다 보니까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또 정신없이 설거지하고 또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또 나갑니다. 그렇게 한 3주만 하다보면 “가만히 있어봐. 내가 병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약을 한 주먹씩 먹던 사람들이 약 안 먹어도 되고 그냥 나아 버립니다. 할렐루야! 전인 치유가 다 됩니다.
여러분, 프로그램에 의한 치유는 전인 치유입니다. 예를 들면 평신도들이 말씀으로 불을 토하는 강사 훈련이나 구역장 훈련이나 전도 훈련을 통해서 평신도 능력 극대화가 일어나서 평신도들이 하루종일 너무나 뜨겁게 행복하게 살면 병은 그냥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져 버립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했습니다. 원어적으로는 ‘보약’입니다. 골다공증 걸리는 것은 간단합니다. 근심 많이 하는 사람이 잘 걸립니다. 틀림없습니다. 골다공증 걸린 사람은 뼛속까지 마릅니다. 칼슘이 몸 안에 적절하게 흡입되지 않게끔 하는 게 근심입니다. 근심하게 되면 우리 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게 병입니다. 그러니까 근심은 병이고 즐거움은 보약이 됩니다.
잠언 18장 14절에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은혜만 받으면 병은 이깁니다. 할렐루야!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속상하면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속상할 기회가 없으면 됩니다. 왜 성도들이 시험에 듭니까? 시험에 드는 것은 일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일하면서 성령 충만하면 시험에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제가 이름도 모르고 심방도 안 하지만, 시험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몇 년째 한 번도 안 가도 시험에 들 수가 없습니다. 심방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네들이 심방 다니느라고 바빠서 그렇습니다. 그들로 심방 다닐 수 있도록 바쁘게 능력을 주고 훈련 시켜 놓으면 자기들이 바쁘다 보니까 심방 받을 시간이 없습니다. 심방 받을 시간이 없게 만들면 됩니다. 말씀에도 나왔지요. 심령이 기쁘게 주의 일 하다보니 시험에 안듭니다.
저는 상당히 목회를 강하게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야말로 독재입니다. 회의도 없습니다. 회의 없이 결정합니다. 안수집사 네 명 모아놓고 “이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언제까지 돈 준비하세요.” 그런 것은 회의합니다. 일년에 한번 정도 합니다. 돈이 필요할 때 안수집사 몇 명 모아서 집 저당 잡혀서 얼마씩 모아야 할 때 합니다. 그분들은 그것을 미리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먼저 결정한 다음에 지시하는 식으로 회의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없습니다. 의견을 물어봐서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독재인데 제 독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 말씀에 있으면 그냥 이렇게 하자, 그러면 여기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말씀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에 의한 치유라는 것은 교회 안에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의 프로그램이 있으면 평신도들이 가서 말씀을 전해서 불을 토하고 듣는 자들이 그 말씀에 의해서 깨지고 박살이 나고 이러한 역사들이 일어나면 말씀을 전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아침에 난 두 탕 했다.” “저녁에 난 세건 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어느 집에 가고 그 다음에 오후에는 어느 집에 가고……. 우리 집사님들은 핸드폰이나 자가용을 몰고 다니면서 전도합니다. 남편들은 지하철 타고 직장에 다닙니다. 아내와 남편이 이렇게 하나가 되면 하늘나라 가서 상을 받는데, 은근히 브레이크 걸면 자기는 거기 가서 국물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자가용 없는 사람은 기동력이 떨어지니까 실적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경쟁의식 때문에 자기네 교구 실적이 떨어지면 안 되겠기에 남편이 차를 사줍니다.
