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성경적 축복관

수호천사1 2011. 4. 22. 13:38

 성경적 축복관



 

 하나님께서는 첫사람 아담에게 당신의 거룩하신 축복의 숨(생기)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생령이 되게 창조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고,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할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일 때 축복은 영적인 내부로부터 물질적인 외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즉 하나님의 축복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분리시키고 현실 세계보다 차후 세계에 또는 Idea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전통적 서구사상의 뿌리인 희랍사상과는 달리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적 축복관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한국의 무속주의 토양에 쉽게 수용될 수 있었고 교회성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나 그것이 올바르게 토착화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켰다. 성경적 축복관(Text)이 무속주의적 뿌리(Context)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무속주의적 뿌리(Context)가 성경적 축복관(Text)을 변형시킴으로써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무속주의적인 축복관은 성령론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혼동, 왜곡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자연종교인 무속주의는 종교의 출발이 나의 필요(need)이고 나의 필요를 위해 신적 존재가 요청되거나 이용된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종교적 관점에서의 성령론 이해는 성령님의 사역의 목적을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그래서 영육간에 만족을 얻기 위한 도구화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축복관으로 변질된 성령론을 따르는 일을 경고하며, 이를 위해 한국교회의 상황(Context)인 무속주의 보다도 성경적(Text) 관점의 축복이 어떻게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구체화 되었는가를 보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성령론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오늘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시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파괴함으로 더이상 축복은 영적인 내부로부터 물질적인 외부에 까지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인류는 영적으로 죽게 되었고 물질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피조물인 인류를 끊임없이 사랑하신다. 비록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되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 없으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신 그의 사랑을 여러 차례의 점진적인 언약을 통해 계시해 주셨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기 위해 흘리게 한 짐승의 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해 흘리게 한 어린양의 피, 장막과 성전 안에서의 희생 제물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하기 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한결같이 신실하시고 변함없이 언약을 통해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안(In Christ)에서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회복케 하시는 영적인 것과, 아들로서 모든 피조물을 구속에 동참케 하시어 물질세계까지 거룩케 하시는 일을 포함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은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제자(증인)로 삼는 과정 속에서 오늘날도 점진적으로 계속 되어진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모든 믿는 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대사명" 즉 땅 끝까지 이르러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으로 제자를 삼게하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방탕한 아들(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때에 기뻐하고 즐거워 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이해하고 그 기쁨에 동참하게 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다시 구원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의 잔치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 참된 축복인 관점에서 현대 성령론을 이해해야 된다. 이런 점에서 성령님의 사역은 점진적인 계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계속성은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구속사적 역사성으로 시대와 상황을 구별한다.

본 논문을 통해 축복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있음을 밝히며 축복의 핵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 뿐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임을 살펴본다.


1장: 구약성경에서 축복을 약속하신 성부 하나님


A. 인류 타락 전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일반 은총의 축복

성경에 처음으로 나오는 축복이라는 어휘는 베라카(berakhah) 이다. 하나님께서는 5일째의 창조 일에 모든 동물들을 지으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토록 하셨다. 따라서 최초의 축복이 갖는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힘"이었다.

이어서 제6일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생기를 불어서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당신의 형상(Imago Dei)을 따라서 지음 받은 자를 동일한 단어로 축복하셨다.

비록 동일한 berakhah 라는 단어로 기록된 축복이지만 동물이 갖는 축복의 의미와 사람이 갖는 축복은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레이 앤더슨은 하나님의 형상이 피조물 속에 저절로 심어진 것이 아니라 부가적으로 주어진(endowment)것임을 올바로 지적하였다.

요하네스 페더슨에 따르면 축복하는 것(berekh)은 생동하는 힘을 나누어주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생기를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아담으로 하여금 생령이 되게 하셨고, 이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갖게 만들었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가 되었다. 이 힘은 영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자신을 유지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모든 다스리는 일을 가능케 하였다. 따라서 이것이 없이는 생령이 존재할 수 없는 그것이 축복(berakhah)이라 불린다.

