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사도행전 29장을 쓰는교회

수호천사1 2011. 2. 28. 12:34

사도행전 29장을 쓰는교회

행 2:42-47 /하원식 목사

 

지상에 있는 교회는 두 종류로 대별할 수 있다. 그것은 교회다운 교회와 교회답지 못한 교회다. 교회답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지키는 교회를 말하고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를 말한다. 교회의 본질이란 신학적 명제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그 교회가 지니는 특성들이 무엇인가를 초대교회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런던 바이블 칼리지(London Bible College)의 학장으로 있었던 마이클 그리피스(Michael Griffiths)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라는 책에서 "현대의 상당수 교인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매 주일마다 그들은 독특한 건물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석하며 예로부터 지켜오던 익숙한 예배의식을 행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가 그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더 이상 교회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러한 때에 다시 한번 교회가 무엇이며, 또한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한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살펴보면서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보겠다.

 

김연숙씨가 쓴 「흔들리는 신앙, 붙들어 주소서」라는 글에 22년 동안 미국 이민 교회에서 108번 교회를 옮긴 성도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1년에 약 5번 정도, 평균 두 달에 한번 정도 교회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이상향의 교회를 찾았다. 그런데 교회를 옮기는 날로부터 그 교회의 단점을 찾기 시작한다. 목사의 허물을 맨 먼저 찾아낸다. 그리고 자기 눈에 드러난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단다. 교회 주보, 성가대, 주방, 교인들의 태도 등 108개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단다. 그가 병으로 죽게 되자 어느 교회도 그의 장례식을 해 줄 수가 없었단다.

 

이유는 그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 108번째 교회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 그의 장례식을 해 주었다. 우리가 이왕 신앙생활을 할 바엔 좋은 교회, 이상적인 교회를 찾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이상향의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교회는 비신자를 전도하여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 보려고 몸부림하는 교회다. 우리교회는 이상향의 교회는 못되지만 그 이상을 향해 가고 있는 교회가 되고 싶다.

 

 최초의 기독교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사건을 통하여 탄생한 예루살렘교회다. 이 최초의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보여주었다. 이 세상에는 이상형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이상형의 교회는 성경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향하여 가야만 한다. 절대로 남을 바라보며 왜 거기까지 못 왔느냐는 핀잔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섯다고 하는 자는 넘어진다. 오늘 나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교회의 매력을 생각해 보며 우리 교회의 모습을 정리해 가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교회'그러면, 여러분 속에 들어있는 이미지가 무엇인가? 예배드리는 곳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단순히 예루살렘에 이런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이래야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교회는 반드시 이 모양을 만들어가야 된다. 사실 하나님 믿는 것은 쉬운데, 교회 다니는 것이 더 어렵다.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부대끼니까 힘든 것이다.

 

1. 초대 교회의 매력은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것이었다.

초대 교회의 매력은 모이는데 있었다. 초대 교회에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언제든지 모였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고정된 교회로 이동하는 교회가 모인 곳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성령을 모시고 다니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곳을 축복하신다.

 

미국의 어느 한 할머니가 100만 달러 짜리 복권에 당첨됐다. 그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 분명 기절할 것이 분명했다. 만에 하나 심장마비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었다. 복권회사는 고민이 생겼다. 방법을 연구하다가 마침내 해법을 찾아냈다. 그 할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기절하지 않도록 이 사실을 조심스럽게 전해주십시오"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할머니께서 100만 달러 짜리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돈 모두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그 할머니 말을 듣자마자 목사님이 기절해버렸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노다지의 꿈을 안고 몰려든다. 교회의 모임은 그런 일확천금을 노리는 복권 열풍이 아니다. 세상의 것을 바라고 모이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늘의 노다지를 바라고 모이는 모임이다. 한 사람이면 개인이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공동체(단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의 특징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다. 모이는 것도 길들여져야 한다.

 

초대 교회의 특징은 모이는 것이었다. 오순절 날이 이르매 "저희가 한 곳에 모였더니"(행2:1)라고 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라는 말씀대로 날마다 모였다. 초대 교회는 갈수록 모이는 자들이 늘어났다. 교회는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모여야 한다. 외부적인 쓰임새는 다를지 모르지만 영혼의 가치는 어느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꼭 같다.