누가 병들었다. 그러면 그는 일꾼 될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자기가 따라다니면 병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들이 불을 토하며 일대일로 전합니다. 딱 한명 놓고 일대일로 강력하게 전하면 그 사람 깨어집니다. 그 옆에 가서 참관하다가 은혜 받고 거기에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고 그래서 한 달만 따라다니다 보면 이 사람도 서당 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불신자들도 두어 달 따라다니다 보면 반강사는 됩니다. 하도 들어서 뜨겁게 은혜가 되고 그래서 한두 달 다니다 보면 병은 그냥 나아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 병에 걸렸다, 부부의 문제가 있다, 자녀의 문제가 있다, 이 자매님의 근본적인 상처가 있다. 마음의 상처가 있다 등등 여러 가지 치유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100가지의 문제가 있고 100가지의 상처가 있고 100가지의 치유할 문제가 있더라도 그거 하나면 다 됩니다. 평신도 능력 극대화운동으로 그들이 성령 충만하게 가서 전하면 변화되고, 상담하고 가서 기도해 주고 말씀 전하면 변화되고, 전도하면 그들이 예수 믿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렇게 막 신바람 나게 일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 된다면 일꾼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가정에 문제가 발생했다 하면 그 가정은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만 있으면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다니다가 그냥 일꾼이 됩니다. 그렇지만 제가 안수해 버리면 안됩니다. 너무 빨리 나아 버리면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프로그램에 의한 신유를 말합니다. 그래서 너무 빨리 나으면 안된다, 두달 내지 석 달은 애를 먹여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난 관둔다.”라는 사람들에게는 관두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병들어서 계속 누워있는 게 낫습니다. 건강해서 돌아다니며 죄짓느니, 두 다리 멀쩡해서 죄짓느니 그 사람은 병들어서 불치병으로 계속 누워 있는 게 낫습니다. 그러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계속 불치병으로 누워 있든지, 와서 낫든지, 와서 나으려면 한두 달간, 석 달간 정신없이 따라다니면 됩니다. 어느 것을 할 것이냐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뼛속까지 고름이 들어가서 의사가 그 뼈를 다 갈라내어 고름을 긁어내야 된다고 처방을 내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옆구리가 구멍이 나서 옆구리로 고름이 흘러나오는 것을 솜으로 막고……. 이렇게 죽음 직전까지 간 사람인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 아무개씨, 석 달만 이렇게 하세요. 그러면 낫습니다.”
그랬더니 두 달 만에 완전히 나아서 지금은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최고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불신자였지만 최고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일꾼이 되었습니까? 불신자를 빨리 낫게 했다면 그 사람은 일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았는데 뭐 다급할 게 있습니까? “당신 석 달간 따라다니면 나을 것이오.” 그러니까 따라다니다 두 달 만에 아주 건강해져서 가정도 회복되고, 엄청난 여러 가지 상처도 다 회복되고 치유되었습니다. 심령이 상하면 안됩니다. 속상하면 안됩니다. 개척교회에서 자꾸 속상하면 안됩니다. 사모님도 속상하면 진짜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다 불이 붙어 버리면 너무나 행복하고 보람됩니다. 목회가 정말 신바람 납니다. 들려오는 소리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말들이 들려오는지 너무나 기쁩니다. 그러므로 병들면 그것은 일꾼 될 기회인 것입니다.
1. 교회를 다양한 조직으로 나누지 마라.
개척 교회에 웬 회장님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교인이 백 명만 되면 무슨 회장, 무슨 회장해서 회장이 많습니다. 재벌 그룹도 그렇게 회장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부장님들도 많고 회장님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감투 한 번 쓰면 쓸 때는 좋은데, 문제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감투만 쓰게 되어 조직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예 조직이 없습니다. 구역 조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무슨 위원회도 없고 부장도 없고 회장도 없고 여전도회도 없고 남전도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위에 교구장, 대교구장, 총교구장 있을 뿐입니다. 우리 교회 여집사 중 서른 아홉 살 먹은 신 집사, 그분에게 작년에 천 명 맡겼고 저는 목회에 대한 신경은 일주일 내내 하나도 쓰는 게 없습니다. 전국 목회자 세미나 하나만 신경씁니다……. 건강상도 그렇지만 설교는 세 번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신 집사님이 천 명 장년을 훈련시키고 양육하고 인사, 행정, 조직을 전부 다 합니다. 기가 막히게 합니다. 물론 제가 개입하면 더 나아지겠지만 개입 안 해도 될 만큼 그렇게 하고, 저는 전화로 지시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로 간단히 지시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목회학적 측면에서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조직을 많이 만들어서 해나가는 분이 있고, 저의 경우에는 단순할수록 강하다 하는 게 제 주장입니다. 복잡하면 약화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단순할수록 강해진다. 조직이 없을수록 강해진다. 회의가 많을수록, 즉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등 무슨 회의가 많을수록 교회는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의가 없을수록, 조직이 없을수록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2. 여전도회를 없애야한다.