여기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과 축복의 약속사이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 21,22)고 명령하신 데에서 최초의 축복상태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한 총체적인 생육과 번성 그리고 다스림의 회복을 암시한다고 본다.

제임스 패커는 이와같은 예수님의 행동을 "행동화된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이제 곧 제자들이 성령의 새로운 사역을 체험하게 되며, 그들의 맡아야 할 엄청나고도 새로운 임무에 수반되는 모든 필요를 갖추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과의 언약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클라우스 웨스터만은 축복은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내적인 힘과 그 힘으로부터 파생되는 외적인 좋은 산물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바로 있는 한 이 축복은 자손들에게 영적인 한 단위로서 전수될 것이요 이 축복은 단순히 가족관계에서 뿐 아니라 가축과 양을 기르는 농장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의 영역을 풍성케 하는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퍼 미첼은 말하기를 축복의 첫번째 중요성은 언약관계요, 그 다음이 언약으로 말미암는 모든 유익한 것들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같은 축복의 회복으로써 오늘날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해야 할 중요한 순서를 본다.

아담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금하신 실과를 먹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약 관계는 뱀의 거짓된 유혹의 말로 하나님 말씀을 대치함으로써 파괴되었으니 인간은 영적인 것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말미암는 모든 물질적인 유익한 것들도 잃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취한바 되었던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쫒아내시고 그룹을 동산의 동편에 두시고 화염검을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도록 두루 돌게 하셨으니 영원히 축복으로부터 버려지게 되었다.

타락은 인간 속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잃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대항으로 모든 것을 상실함이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올바로 반응할 때에 비로소 참된 축복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데, 레이 앤더슨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을 가리켜 구속(Reconciliation)이라고 하였다. 구속에 의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게 되고 건강과 거룩을 소유한 자로 위촉된다.


B. 인류 타락 후 구속주로서 특별 은총의 축복


1. 일반 은총을 내포하는 특별은총

타락 후에 일반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축복관계를 유지하기에 부족 되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로 하여금 그들의 본래적인 축복의 위치를 회복하도록 특별한 계획을 준비하셨으니 이것이 특별은총이다. 이 특별은총 안에서 일반은총은 그 본유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레이 앤더슨에 따르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피조물을 버리시지 않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올바로 반응하기를 회피하고 또 다른 반응을 찾는 모든 시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심판에 대한 증거라고 하였다.

특별은총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김성태는 그의 논문에서, 구약시대의 축복에 대한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에 동참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올바로 지적하였다.

폰 라드 역시 축복을 이런 구속적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는 행위와 축복하시는 행동들이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자로서의 역사하심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폰 라드는 구원의 개념을 사용할 때에 총체적인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내포된 구속하시는 행동으로 사용한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실 때에 그의 구원하심과 더불어서 늘 축복을 말씀하신다. 구속주로서의 약속의 씨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계속해서 축복하신다.


2. "씨"의 약속으로서 축복

a)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 - 아담이 범죄하고 동산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려진 자를 찾고자 소원하신다. 찾아 모으려는 동기(Gathering Motif)는 하나님 편에서 그의 잃어버린바 된 대상을 찾고자 하는 불타는 소원으로 부터 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을 약속하시고 아담대신 짐승을 희생시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b)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아브라함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에서 구체화된다.

아브라함은 노년의 나이에 약속의 씨인 이삭을 얻게 되며 그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하여 그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얻는 부활의 주님을 나타내는 참 씨의 모형임을 증거 하였다.

죤 스토트는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로 복의 근원을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사요 만일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들고 모든 민족에게 나아간다면 그들도 복을 얻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c)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 - 애굽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죄악의 굴레 하에 있는 사람을 보여주는 좋은 모형이다.

모든 애굽의 장자가 죽임을 당하던 밤에 어린양의 피를 인하여 이스라엘의 장자는 구원을 얻게 되어 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서 당신의 언약백성으로 삼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는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종국에는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에 매인다는 것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사역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계획과 보편구원론은 구별된다.

