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와 기복신앙(김영재 교수)
한국 교회를 잠식하고 있는 기복신앙은 어떻게 있게 된 것일까? 한국교회 안에 있는 기복신앙은 밖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가난해진 사회적인 상황의 영향으로, 혹은 1960년대 이후 경제 성장 제일주의의 사회 풍조의 영향으로 기복신앙이 유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상황의 영향으로 더 극성스럽게 된 것으로 볼 수는 있겠으나 기복신앙은 한국 교회 안에서 자생한 것이지 밖으로부터 유입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회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회의 지체인 신자 각자가 곧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신자 각자의 신앙적 성향은 사회적인 배경이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과 동시에 누구나 가진 기복신앙을 두고는 교회 안과 밖의 경계(境界)가 없다.
기복신앙에 관하여 말하려면 기복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할 것이다. 기복신앙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개념에 미치지 못하는 복 이해에서 복을 구하는 신앙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복은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생물과 사람의 생육과 번성과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근원적인 활력소이다(창 1:22, 28).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복의 결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실도 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얻는 것들, 즉 부귀와 권세, 건강, 장수 등등을 복 자체인 것으로 착각한다.
기복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복 주시는 하나님보다는 복으로 말미암아 얻는 요소들에 더 관심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이 아니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이기적인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에게 순종하는 삶게 되며 그러한 복이 아브람함과 그의 자손에게,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민에게 베푸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 복은 미래적이고 영적이며 영원한 것임을 가르치신다. 이러한 약속을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새롭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하신다.
기복신앙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복을 구하는 신앙이지만, 종교적인 신앙의 출발이요 핵이기도 하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신적인 능력을 믿으면서 자신의 불안을 떨어버리고 안녕과 평화를 희구한다. 그러므로 기복신앙은 복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한 신앙이지만, 왼통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혹은 욕구 충족을 위하여 찾는 신앙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한계와 불안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면서 찾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기복신앙은 기독교 신앙으로 접목될 수 있으며 기독교 신앙으로 승화될 수 있는 종교적인 신앙이다.
성경에서도 기복신앙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는 종교적인 질문은 자기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생각에서 묻는 다분히 기복적인 질문이지만 기독교 신앙으로 자랄 수 있는 씨를 배태하고 있는 질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자주 독립국의 시민으로 당당하게 살며 불행한 처지에서 벗어나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능력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를 자기들에게 해방과 평화를 가져다 줄 메시아로 알고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복 신앙을 가진 백성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군중을 먹이시면서 그들의 욕구를 들어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기복신앙을 마냥 용인하시지 않으신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구한다고 나무라시고 저들이 당신을 찾는 것은 기적을 본 때문이 아니고 먹고 배부른 때문이라고 탄식하신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아니 우리에게 성숙한 신앙을 가지도록,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게 되라고 타이르시며, 천국에 관하여 가르치신다.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지 가르치신다. 천국의 백성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기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또한 산상 설교에서 천국의 백성이 누릴 참된 복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부와 권세를 가진 자에게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예수 당신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신다.
부 혹은 명예를 얻거나 권세를 누리거나 병도 없고 모자람이 없이 괴로움을 당치 않고 평안히 살며 장수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사고나 가치관에 대한 거역이며 도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른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하려고도 않는다.
기복신앙을 가리켜 물질적인 복을 구하는 신앙이라고 하면 부분적으로 옳은 대답일 뿐이다. 부자 청년이나 제자들처럼 영생을 구하거나 하늘 나라의 영광을 구하더라도 하나님을 중심하지 않고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는 신앙은 기복신앙이다.
성경은 복을 추구하여 교회로 나와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신자들은 자기 중심적인 기복신앙을 지양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존귀함을 드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사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가르친다.
한국 교회의 신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보다 정화되는 방향으로 성장하기는커녕 기복신앙 쪽으로 더 왕성해져 온 것이 문제이다. 그것이 언제부터 어떤 요인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한국 교회 내에 기복신앙이 두드러지게 된 것은 아마도 1960년대부터인 것 같다. 온 나라가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잘 살아보세” 구호를 외치며 경제 성장을 이룩하자고 할 때였다. 교회 일각에서 “적극적인 사고”라느니 “삼박자 축복” 등을 내용으로 설교하는 교회가 크게 성장을 하면서 그러한 주제의 설교가 온 한국 교회에 만연되었다.
예수를 믿으면 병 나음을 얻고 많이 바치고 헌신하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말하는 설교는 사람들의 기복신앙을 부추겼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기복신앙이 만연될 수 있는 기틀은 이러한 설교가 보편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본다.