여전도회에서 참기름 장사하여 참기름 두 병 값, 집사님이 냈느니 안냈느니 해서 시험 들고……. 이거 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뭐 회비가 누구는 정말 징그럽게도 6개월째 밀렸다는 등 말이 많습니다. 저는 도대체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거, 주님이 채찍으로 휘둘러서 다 내치고 상 뒤집어 엎어버리고 아주 벼락을 내셨는데 교회 안에서 목사님 허락 하에 그러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의도는 좋습니다. 선교기금을 마련한다든지 등등으로 돈이 오고 갑니다. 이건 제가 생각할 때 다 시험거리입니다. 전도하는 여전도회는 별로 없습니다. 여전도회 하면 전도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전도하는 게 아니고 사업을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여전도회, 남전도회라는 조직 자체가 전도를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그런 조직 자체가 전도가 되지 않게끔 되어 있습니다. 전도가 불가능합니다. “매주 목요일은 여전도회 전도의 날! 임원진들 나와라, 전단지 돌리자!” 그거 일년 내내 해봐야 안되는 일입니다. 전도가 안되게끔 만들어진 조직이 있고, 전도가 저절로 되게끔 만들어진 조직이 있습니다. 여전도회 등은 정말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험거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여전도회가 없습니다. 남전도회도 없습니다. 남구역은 있습니다. 남교구입니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충만합니다.
3. 교회 모든 일에 당번식을 폐지하라.
그냥 모든 것이 저절로 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에는 어느 누가 하고 이런 게 아니고 모든 게 저절로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지 서로 하려고 해서 못하게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뜨거우면 이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번식이라는 건 이미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책임감에 의해서, 의무감에 의해서 당번식으로 교회가 움직여진다면 이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한 마디 말이 없어도 저절로 다 되어야 됩니다. 너무 하려고 해서 탈이 되어야 합니다.
4. 평신도가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뛸 마당을 주라.
뛸 마당이 있어야 뛰는데 마당이 없으면 뛸 수가 없습니다. 지금 문제는 평신도들이 뛸 마당을 목회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전도사님이 없기 때문에, 교구장들이 심방 다닐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 심방전도사님이 있다면 “전도사님! 심방 좀 해주세요.”하고 교구장님이 전도사님 모시고 다니겠지요? “부목사님! 심방 좀 해주세요.” 그래서 부목사님 앞세워서 심방대원으로 따라다니겠지요? 그런데 아예 전도사도 없고, 부목사도 없고, 심방 담당자가 없으니까 그냥 구역의 누가 어떻다, 심방 가야겠다 그러면 구역장이 가서 심방하고 교구장이 심방가고 그렇게 해서 되는 겁니다. 결론은 ‘뛸 마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뛸 마당이 있어도 능력이 없으면 안됩니다. 가서 상담을 할 줄 알아야 되고, 기도해 줄 줄 알아야 되고, 말씀을 전해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야 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훈련이 되었다면 상담은 담임목사가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5. 평신도가 뛸 마당을 만들어 주었으면 뛸 이유도 주어야 한다.
뛸 이유는 도전, 사명감, 천국과 부활, 내세에 대한 면류관 등 이런 부분들입니다. 황영조가 그렇게 금메달을 위해서 뛴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가난을 이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임춘애도 뛸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기 가서 금메달만 따면 일억 원이 생긴다든지, 십억 원이 생긴다든지, 우리 가문은 그 때부터 핀다든지,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다든지 등등 어떤 동기가 있어야지 뜁니다. 괜히 뛰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조직 문제와 뛸 이유와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뛰어도 지치지 않고 너무 기쁘고 충만하고 그렇게 뛸 수밖에 없는 열정이 일어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뛸 이유를 주어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열 고을! 열 므나를 남기면 열 고을, 다섯 므나 남기면 다섯 고을…….”하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장 12절)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는 대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즉 천국은 인센티브(incentive)제입니다. 그만큼 맡긴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으로 하면 상당히 설득력이 약합니다. 꼭 면류관이 아니더라도 천국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 90장 10절)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벌이 되어서 뭘 하겠습니까? 천국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죽어도 살리라.”하신 말씀에 대한 확신이 선다면, 지금 복음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 천국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설교해서 문제입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딱 잡히면, 스데반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리라.”하는 그 확신이 서면 기쁘게 죽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일생을 걸 수 있습니다. 아깝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이 땅에서 어떤 희생을 해도 전 생애를 걸 수 있습니다.