이스라엘은 육체적으로 더 이상 영원한 하나님의 선민으로 예외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을 부르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신비로우신 구원계획이시다.

여인의 씨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야의 언약을 통해서 구속사의 흐름은 참되신 씨인 예수그리스도의 날을 향해 움직여졌고 예루살렘의 시므온이 예언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방에 빛을 나타낸 자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였다.


2장: 신약성경에서 약속된 축복의 실현으로 나타나신 성자 예수님


A. 실현된 "씨"로서의 예수님

신약성경에 나타난 축복의 개념은 구약성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졌고, 모세를 통해 선언되어졌고, 다윗을 통해 확신되었던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 신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갖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뚜렷히 나타나며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난다.

신약에서 축복을 나타내는 언어인 율로게오(eulogeo)의 어간인 율로그(eulog)가 사용된 상황을 분석해 보면, 두 가지로 특징 되어진다. 하나는 축복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구원하시는 행위를 나타내며(갈3:8-9 행3:25-26 엡1:3), 또 하나는 구약에서 말해지는 형태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축복개념이다. 이런 구절들은 주로 복음서나 히브리서에서 발견된다.

이와 같은 축복의 두 가지 용도는 한국교회 안에 축복의 성취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갖게 만들었는데, 하나는 축복이 영적인 구원과 구약적인 물질의 형통까지 다 포함한다고 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를 도말하셨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고 영적인 것과 더불어 모든 물질적인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성령님의 사역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지금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기사와 이적 등의 모든 신령한 은사가 나타난다고 본다.

또 하나는 기독교인이 영적인 것보다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면 물질주의(Mammonism)에 빠지게 된다는 것으로 물질적인 풍성함도 구속적 언약이라는 점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이와 같은 약속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더불어 사라졌으며 신약의 경우에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성취된(Once for All) 구속사역에 대한 강조를 두는 것으로 지금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기사와 이적 등의 모든 신령한 은사가 계속된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클라우스 웨스터만의 지적과 같이 신약성경의 축복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말씀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영적인 구속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구약적인 물질적 현상, 즉 생육, 번성, 번창, 열매맺음 등도 포함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상 신약성경에 나오는 축복의 개념은 그리스도안에서 구원하시는 행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구약성경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물질적 형통에 대한 또 다른 면에서의 요소가 축복의 개념 속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웨스터만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함에 대한 메세지와 더불어 병을 낫게 하는 것과 사람들을 돕는 사명까지 함께 부여받았다. 비록 치유하는 것과 귀신을 내어 좇는 일이 천국복음의 메세지를 수행하는 표적으로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치유와 사람들을 돕는 일은 예수님의 사역과 부합된다는 면에서 결코 등한히 될 수 없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가 예수님의 수난,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라고 보았지만,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의 걸음에는 늘 그의 백성의 고난에 대해 동정하시고 또 그들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문제를 위하여 이적을 베푸시던 것들도 함께 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약성경은 약속의 씨요 구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원수 사탄을 물리치시고 물질과 영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참 축복에의 길을 열어 놓으셨음을 증거 한다. 그래서 웨스터만은 이와 같은 신약성경의 축복개념은 구약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으로 오신 예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샬롬(Shalom)과 같은 에이레네(Eirene)속에 가장 잘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평강은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자유, 고요한 안전의 확보, 풍성함과 생각될 수 있는 한 최대의 복락 등이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와 연약함과 저주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 안에서 새롭고 풍성한 삶을 마련하셨다. 헤르만 리델보스의 말과 같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지고 극치에 이른 위대한 구원의 거룩한 사역이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역사의 극점을 나타내며 은혜와 심판을 가져오며 우주적인 차원이고 시간과 영원을 채우는 총체적인 시각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B.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죤 윔버에 따르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표징중의 하나는 그의 사역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고 한다. 예수님의 능력은 단순히 논리적 증거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삶이 본질적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일을 통해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필요뿐 아니라 육체적 필요까지 채우시는 구속주이셨다. 약속된 여인의 씨로서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부수시기 위해 오셨고, 또한 인류를 그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 전자는 이유(Cause)를 강조한 것이요 후자는 결과(Result)를 강조한 것으로 두 가지를 통해서 폭넓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모든 축복은 신약에서 성취되었다.