교회가 해야 할 과업이 선교와 구제인데 한국 교회가 일찍이 자립하는 교회가 되면서 전도, 즉 선교에는 힘을 기울였으나 구제 봉사는 소홀히 해 왔다. 한국 전쟁 당시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고아원을 운영하여 전쟁고아들을 돌보았으나 이를 지원한 것은 한국 교회가 아니고 외국의 교회와 외국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당시는 어려워서 그랬겠지만 후에 나라 살림이 나아지면서 교회도 여유가 있게 되었으나 그런 일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교회가 사회 사업을 시작하여 키우고 나중에 복지 사회를 지향하는 국가가 이러한 사업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였다. 이런 과정을 세속화 과정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초기 한국의 기독교 병원들이 수익금으로 전도에 힘쓰고 개척교회를 돕는 것을 큰 미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 병원은 소위 인술을 펴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기관이다. 가난한 환자, 다른 병원에서 받아 주지 않는 환자를 치료해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푸는 일을 실천해야 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전도비 각출을 위하여 혹은 신학교나 기독교 기관을 돕기 위하여 수익을 올리는 것을 잘하는 일로 평가하고 그것을 당연시하다 보니까 기독교 병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푸는 본래의 기능을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오늘의 많은 기독교 병원들이 일반 병원이나 다름이 없이 가난한 환자는 받기를 꺼리거나 거부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교회나 선교 기관이 병원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교회 역사에서 그런 예는 없다. 교회가 병원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는 연보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기독교 병원이나 일반 병원으로 하여금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한국 교회는 그런 일을 거의 하지 못했다.
디아코니아, 즉 이웃의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은 돌보지 않고 사회 봉사에 인색한 한국교회는 결국 종교적인 면에만 관심을 가지고 전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 비대만 추구해 온 편이었다.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데, 이웃 사랑을 영적으로만 해석하여 전도에만 힘쓰고 실제적인 구제 사업은 소홀히 함으로써 특히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해 왔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의 신앙은 기복적인 신앙이다. 야고보서에 따르면 죽은 믿음이다.
한국 사회가 오늘날에 보는 바와 같이 부패하게 된 것은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를 기용함으로써 사회 정의에 대한 가치관이 전도된 데에서 온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고 그냥 덮어둠으로써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는 가치관을 흐리게 만들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은 지도자들이 이끄는 교회는 윤리의식이 둔감한 교회가 되기 마련이다. 윤리의식이 둔감한 채로 종교만 추구하는 신앙은 자기 중심적인 기복신앙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는 해방 이후 신사참배 회개와 신학적인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온 교파 교회가 분열하게 되었다. 가장 큰 교파인 장로교는 1952년부터 분열하기 시작하여 걷잡을 수 없는 분열로 치닫게 되었다. 그 일로 말미암아 교회는 구조적으로 비윤리적인 교회로 실추되었다. 분열될 당시에 겪어야 했던 교회내의 물리적인 싸움도 그러할 뿐 아니라 교세 확장을 위한 지속적인 경쟁이 한국 교회를 비윤리적인 교회로 만들었다.
교회 분열과 교세 확장 경쟁으로 인한 교회의 난립, 사회의 산업화로 인한 농촌의 인구의 도시로의 이동, 신도시의 개발 등으로 인한 주민의 이동 등등으로 지역 교회 제도는 와해되고 회중교회 유형의 대교회들이 생기는가하면 대교회주의와 개교회주의 사상이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하게 되었다.
웬만한 크기의 교회는 저마다 교인들을 먼 거리에서부터 버스로 실어 나른다. 그래서 멀리서 오는 교인들로 구성된 교회나 먼 교회로 찾아가는 개개의 교인들이 모두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과는 괴리된 상태에서 존재하고 생활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혹은 교인들이 관심을 두고 봉사할 수 있는 지역 사회, 즉 이웃을 그만큼 상실하게 된 셈이다. 교회는 그래서 지역 사회와는 격리된 채로 자신의 비대만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폐쇄된 종교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교세의 확장과 교회의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것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가치관을 갖게 되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의 대상인 개개인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 자체를 목회의 목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교회의 사업, 즉 전도를 목적으로 생각하고 개개의 교인을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그래서 잘 사는 것이 복이라는 구약적인 축복관을 가르치고 십일조와 헌금을 철저히 바치는 것이 교인의 의무인 것으로 강조하게 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신학적인 정립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므로 구약적인 축복관이 신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축복관을 통한 검증도 없이 그대로 가르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교회에 따라서는 헌금의 종류도 많이 두고 갖가지 헌금 봉투도 비치하고 있다. 헌금한 사람의 이름을 주보에 기재하는 일, 예배 시에 십일조와 특별헌금을 한 이들을 호명하고 특별히 기도하는 관행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예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창조주이시오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하지 않고 바치는 대로 복 준다는 저급한 바알신과 샤만의 신으로 추락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관행이다. 그러나 개혁의 의지를 가진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많이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와 우리 각자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기복신앙을 승화시켜 주시기 기원한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가 날마다 새로워져 참 신앙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 끝 -
<글. 김영재 / 정리.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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