성경에 수많은 보물이 있지만 목회자가 부활 하나만 확실히 알아도 전 성도가 다 변화합니다. 부활 하나만 강력하게 신앙이 되게끔 말씀을 전할 수 있다면 완전히 변화가 됩니다. 기복적인 신앙의 수준이 아니고, 천국을 알면 그날부터 목숨을 걸어 살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른 것은 없습니다. 천국을 안다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순간 부활, 천국 그리고 거기서 내가 어떻게 된다, 상이 어떻다 하는 게 뚜렷해집니다. 손에 딱 잡힙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것만큼은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임을 알기에 거기서 뛸 이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고을도 있고, 다섯 고을도 있고, 한 고을도 있고……. 다 다릅니다. 이것이 뛸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 하루종일 일해도 저는 수고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습니다. 1년 365일! “야 우리 교회 집사님들 수고하네.” 이런 말을 안합니다. 교구장들이 무섭게 왔다 갔다 합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녁에는 저녁대로 전화로, 또 목회해 가면서 설거지 합니다. 마이크 전화기 사용해서 설거지 합니다. 그렇게 바쁩니다. 저녁에는 저녁대로 전화로 바쁘지요, 낮에는 낮대로 다니면서 바쁘지요, 뛸 이유만 생기면 신기합니다. 핑계가 다 없어집니다. “아기가 둘 달려서.”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아기 하나는 들쳐 없고 하나는 끌고 그러고도 다닙니다. 아주 눈물 날 정도입니다. 아기 때문에 계단 오르고 내리고 정말 여름 땡볕에 아기들까지 얼굴이 새카맣게 타면서도 다닙니다.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면 이건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냥 “목사님! 제발 전도하지 말라는 말만 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복잡합니까? 우리 교회 ‘벌’이 그겁니다. “전도하지 마, 집사님! 집에서 3일만 있어. 회개 좀 해야겠어. 집에서 나가지 말고 3일만 있어.” 활동하지 말고 집안에 3일만 있으라고 하면 그건 최고의 고문이요, 최고의 벌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지 말라는 말만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이것만큼 행복이 없고 이것만큼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뛸 이유, 뛸 능력이 생기면 진짜 말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민화정책으로 나가면 안됩니다. 장로나 권사가 아무것도 할 줄을 모릅니다. 10년 된 집사가 진짜 예수란 ‘예’자도 말할 줄 모릅니다. 이런 바보들로 만들어 놓는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성령이 계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장 26절)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이 동일한 능력의 성령이 그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들을 훈련시키면 대단합니다. 전도사님이나 부목사님이나 심방 전도사님들은 하다가 지치는 데 평신도들은 신기하게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6. 평신도가 뛸 마당, 뛸 이유를 갖게 됐어도 뛸 능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은사, 지혜, 지도력 등의 능력을 전수하고 개발시켜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7. 교회가 우민화 정책으로 나가면 안된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21세기 평신도는 능력이 다양하게 뛰어나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평신도(집사, 권사, 장로)가 아무것도 할 줄을 모릅니다. 처음에는 쉽게 손에 쥐어 주듯 교육하고 훈련하면 성장합니다.
8. 평신도들이 강사 훈련을 받고 강사 활동을 하면서 성령 충만을 체험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강사 훈련을 저는 ‘핵심 일주’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핵심적인 말씀을 일주일 동안 해야 30분씩 전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원칙이 있습니다. 일대일, 한 사람을 놓고 해야 합니다. 이대일은 절대 안됩니다. 이대일 하면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놓고 전하면 강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일대일로 30분 정도 전하는데 다섯 개의 말씀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하면 졸업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다 전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 번, 내일 한 번 그래서 5일 동안에 이 사람이 깨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도리와 기도, 성령, 사단, 부활로 다섯 가지입니다. 마지막이 부활입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오면서 일꾼이 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핵심 일주가 30분 동안 다섯 번인데, 이것이 강사 훈련입니다. 이것을 평신도들이 가서 전하면, 어느 정도인 줄 아십니까? 전하는데 듣는 사람이 자꾸 옮겨 앉습니다. 그래서 강사가 또 옮기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 앉는다고 합니다. 끝나고 왜 그렇게 옮겨 앉았느냐고 물으면 뜨거워서 그렇다고 강사가 불을 토하는데 뜨거워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1.5m정도 거리를 두고 전하는데 평신도들의 성령의 불은 어마어마합니다.