눅10:23-4 에서 예수님은 증거 하시기를 "---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과 기사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대한 준비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저희 가운데 임한 증거이기도 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뒤따른 기사와 표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뿐 아니라 신약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성장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했다.

메시야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사와 이적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증거이면서 동시에 인류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진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기사와 이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존 윔버의 신학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죠지 래드에 따르면, 귀신축출 등의 기사와 이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종말론적인 점에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그들의 병이나 귀신들림으로부터 구해 내는 마술사가 아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통해 죤 윔버는 그의 기사와 이적의 사역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세우는데, 그에 따르면, 하나님나라의 왕국은 오는세대(the Age to Come)에 속한 곳인데 그것이 현세대(This Present Evil Age)의 왕국인 사탄의 나라에 침범해 들어옴으로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선포함에 따라오는 기사와 이적은 예수님의 사역에도 중요했지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성장에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기사와 이적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회복되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3장: 오늘날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이루는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성령님


A. 하나님 나라 사역의 현재성 문제에 대한 논란

오순절 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적과 기사는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특별히 그들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이 사도 시대와 동일하게 오늘날 20세기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히브리서 13장 8절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씀을 그 주장의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은사주의 운동이나 신오순절주의도 결국 그들의 치유에 대한 신학적인 작은 차이점을 제하고는 기사와 이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난다는 점에서 오순절 주의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이와 같은 은사운동이 교회와 더불어 또는 교회 안에서 왕성해져 감에 따라서 치유, 방언, 귀신을 내어쫒음, 예언 등의 은사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점들이 전통적인 보수주의자 안에 나타나게 되었다.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성령에 의해 사도 시대에 주어졌던 특별한 은사들은 그 시대와 함께 그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 있는 이적과 기적에 대한 보고들에 대해 회의적이다.

특별히 벤자민 워필드의 가르침에 따라 기사와 이적의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초대교회의 사도들에게 허락하셨던 특별한 은사라는 점에서 초대교회가 지남에 따라서 그와 같은 은사들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레이몬드에 따르면, "사도와 선지자와 방언하는 자의 계시적 은사들을 포함하여 성령의 모든 또는 대부분의 은사들이 오늘의 교회에도 적법하게 현존한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은사운동은 "계시적 은사가 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교회생활로부터 끝났다"고 따르는 장로교회들에게 커다란 문제점을 던져 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따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I/ i, vi)에 의하면 계시적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은사주의 운동의 가르침은 양자택일의 문제이지 공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고백은 "신,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모든 종류의 계시에 수단과 방법들이 중단되었다"라고 고백함으로 과거에 객관적인 말로된 계시(Objective Propositional Revelation)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일이 현재는 정지상태(Being Now Ceased)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면, 현재에는 아무 사도들도, 아무 예언자들도, 하늘로부터 직접적으로 계시들을 받아 전하는 어떤 기관들로서의 사람이라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죤 스킬톤 역시 "교회가 심기워 지고 사도의 기초가 놓아지며(엡 2:20), 신약이 기록된 연후에는 사도의 직분과 그 직분에 두드러지게 수반되었던 표적들과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사도시대로 부터 영감된 메세지와 함께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한 신앙과 생활의 유일무오한 법칙이 되도록 계획되었으니 성경의 완결로 말미암아 성령의 새로운 계시적 은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죤 윔버는 전통적인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배재해 버린 듯 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사와 이적의 사역이 잘못될 것을 우려하거나 모르기 때문에 기사와 이적을 더 이상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대인의 세계관을 고침으로서만(Paradigm Shift) 모든 세대에 동일하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믿게 되고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기사와 이적에 관한 사역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도 기사와 이적에 관한 영적인 은사가 계속해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이라고 윔버는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기사와 이적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면 성경의 중요한 축복에 대한 가르침이 왜곡될 것이요 신비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환란의 때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타날 것이며 기사와 이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였다(마 24:24).