 

교회는 쓸모 없는 사람, 잡동사니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영아원이요, 탁아소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말했다. 이들은 날마다 모였다. 얼마나 좋으면 매일 모였을까요? 특별한 모임이 없어도 그냥 모이는 것이다. 은혜 받은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는 예배 끝나고 보면 안다. 예배 끝나도 교인들이 안 가는 교회가 은혜 받은 교회요. 예배 끝나자마자 교인들이 금새 다 가 버리는 교회가 은혜 받지 못한 교회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날마다 성전에 모였고, 그리고 집에서는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했다. 지나치게 바쁜 사람은 문제가 있다. 정말 정직하게 일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섬길 만한 시간이 충분히 있다. 남는 시간을 잘못 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 사람이 모이지 않아서 텅 빈다면 십자가를 내리고 공장이나 공회당으로 사용해야 한다. 과거의 구라파 교회의 신자들은 얼마나 신앙이 좋았던지 교회의 색유리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수십 만 불씩 헌금하였다. 그러나 현재 유럽 교회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예배당이 텅텅 비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를 1달러씩 받아 그것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이와 같은 말을 한다. “구라파에 신학은 있으나 교회는 없다.” “구라파에 교회 건물은 있으나 신자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쨌든 모여야 한다. 무슨 이유로 모이는가? 그것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다.

 

2, 초대 교회의 매력은 믿는 사람이 다함께 물건을 서로 통용한 것이었다.

초대 교회에는 모든 믿는 사람이 모여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이 다함께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이와 같이 물건을 서로 나누게 될 때 기쁨과 신뢰가 있는 평화스러운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다 통용하고"(행2:44) 그들은 서로 자주 만나서 말씀을 배웠고, 성도간에 영적인 사귐인 교제를 가졌고, 서로 떡을 떼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성경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 안에 새로운 질서가 생기는 것을 그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와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작은 씨앗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서로 물건을 통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서로의 필요를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을 나눠주며, 다른 사람을 것을 받기 시작했다. 소위 유무상통이 시작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동경한다.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  많은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이상 사회, 즉 유토피아를 바랐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성령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떡을 떼는 교제를 갖지 시작했을 때, 유무 상통하는 놀라운 일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회, 성령의 사회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독특한 것이다.

 

세상에서 그동안 이상사회가 될 것이라고 떠들던 말크르스등의 공산주의 오늘의 김정일 집단이 떠드는 공산주의는 강제적으로 정의를 실천했다.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인 정의에 불과하다. 진실된 의미에서의 정의가 아닌 것이다. 진정한 정의는 성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 준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회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 그것이 성령이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사회인 것이다. 이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회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42:45) 이 세상에 물질과 돈만큼 힘있고 존경받는 것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돈은 힘이 있다. 여기 두 가지 재미있는 단어가 있다. 재산이라는 말과 소유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집 한 칸이라도 다 재산을 갖기 원한다. 그러면 집 두 칸이 있으면 만족해하는가? 아니다. 그 다음에는 세 칸 가져야 한다. 그것이 물질의 속성이다. 돈이나 물질에는 만족이 없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돈이 곧 하나님인 것이다. 소유란 무엇인가? 사람은 끊임없이 소유의 노예다. 여자도, 권력도, 세상도, 땅도,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싶은 것이 바로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되는가?

소유가 인생의 최고의 축복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이 소유를 포기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고 노동 혁명을 시켜서 공산사회를 만든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유의 분산이 아니다. 그런 것은 진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진짜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 소유와 재산을 나눠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초대 교회에 나타난 성령 사회, 나눔의 사회다. 우리는 자본주의 모든 약점들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세상의 모든 '주의(ism)'라는 것은 다 인본주의이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과 제도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 그런데 성령님은 놀랍게도 초대 교회에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 주셨다. 그 동안 모든 교회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그리고 교회도 세상과 똑같이 민족주의를 말하고, 민주주의를 말하고, 공산주의를 말해 왔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회를 발견할 수 없었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면 우리는 눈을 뜨게 된다.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희생이다. 헌신이다. 자기 포기다. 물질을 포기하는 것이다.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누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내 시간도 내 인생도 내 재능도 나의 삶 전부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동체가 크건 작건, 5천 명이 모이건 500명이 모이건 아니면 50명 혹은 5명이 모이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그렇게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생활을 해야 한다. 혼자서는 개인의 사생활을, 모여서는 공동체의 공생활을 하여야 한다. 말씀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이 모인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고 선포했다.

