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절의 세 가지 전통
고난주간의 확장인 사순절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의 제자로 나선 이들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신자들은 당연히 그런 고난에 동참해야만 한다는 뜻이리라. 이 절기에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신앙 습관이 행해졌다.
첫째, 신자들은 성회수요일에 교회에 가서 재를 이마에 발랐다.
재는 인간이 가장 처절한 상태로 내려간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죄와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죄의 결과로 죽어 재로 변한다는 사실은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엄중한 실존이다. 사람들은 그걸 간단히 잊는다. 아니 그걸 잊도록 강요받고 있다. 오늘의 문명은 우리를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뻔뻔하게 살아도 괜찮은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살지 모른다는 망상을 가져도 좋은 것처럼 유혹한다. 중세기에는 ‘아모르 수이’라는 명제가,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제가 중요한 화두로 작동한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기억할 때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리라. 오늘 사순절을 맞는 기독교인들도 순식간에 재로 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 신자들은 사순절에 금식했다.
금식 습관은 인간의 가장 강렬한 본능인 식욕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행위이다. 시대에 따라서 약간씩 강도의 차이가 있었다. 사순절 초창기에는 저녁 전에 한 끼의 식사만 허락되었다. 육류는 물론이고 달걀과 우유제품도 먹을 수 없었다. 오늘 수도원이 아니라 세속 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사순절을 지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식욕을 절제하다는 기본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의 문명은 먹는 것을 탐하게 만든다. 식욕을 자극하는 것으로 삶을 확인시킨다. 그게 어느 정도로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전형적인 예만 짚겠다.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크게 논란이 된 광우병 현상은 사람들의 육식 편향성에 의해서 벌어진 문제이다. 질 좋은 소고기를 충분히 제공하기 위해서 많은 곡물을 사용한다. 유전자 변형 옥수수와 콩이 재배되고, 곡물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기도 한다. 제삼세계 어린이들의 굶주림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런 세태에서 기독교인만이라도 먹는 것을 절제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절제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사순절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무절제한 성적 욕망도 포함된다.
셋째, 사순절 기간에 신자들은 구제와 선행에 힘을 썼다.
바로 위에서 두 번째로 언급한 금식이 식욕이라는 인간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구제와 선행은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한 생존 본능을 제어하는 신앙 태도다. 말하자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차원으로 영적인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이를 성만찬 영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형제애로 나눈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더불어 살아가려면 결국 ‘너’와 공동체를 배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제로 자신의 소유를 나눠야 한다. 신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오직 개인의 경쟁력만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기심만이 사회의 동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시대정신에서 ‘너’는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마틴 부버가 지적했듯이 이제 ‘너’는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라는 사물이 되고 말았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웃을 향해 개방적인지, 사회적인 소수자와의 연대에 진지한지 질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자신의 소유를 얼마나 포기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 없이 사순절 영성은 공허하다. 수백억 원, 수천억 원짜리 교회당 건축이 큰 고민 없이 시도되는 한국교회가 사순절 영성을 말한다는 것은 속과 겉이 이중적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사순절에 대한 세 가지 전통은 기본적으로 자기부정을 가리킨다. 고난의 영성이라 해도 좋으리라. 재를 이마에 바르는 것이나 금식과 구제는 모두 다소간 자기를 부정하며, 이로 인한 고난을 담보한다. 고난의 영성! 말은 좋다. 솔직하게 묻자.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서 여전히 유효한가, 가능한가, 적실한가? 오늘과 같은 소유와 소비와 풍요를 신처럼 떠받드는 시대에 이런 부정의 영성, 고난의 영성이 신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인가?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일반 신자만이 아니라 소명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목사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사순절 영성은 말 그대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말인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말장난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능력이다. 사순절 영성도 삶의 능력이다. 이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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