참된 표징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죽음에서의 부활을 보여주신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관심은 기사와 이적이 갖는 의미에 놓여야지 기사와 이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촬스 엔젠의 다음과 같은 경고는 매우 적절하다.

믿음은 기사와 이적(표적)에 의해서 고양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기사와 이적은 그 자신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복음은 기사와 이적보다 더욱 크고 넓다. 기사와 이적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간증으로서의 기능이 있다. 교회 그 자체가 표적인 것이다.

우리의 관심이 어떤 일의 결과로서의 기사와 이적보다는 기사와 이적이 있게 된 원인에 놓일수록 기사와 이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 할 수 있다.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약속의 씨 안에서 그의 백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엔젠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언약 가운데 관계하신다. 그런데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시간과 공간을 통해 관계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같이 언약의 형태가 역사성을 가짐은 언약의 배경으로서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상황이 고려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언약 안에서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어느 곳에서나 영원토록 불변하시는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와 더불어서 그 언약의 형태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유의해야 한다.

윔버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사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서 일하신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사들은 성령님의 권능을 입히운 증거이며, 이 성령님의 능력주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준비된다. 이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고전12:7) 하나님으로부터 부음 받은 것이니 신자가 은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때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윔버의 은사에 관한 견해는 흔히 은사를 소유(Possession)개념으로 이해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듯한 착각을 통해 교만에 빠지기 쉬운 함정을 벗어나게 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과정을 통해 그 자신이 주님의 제자로 세움을 받게 된다는 유익이 있다.

그러나 빈야드교회가 출판한 책자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병고치는 은사가 행하여졌던 862건 중에서 32%(279건)는 많은 고침을 받았고, 26%(222건)는 어느정도 고침을 받았고, 나머지 44%(366건)은 전혀 고침을 받지 못하였다"는 기록은 은사가 소유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때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어짐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겸손의 표는 될지 모르지만, 성경은 진정한 의미의 병고치는 은사가 행하여 질 때 완전히 병에서 놓임받았음을 증거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오늘도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을 믿되, 오늘날의 치유나 축귀 또는 다른 이적과 기사들이 사도시대와 동일하다고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사를 따라서 각각 다른 때에 다른 목적을 위한 은사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도 사도의 권위와 은사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데이비드 왓슨의 말처럼, 오늘날도 사도시대에 존재했을 은사들이 동일하게 존재해야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각양 다른 은사를 각양 다른 목적을 위해 주시고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점은 이천년전에 일어난 사건이 오늘날도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천년전에 종들을 사용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사용하시는가 하는 점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천년전과 오늘의 비교가 아니라 영원토록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역을 위해서 오늘날도 성령의 은사들을 축복으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나타내신다. 이러한 은사들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케 하여 교회를 성장케 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기사와 이적 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기사와 이적의 현상이 오늘날 계속되는가 아니면 중단되었는가에 우리의 관심이 있을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사와 이적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메시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님의 사역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도 성령께서 계속하여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이루신다는 견해가 구약과 신약, 사도시대와 오늘의 시대적 차이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피터 임이 올바로 지적한 것과 같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는 항상 그리고 모든 상황 속에서 언약적인 관계라는 계속성(Continuity)이 있는데 상황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을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과거보다 좀더 풍성히 그리고 깊고 의미있게 발전적으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구속적인 은혜를 점진적으로 보이심으로 축복하시는데 특별한때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자유롭게 온갖 다양한 은사들을 허락하신다. 또한 정경의 완결(The Close of the Canon)이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물론 계시적인 은사가 오늘날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도시대에 교회의 초석을 놓는 일을 위해 사도들을 특별하게 사용하셨다는 점에서 사도시대에만 주어진 독특한 은사들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오늘날도 사도시대와 동일한 은사들이 나타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구속을 이루어 가시는 당신의 계획을 따라 이 시대에 필요한 은사들을 성경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나누어주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은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교회를 축복하시고 성장시키신다.