 

교회의 특징은 서로 교제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순수한 신앙의 교제 이외에는 인정이 되지 않는다. 세상 적인 것이 배제되어야 한다. 이성관계, 금전관계, 친인척관계, 정치적인 관계, 사업관계, 등등의 세상 적인 이해관계가 배제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여서 가르침을 받았고, 음식을 함께 나누었고,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을 썼고,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누어 사용했다. 그리고 가진 자는가지지 못한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기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초대 교회생활의 특징은 기도였다. 그들은 성령 받기 위해 함께 기도했다. 병 낫기 위해 함께 기도했다.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기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사도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함께 기도했다(행12:12).

 

가르침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2)고 했다. 지도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르쳤다. 교인들은 가르치는 말씀을 배움으로 교제를 나누었다. 성도들끼리 모여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때에 칭송을 받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교회가 부흥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싶어했다. 구체적으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과연 무엇을 나누어야할까요? 오늘 이 시간은 옛적에 함께 신앙 생활하던 형제들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옛날을 생각하면서 그때 과연 나는 무엇을 나누며 신앙생활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한다.

 

첫째, 구원의 소망을 나누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모험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현재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히11:1)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모두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오직 믿음 하나로 장래에 기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갔던 아브라함과 같이 모두 신앙의 모험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히11:8) 물론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러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시고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하여 들이심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벧후3:13) 험난한 여정 중 믿음이 약하여 낙심한 성도에게 구원의 소망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를 일으켜 세워주어야 한다. 그래서 운명 공동체인 교회라는 배에 함께 탄 성도들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기업,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신앙공동체로서 함께 가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통로가 되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

 

둘째,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기독교의 특징을 한 마디로 대변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사랑'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역사에 투영된 종교다. 하나님은 죄인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사 죄인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절)고 증거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노라 하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생활 가운데서 성도들간에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았다면 그 안에 사랑을 소유했을 것이며 자연히 생활 가운데서도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이 참된 구원 백성임을 증거하시기 바란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아보고 고통 당하는 자를 일으켜 주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사랑치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참된 구원 백성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요일4:20)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3:18-19)

 

셋째,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

"기쁨은 나누면 배로 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 옳은 말이다. 기쁨은 나누면 나눌수록 늘어나고 슬픔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드는 것이다. 교회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성도의 모든 일상사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장(場)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개인주의는 교회에까지 침투하여 교회에서마저도 성도들간의 진실된 교제, 곧 삶을 나누는 교제가 사라져 가고 있다.

 

참으로 기쁠 때에 함께 기뻐하고 찬송하며 슬플 때에 같이 슬퍼하며 부둥켜 안고 기도하는 모습이 그리워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속히 이러한 개인주의적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야 한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절) 그러할 때 교회는 오늘날 개인주의로 메마른 현대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공동체에 동참하고픈 의지를 갖게 할 것이다. 나아가 교회는 교회대로 생명력이 넘쳐 남은 물론 성도 개개인은 장차 한국에서 주님이 주실 위로와 기쁨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보며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더욱 확신이 찬 신앙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에 맞게 적당한 재능을 주셨다. 즉 하나님은 개인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손재주를, 어떤 사람에게는 장사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술의 능력 등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일반적 재능 외에 성령께서 특별한 능력을 부어 주신다.

 

 그것은 우리는 '은사'라고 부른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이러한 은사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방언, 예언, 통역, 영 분별 등 참으로 다양하다.(고전12:8-10)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왜 이처럼 특별한 능력을 부어 주실까?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답변해 주고 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그렇다!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자기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유익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은사는 반드시 봉사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은사를 받았는가? 그 은사가 교회의 봉사를 위해 주어진 것임을 알고 절대 교만해 하지 마시오. 또한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마시오. 오직 은사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다른 성도들과 나누시기 바란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와 교회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엡4:13)

 

3, 초대 교회의 매력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초대 교회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기 때문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루살렘교회는 늘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는 교회였다.

 

그런데 여러분,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다.

예루살렘교회는 입으로만 찬송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자체가, 행동과 태도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찬송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믿는 자에게든, 안 믿는 자에게든 칭송과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게 되고 그러다 보니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지고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한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높였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을 말씀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며 축복하심을 온전히 인정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며 축복임을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마땅한 성도의 모습이다.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찬미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할 때 하나님을 우리를 언제나 사랑으로 만져주실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교회는 감사하는 교회다. 감사가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감사가 풍성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인색한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감사가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감사가 풍성해지면 나눔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사가 풍성한 교회에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자를 더하시는 부흥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함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스런 기쁨에서 나오는 당연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다윗의 삶 자체가 찬양이었고, 마리아(눅1:46-56)도, 사가랴(눅1:67-79)도, 시므온(눅2:29-32)도, 심지어는 최후의 만찬까지도 찬양으로 마침을 볼 수 있다.(마26:17-29,30)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함께 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은혜를 더욱 누리게 되는 것이다.