평신도들에게 우리 교회는 많이 안 가르칩니다. 많이 가르치면 교만해지니까 그것만 훈련시킵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훈련을 안 시킵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 듣는 것으로 족합니다. 성경 공부 너무 많이 안 시킵니다. 뭐 3년제, 2년제 이런 것 없습니다. 이것만 할 줄 압니다. 그런데 이것을 일년에 몇 백번 하는데도 몇 백번 계속 성령 충만합니다. 오늘 하루에 다섯 번 똑같은 것을 전해도 다섯 번 다 성령 충만합니다. 일반 책 같으면 두 번만 보면 재미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라 성령의 역사로 된 줄로 확신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선포훈련’이라고 합니다. 선포 훈련! 설교 훈련이 아닙니다. 설교는 교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오늘도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하면서 말씀의 신학적인 것이나 여러 가지 교리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포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선포는 무엇입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게 선포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냥 선포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성경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순간 그냥 깨져 버립니다. ‘아차! 내가 근심했구나!’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명령입니다. 말씀이 그냥 선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도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인도입니다. 전도란 도(λόrοs)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9절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언제라고 했습니까? 그때에……. 그런데 우리는 사실 미리 너무 많은 것을 다 준비해 가지고 강단에 올라갑니다. 그때에 주신다고 했는데 완벽하게 준비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너를 사용하셔서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생각나게 하는 것을 너무 원고에 의지하다 보니까 주님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으면 더 좋겠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9. 목회자가 뛰지 마라.
목회자가 뛰면 그 교회는 망합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지금 문제는 목회자가 뛰니까 평신도가 뛸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현장에서 뛰면 우리 교회는 다 죽습니다. 저로 하여금 집안에 2년 동안 누워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 성질이 얼마나 급한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될 때 저는 막 뛰었을 것입니다. 워낙 그때 몸이 시원치 않아서 2년 동안 드러누워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때 제가 드러누워 있는 바람에 이 사람들이 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원리를 저는 잘 압니다. 저를 그렇게 2년 동안 아프게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부흥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아픈가?’ 주일날 새신자가 막 밀려오는데 악수하면 제 얼굴을 불쌍하게 쳐다보고 나갑니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고, 뼈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부흥하는 것이 신기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넓은 장소로 옮겼지만 지하실 월세 40만원! 왜 그렇게 바쁘게 돌아오는지 하여튼 그 때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들이 뛸 수 있도록 황영조를 만들어 내면 됩니다. 우리는 코치하면 됩니다. 저들이 잘 할 수 있도록, 목회자는 안 뛰고 진짜 뛸 수 있도록, 목회자의 할 일이 에베소서 4장 11~12절에 나옵니다.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목사를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래서 주의 일 하고 봉사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이 뛰어다니면 교회는 굉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백 명의 교회의 성도들이 뛴다면 백 명의 목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뛰는 것보다 낫습니다. 왜입니까? 목사님은 불신자와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님, 하면 벌써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불신자 자기네들끼리는 다 연결되어서 뻗어 나갑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움직여야 되는 것이지, 목사가 뛰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10. 평신도 능력 극대화가 이루어지면 오히려 담임 목회자는 지도력을 더욱더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다.
11. 설교는 목회자의 뜨거운 체험, 즉 자신의 몸에서 나와야 성도들의 신앙이 살아날 수 있다.
12. 강력한 은혜가 쏟아지는 말씀을 성령님은 예배 때마다 반드시 주신다고 믿고 하라.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 있는 말씀을 받으려면 믿고 말씀으로 한 발 내딛어야 합니다.
13. 목회자는 성경에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다양한 은사를 먼저 체험하고 평신도들에게 많은 은사가 나타나도록 도와주면 은사들이 나타난다.