 

B.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축복인 하나님의 은사들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교회의 질적이고 양적인 성장을 위해서 영적은사의 발견과 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사실상 대부분의 은사에 관한 연구들이 극단적이거나 변증적인 성격을 띨 뿐 실제적인 교회의 생활에 적용시킬 만한 은사에 관한 연구가 적었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케네스 킹혼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등한히 했던 이유를 아래와 같이 3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영적인 은사들을 통해서 교회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대한 교회의 무지함, 둘째,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의식 못함, 셋째,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든 부르시고 사역하도록 하심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자 함 등이다.

그리고 킹혼은 "이와같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무관심은 개인의 영적성장을 억압시키고 교회의 사역에 장애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경고 하였다. 케네스 버치는 주장하기를 은사에 대한 관심은 이제 교회의 변방에 머물던 몇몇 광신자들의 독점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류 안에서도 연구되어지고 또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교회사를 크게 세 가지 영향권아래 분류하면서, 첫 번은 로마 카톨릭의 시대였고, 둘째는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소위 오순절주의라고 불리는 제3의 세력하에 교회가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현대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올바로 행사되어지기만 하면 교회의 영적인 삶을 강화시키며 통일성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이루고 있고 특별히 평신도 사역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통해서 성령의 은사는 급격한 관심이 되고 있다.

포울 올자라에 따르면, "모든 기독교인은 그가 그리스도의 지체인 몸 안에서 감당해야 할 적어도 하나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 때때로 성령께서는 어떤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여러개 묶어서 주시는데 그 중에 어떤 것은 더욱 중요하고 나머지는 보조적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1. 성령의 선물과 성령의 은사들


성령의 은사들을 제 2의 축복으로 보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현안의 문제점이다.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신자가 제 2의 축복인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관점은 비판되어야 마땅한데, 메릴 엉거는 지적하기를,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를 구원 이후의 경험과 동일시 할 뿐 아니라 이것을 성령의 선물과 동일시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선물은 구원 이후의 계속되는 어떤 경험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구원 그 자체가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엉거는 주장하기를 모든 신자들은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고 따라서 모든 신자는 구원의 결과로 성령의 은사들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킹혼은 이것을 구별하여 말하기를 신자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회심하는 순간에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는 성령의 선물을 값없이 받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에게 다양한 형태의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심으로 교회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수종들게 하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언약이신 축복은 교회 안의 다양하고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로 실현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축복하신다. 이런 관점에서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는 성령의 세례라 불리우는 초자연적인 경험과 구원의 연결성을 강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회심을 통한 구원의 도리를 등한히 여길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런 점에서 제2의 축복이라는 주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충족성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는 토마스 스메일의 경고는 매우 의미있다. 특별히 오순절주의자들의 기사와 이적에 관한 은사 중에 방언과 예언에 관한 강조는 대단히 주의를 요한다. 그들은 방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은사로써 방언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직 제2의 축복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케네스 버치는 이와 같은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에 대한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 오는 구원받은 표증"이라는 견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지적하며,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과 또 연계되는 사건 속에서 방언의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확증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양과 경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버치는 방언의 내용 역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사도행전 2장 11절은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방에서 몰려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제자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고 한다. 그들이 방언으로 들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특별한 설교(예언?)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었고, 그 뒤에 이어진 베드로의 설교(방언이 아님)를 통해 삼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버치의 이와같은 견해는 전통적으로 방언을 통역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과 동일하기 때문에 계시적 성격이 있다고 보고, 이와 같은 방언의 계시적 성격 때문에 계시의 종결과 더불어 방언도 종결되었다고 보는 보수주의의 견해와 상충되나, 방언이 구원을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는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를 새롭게 반성하여 돌아보게 만드는 시각을 제공한다.