 

왜 찬송하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보통 주어진 시간에 하루 세끼를 먹게 되어 있다. 이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 신체에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다. 그래야 만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는 사람도 있다.

 

찬송은 언제 하는가?

시도 때도 없이 해야 한다면 넌센스일까요?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도 찬미하였다고 하는데 시간을 정해서 했겠는가? 유대교는 제사를 정해진 시간에 드린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어느 때든지 드려야 한다.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는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씀하였다.

 

세상 사람들도 답답하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한다. 묵은 감정을 털어 내고 기분 전환을 한다. 그러나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찬송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므로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찬송으로 마음이 적셔 본 일이 언제인가? 찬송하다가 눈물을 흘려 본 일이 언제인가? 성령으로 내 심령을 채워 본 일이 언제인가?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찬미는 하나님을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것이다. 혼자 찬송도 좋지만 공동체의 찬송은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를 가져온다. 회개의 영이 운행한다. 묵은 심령이 깨달아지고, 죄악을 보게되고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온 삶을 버릴 수 있다. 찬송하면 내 영혼의 분위기가 좋아진다. 나가서 가정도 교회도 분위기가 행복해진다.

 

교회라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냐는 것을 정의를 내리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모든 신앙의 세계의 시작에서 마지막 가장 높은 단계에까지 다 흡수해 내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수를 모신 사람들에게 주신 곳이 교회다. 교회라고 하는 곳은 단순히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모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즉 예수 안에서, 그 하나님이 입히시는 모든 세계를 입고 누리며 살아가면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공간이 교회라고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 땅에 있는 천국이다. 이 땅에 있는 에덴동산이다. 이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 교회의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 안에 깊게 새기시기 바란다.

 

에밀 브르너에 의하면 교회에 관한 일반적인 오해 4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교회를 학교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도 성경을 가르치고 음악이나 윤리도 가르친다. 그러나 가르친다고 해서 교회가 학교는 아니다. ▶교회를 친목단체로 오해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하는 친교, 코이노니아가 있지만 교회는 친목단체는 아니다.  ▶교회를 자선단체로 오해하는 것이다. 교회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구제도 하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자선단체가 아니다.  ▶교회를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단체로 잘못 생각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의 정의를 부르짖고 불의한 정치나 공의를 말하지만 저항하는 단체는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칭찬 받은 교회였다. 교회가 칭찬 받았다는 것은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과 그들의 행위가 칭찬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본문을 중심으로 그들이 칭찬 받게 된 원인을 살펴보고 오늘 우리들도 칭찬 받는 사람들, 칭찬 받는 교회이길 원한다.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교회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교회, 새로운 교회를 낳는 교회다. 사도행전 28장 30~31절 말씀이다."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들의 행적은 끝이 없다. 사도행전 28장 끝 부분에 보면,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셋집에서 성경 말씀을 가르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서로 왕래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과 2년 동안 성경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새로운 교회를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 주님의 기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9장을 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사람들이다.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으로는 로마가 땅 끝이었다. 복음이 사마리아와 안디옥 그리고 소아시아지역과 유럽을 거쳐서 이제는 로마에까지 즉 땅 끝까지 이르게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그랬다. 마지막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아직도 복음은 증거 되고 있다. 아직도 행전은 끝나지 않았다. 사도들의 행전은 끝났다. 그러나 바울의 뒤를 잇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성도들의 행전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 행전은 미완성의 책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은 미완성의 장이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사도행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날 비로소 사도행전의 역사는 완성될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그 천국이 좋아서, 너무나 좋아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도 행전의 후속 편에는 성도들의 행전이 있다. 흔히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말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한다. 지금 일어난 교회의 일을 가지고 사도행전으로 이어서 계속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붙잡고 일하시는 그 일하심이 계속되고 있고, 오늘날에도 그 주님의 일을 방해할 어떤 세력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8장까지 써 내려간 바울의 편지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멈출 수 없는 사도행전의 주인공들을 만나서 참된 가르침을 받으면서 21세기에 새로운 사도행전을 이어가는 주님의 일꾼이 되어 보자.ⓗ

 

예수가좋다오/자료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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