모든 은사는 영혼 구원, 양육, 지도하는 일에 사용하게 해야 합니다.
14. 전도하라고 하지 마라.
전도하라고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부담을 주기 때문입니다. 할 줄 알게 만들어 놓으면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합니다. 너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하나하나 손에 쥐어 주어 가면서 하면 그때는 말려도 너무 재미있으니까 합니다. 그래서 “전도해라, 전도해라.”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부담감만 생깁니다.
15. 교회로 전도해서 데려오라 하지 마라.
교회로 데려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가봤어.”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교회에 이미 한 번 오고 난 후 떨어지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그게 아닙니다. 데려오면 안됩니다. 멋있게 건축된 교회가 아니라면, 웅장한 교회가 아니라면 와보았자 실망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집에 가서, 그 아파트 안으로 찾아가서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서져 버리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저희 교회가 지하실에서 2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몇 백 명으로 폭발적으로 부흥하면서 천 명이 된 것은 지하실에서 거의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하실에서 된 것은 데려오라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가서 다 부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오면 “아 은혜스럽네.” “가족 같네.” “커텐 색깔 멋있네.”하면서 그냥 보는 대로 은혜가 됩니다. 깨져서 오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라고 하지 말고 데려오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척 교회는 반대로 해야 합니다. 그 집으로 가야 합니다. 그 집에 가서 교제, 영접, 양육으로 신앙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성장만 시키면 그의 힘으로 나올 것입니다. 끌어 모으기에 집중하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를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16. 교회의 전도가 아파트 입주 전도나 수평이동으로 흘러가려 한다.
신자들은 믿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더 편하고 말이 통하기에 전도에 힘쓸 때 수평이동(교인 쟁탈전)으로 나갈 위험이 있습니다. 입주 아파트 한 동에서 20,30개 교회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반면 불신자 전도를 집중적으로 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불신자 전도입니다. 우리 교회가 불신자 전도에 집중하여 크게 부흥하게 된 것은 불신자 전도에 집중하는 교회가 별로 없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한때 전도자들 중 20%가 아파트 입주 전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20,30개 교회가 심하게 경쟁하면서 교회가 교회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을 보고 입주 전도를 중단시켰습니다. 불신자 전도는 평신도 능력 극대화 운동에 가장 중요한 목표인 동시에 열쇠가 됩니다.
17. 전도만 한다고 부흥되는 것은 아니다.
정착이 중요합니다. 또 정착보다 먼저 정착시킬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18. 위에서 강압적으로 임명제로, 낙하산 임명을 하면 안된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만들어질 때 강력한 자생력 있는 조직이 됩니다. 강력한 조직은 억지로 만들 수 없습니다. 교회 행정에 따라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청됩니다.
19. 심방을 하지 마라.
심방할수록 어린아이가 되어갑니다. 돌보면 돌볼수록 어려집니다. 그래서 심방하면 할수록 교회는 약화됩니다. 기복주의가 되고, 축복만 해달라고 하고, 자기만 돌보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심방은 되도록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들이 돌보게 해야 합니다.
20. 일꾼을 임명하는 방법으로 조직을 만들지 마라.
일꾼을 임명하면 안됩니다. 매년 12월에 임명하면 떨어진 사람은 시험드는데 우리 교회는 임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1년 365일! 자기가 그 자리를 만들어 갑니다. 실력이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훈련을 계속 받으면 교구장이 선택합니다. ‘아 이사람 구역장감이다.’ 구역장이 진짜 실력이 있으면 대교구장이 보고, 계속 살핍니다. ‘누가 교구장감인가?’ 그리고 데려가서 교구장으로 훈련시킵니다. 그러니까 실력이 있으면 발탁이 되는 것입니다. 인사도 제가 하는 법이 없습니다. 저절로 다 이루어집니다. 총대교구장 최고의 인사만 제가 개입하고 교구장급부터는 저절로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낙하산 임명은 신문에서도 비난 받는 일입니다. 담임목사님의 임명에 의해서 되는 것보다도 그냥 저절로 자기네들이 실력을 만들어 놓으면 그 윗사람이 보고 끌어갑니다. 그래서 일꾼은 임명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만들어진 일꾼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임명제 일꾼은 두고두고 속썩입니다. “목사님 말이야, 나를 남전도회 회장이라고 세워만 놓고 그 일을 그냥 혼자 다 해버리고……. 나한테 전화 한 마디도 없고…….”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괜히 임명해 놓고 아주 골치 아픕니다.