결국 은사의 목적이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교회의 지체로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을 위한 사람의 봉사라는 관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이적의 은사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섬기는 은사들을 당신의 뜻을 따라서 특별한 때 특별한 목적을 위해 신자들에게 허락하시고 그들의 은사를 통한 봉사로 교회를 건실히 세워 나가시며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도록 하신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설교기능을 넓은 의미에서의 예언으로 보아서 목회자의 말씀사역을 가장 중요한 목회사역으로 이해해 왔다. 그런데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언의 은사를 좁은 의미에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메세지를 받아 일상언어로 전달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목회사역의 목회자의 설교 중심적인 관점에서 탈피해 평신도들도 목회사역에 참여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예언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하여 보조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으며, 교회의 지도자들의 권위 아래에 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빈야드 운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지식의 말'은 일반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로 이해하는 것인데 이 예언의 은사는 기록된 성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정경이 완결된 후에는 성경의 말씀에 버금가는 계시의 은사가 있을 수 없으므로 예언이라는 표현보다는 지식의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들이 말하는 지식의 말은 신자들이 서로 모여서 기도하거나 교제할 때 혹은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예언의 내용은 지금까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환경과 사실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위하여 성경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 예언의 말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언의 속성이 단순히 "성령과 더불어"가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성령과 더불어"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결코 성경과 상관없음이 아니라 성경의 지시를 따라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빈야드의 느슨한 예언관은 본문과 상황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상황을 위해 본문을 이데올로기화할 수 있는 위험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육신적인 재능, 성령의 은사들 그리고 성령의 열매


피터 와그너는 성령의 은사를 "하나님의 은헤로 말미암아 지체 안에서 사용되기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속성"이라고 정의하면서, 이와 같은 은사들은 성령님과 관계없이 자연적으로 자신이 소유하는 육신적인 재능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성령의 은사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능력(Gifts)으로서 때로 하나님께서 육신적인 재능을 사용하시거나 변화시키어서 특별한 때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성령의 은사로 사용되도록 하시므로 육신적 재능과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으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구체화된 능력을 구성하고 있는 재능 자체보다는 우리의 재능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패커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은사를 가졌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바로 지적하였다. 은사가 어떤 일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규정될 수 없고 그 일을 통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덕을 세우는 상대적인 요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사용하심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많은 경우에 우리가 은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영적인 나타남이기 보다 육신적인 어떤 재능이라고 보아야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구체화된 어떤 능력들이 성령의 은사들과 비슷하다 할지라도 사실은 육체적인 재능인 경우가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은사라고 칭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요건은 나타나는 능력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용하시는 축복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성령의 은사들과 성령의 열매를 구별하신다. 갈5: 22-23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신자가 자라고 성숙하며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성령이 충만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모든 신자는 그들의 신앙 안에서 자라고 그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성령님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개발되어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해 허락해 주시는 성령의 은사들과는 구별된다.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무었을 감당해서 일해야 할 것인가 한다면, 성령의 열매는 신자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에 목적이 있다.

제임스 패커는 죤 오웬의 주장을 따라 "은혜가 없으면서도 은사는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수행함으로 영적인 유익을 줄 수 있지만,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즉 성령의 내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외인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사실상 성령의 은사들을 성령의 열매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는 영적으로 비뚤어져 있는 것이며 교정이 필요하다. 실상에 있어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의 영성의 차이는 성령을 통한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라는 실제적 내용에 있어서 보다도 사용하는 어휘와 집단관계, 그리고 자기표현에서 더 많이 드러날 뿐 사실상 은사의 체험은 때때로 주장되는 것보다 덜 독특하다는 점을 주의해 살펴봐야 된다.

  
A. 성경적 축복개념에 대한 한국적 상황화에 대한 필요


1. 상황화에 대한 올바른 교리화

헤르만 바빙크는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 계시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는 문화적인 진공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인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 속에 들어 오시는 구체적인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에게 상황화를 수반한다.