임명한다고 실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능력 없는 일꾼이 더욱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먼저 일꾼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꾼은 임명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21. 평신도 천부장 제도를 도입하라.
평신도의 능력이 극대화되었을 때 평신도 한 사람이 1,000명 혹은 3,000명을 목양하는 평신도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22. 성전 건축에 물질과 정력을 소모하지 말자.
성전 건축하지 않고도 교회는 부흥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그 좋은 예입니다.
23. 초대 교회로 볼 것인가 모델 교회로 볼 것인가?
사도행전의 교회는 시공을 초월해서 교회의 영원한 모델이 됩니다. 성경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의 교회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24. 부흥회 없이도 부흥할 수 있고, 헌신예배 없이도 헌신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들자.
25.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이단보다 더 세게 일하면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 교회를 보고 아주 질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파가 우리 복된 교회에 약이 올라서 복된 교회에만 집중적으로 벨 누르고 공략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들보다 우리가 확실히 더 강하니까 아무리 이야기해 봤자 한 명도 끄떡없습니다. 헛수고입니다. 이단보다 더 강하고 이단보다 더 전도 열심히 해서, 이단을 피하지 말고 이단보다 더 세게 나가면 이단이 감히 손을 못 댑니다. 그래서 이단에 대한 대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26. 교회의 문화가 전통적인 유교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전통과 제도의 틀이 복음의 효율성을 가로막고 불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장애 요인이 된다면 교회는 실험과 검증을 통해서 개선하고 개혁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27. 전도수냐, 정착수냐?
여러분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총동원 주일 몇 천 명, 몇 만 명, 또 예를 들어서 “누가 일년에 천 명 전도했다.” 그런 환상을 다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일 년에 천명, 총동원으로 삼천 명, 오천 명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구두 티켓 무료!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3주 뒤에 몇 명이나 남습니까? 일년 뒤에 그 중 한명이라도 남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저는 전에 경험해 보아서 이제 다시는 안합니다. 그렇게 해도 그 다음 주에는 한 명도 안 옵니다. 트럭으로 설탕이 한 트럭 나갔는데……. 그때 떡 값도 얼마나 많이 나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두 주 만에 한 명도 안 남았습니다.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자로 생각하지 마시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누가 삼천 명 했다, 누가 사천 명 했다 그게 참 전도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 일 년에 한 열 명하는 사람은 ‘나는 뭐야, 누구는 천 명 한다는데…….’하고 기가 꺾입니다. 진짜 전도 일 년 내내 뜨겁게 하면, 성경적으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막 데려다 앉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떨어지니까 돌봐야 합니다. 심방해야 합니다.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명, 한 명 정성 들여서 하려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를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삼천 명! 이런 거 꿈꾸지 마십시오. 그런 교인 한 명만 오면 우리 교회 살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삼천 명이라도 연말에 그 중에 몇 명 남았는지 물어보십시오.
진정한 부흥이란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등록 카드가 얼만큼 되느냐에 속지 마십시오. 굳이 따지려면 구역이 몇 개가 늘었느냐를 따지십시오. 그러면 정확합니다. 구역이 열 구역 늘었느냐, 백 구역 늘었느냐, 세 구역 늘었느냐, 이게 진정한 부흥이지 등록 카드가 이만큼, 늘었다는 건 다 소용이 없습니다. 오천 명이 왔다 갔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28. 교회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라.
어떤 목회자가 교회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안되어서 문제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변화가 안됩니다. 지금은 성도들이 우리보다 더 똑똑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저들을 변화시키기 전에 내가 깨져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아주 박살이 나면, 내가 불이 붙어 버리면, 내가 체질이 변화되면, 내가 완전히 새롭게 되어 버리면 저들은 저절로 불이 붙고, 저절로 깨지고, 저절로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부서지려고는 안 하고 무슨 정보나 수집하려고 하고 자료나 얻으려 하고 “성장하는 방법이 뭐냐?” 이런 식으로 묻는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짓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이 것이 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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