한국교회는 축복을 강조하는 무교의 배경을 가진 한국의 상황 속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와같은 급속한 발전을 평가하면서 한국교회 안에 성경적인 상황화의 인식 부족으로 말미암는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음을 돌아보게 된다. 특별히 무교적인 토양을 가진 한국 상황 속에서 성령론에 대한 부정적인 면에서의 상황화는 비록 그것이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이 크다 할 찌라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축복의 개념이 상황화 됨으로 바른 교회성장 신학을 세우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딘 길리랜드는 주장하기를 신학은 성경에 기초할 뿐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포울 히에베르트 역시 지적하기를 신자는 복음의 메시지들이 그들의 상황 속에서 분명해지도록 하는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비평적인 상황화의 모델로 과거의 세계관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무조건 수용하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권위와 그것의 해석학적인 상황적용은 비판적인 상황화의 필수적인 전제이다. 먼저 과거의 세계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와같은 사건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연구하고, 과거의 세계관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평가하고 그다음에 새롭게 상황화된 기독교인의 실행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챨스 크래프트의 준거점 전환 논리는 상황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과거의 세계관이 내면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을 갖게 되어야 비로소 올바른 상황화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외형적인 형태의 상황화가 아닌 세계관의 심층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성경적인 상황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헤르만 도예베르드는 지적하기를 서구의 사상사는 헬라의 형상과 질료라는 2원론적인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며, 기독교가 이와 같은 서양사상의 뿌리를 벗어나지 못함으로 하나님 말씀이 서구사회 속에 올바로 상황화 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절대적 계시이신 하나님 말씀이 출발점이 되지 못한 모든 상황화는 필연적으로 종교적인 반정립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상황화는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이 문화 상황으로 말미암아 손상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모든 문화의 뿌리 속에 있는 반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한국교회 안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성령론의 문제는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성령론에 대한 한 신학적 분야의 논쟁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 상황속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올바로 상황화될 것인가 하는 총체적인 문제인 것이다.


2. 성경적 축복개념의 한국상황 안에서 상황화


성경적 축복관을 한국교회에 상황화 시키는 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이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옮기어져야 한다. 무교적인 축복관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자신은 부인되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성경적 의미의 축복관을 떠나서 기복적인 이기주의로 축복을 이해하게 만들고 이를 위한 성령론을 이끌어 낸다.

그레샴 메이첸은 기독교가 인간의 어떤 갈망에 기초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예수의 오심과 삶, 죽으심, 육체적 부활등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믿었다. 메이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인간의 소원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입으신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이었다.

성경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의 세계관이 전통적인 무교의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적인 것으로 바뀔때 비로소 성경적인 축복관이 한국상황 속에서 올바로 상황화 될 수 있을 것이요, 이와같은 축복에 대해 올바로 응답하는 성령론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축복은 인간의 열망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는 은혜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축복에 대한 이해는 사람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사람이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B.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재평가


1. 한국 상황 안에서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재평가

무교적 전통 하에서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는 통로로서의 무속인은 절대적이다. 정용섭은 지적하기를 이와 같은 무교적 전통은 한국의 기독교 예배와 조직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목회자는 축복의 시혜자로서 예배의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평신도는 축복의 수혜자로서 예배에 있어서 방관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한국교회 안에 축복으로 주신 성령의 온갖 은사를 하나님이 주시는 특혜로써 이기적으로 즐기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의 일을 위한 소명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경적 관점의 축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의 본질적인 변환이 필요하다. 창세기 12: 2-3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되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땅의 모든 백성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 혼자만 축복을 소유하고 즐기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고 아브라함을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는 복의 수종자로 세운 것이었다.

축복을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축복인 성령의 은사들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봉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의 은사를 축복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축복의 시혜자와 수혜자의 관계로 보는 관점은 수정되어야 한다.

챨스 엔젠에 따르면 모든 신자가 입을 열어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사도 바울은 가르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연합하여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만물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목회자나 평신도나 본질상 축복을 받는 자로서 동일하게 교회를 이루는 지체에 불과한 것이다. 축복은 자신을 위해 즐기기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의 은사임을 알아서 목회자나 평신도나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 중요하다.

성경적인 축복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화해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케 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응답하게 만든다. 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향해 축복하시는 거룩하신 뜻을 보는 일에 대해 눈을 열고 깨닫게 되어야 한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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