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현장에서 상처받은 감정과 그 치유법
최근 어느 신분에선가 사모님들만의 내면 갈등을 상담해주는 전화가 설치되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영적 지도자인 목사의 아내들에게 상담 전화라니! 그만큼 목사 아내들의 정신적 아픔이 깊어졌다는 뜻이 된다.
전화를 개설한 분의 말을 그대로 여기에 인용한다.
「대개의 사모님들이 극도의 인내심과 극기심을 지니고 생활하는데 따라 스트레스가 쌓여 우울증과 육체적인 질병까지 얻는 경우가 많은데도 호소할 데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이 전화를 개설케 됐다.」
또 이런 말도 했다.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을 미소로 대하고 있는 사모님들의 내면에 는 뜻밖에도 갈등과 고민이 많이 있다는 것을 교인들이 이해해주길 바란다.」
세 명의 사모님들 중 두명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통계도 있다. 목사인 남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참고 감추고 거룩한 베일을 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사모이기 때문이다.
그 전화를 이용하는 사모님들의 상담내용은 부부 간의 갈등, 고부 간의 갈등, 가족 구성원 간의 의견 충돌, 자녀 문제, 교인과 목회자 간의 갈등, 교인과 사모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고민을 상담하는 내용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왜 사모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가
목사의 아내니까 거룩한 생활을 해서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하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데 상담 내용을 보면 평신도와 다름이 없지 아니한다. 굳이 다른 점을 캐내라고 하면 사모님의 정신 건강이 흔들릴 경우 가정이 흔들리고 목사님이 흔들리며 더 나아가 교회와 교인에게까지 그 영향이 파급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영적 지도자인 목사의 아내에게 해괴하게 무슨 정신적인 병이 있겠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만 본 것이지 실제는 내적으로 갈등을 겪으며 괴로워하고 있는걸 어쩌랴.
외국의 통계를 보면 25년 전보다 훨씬 많은 사모들이 정신적 스트레스,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보고를 내놓았다. 물론 외국 통계이긴 하지만 담임 목사의 삼분의 일 이상이 모가직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횟수가 무려 99번에 달한다고 하니 그의 동반자인 사모의 정신적 고통이야 오죽하겠는가.
목사들 1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어느 심리학자에 의하면 네 사람 중 세 사람 꼴로 현 사역지에서 근심과 분노, 소외감과 고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신부들도 2년 이내에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성직을 떠났다니 확실히 목회는 힘든 사역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모들이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목사의 아내는 정신적 질환에 걸릴 요소가 많은 환경에 처해있다는 사실이다. 그럼 이런 점을 미리 알고는 아예 목사의 뒤에 꼭꼭 숨어있어야 한단 말인가. 사택의 골방에 문을 첩첩으로 닫아 걸고 꽁꽁 숨어 나오지 말아야 한단 뜻인가.
자신의 목소리도 없어야 진짜 사모인가
내가 아는 어떤 사모님은 목소리 없는 사모로 지냈다. 교인들이 사모님이 누군지 어떤 목소리를 지녔는지조차 모르게 완벽하게 숨어서 지냈다. 그래서 교인들은 상상에 상상을 해가지고 '사모가 아마 병신인가 보다. 귀머거리나 벙어리인가 보다. 아니야 절름발이거나 곰보딱지일지도 몰라' 라는 소문이 돌고 말이 많았으나 이 사모님은 숨어서 나오질 않고 20년 가까이 사모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교인들 중 특히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 중에서 이런 사모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 사모님은 상당히 훌륭했다. 목소리 없이 조용히 기도만 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지냈기에 교회가 편안했다. 그런 사모가 진짜 사모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사모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모르기는 하지만 그 사모님은 속이 곪아 터졌을 것이다. 지금 사회가 어떤 사회인데 사모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가서 고독하게 가두어 놓고 골병이 들게 하고 있단 말인가.
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목사님 한 분이 사랑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귀가 먹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귀가 먹었으면 말도 못하니 벙어리 사모가 들어온 셈이다. 그들 곁에서 일년을 살았기에 그 부부 생활을 상세히 관찰 할 수가 있었는데 참으로 힘든 부부였다. 물론 교인들과 대화를 못하니 진짜 목소리 없는 사모가 되어 목회는 조용했겠지만 집안에선 그게 아니었다. 철야를 하고 귀가해도 귀먹은 아내는 남편의 벨 소리를 듣지 못해 문을 따주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빛이 번쩍번쩍 하는 기발한 벨을 만들어 붙였으니 사모님은 자지도 못하고 번쩍거릴 불빛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혼자 사택에 갇혀 지내니 집에 들어서는 남편인 목사를 들들 볶았다.
실례를 한번 들어보자. 주민등록을 이전해서 전입을 해야 하는데 그걸 귀가 먹고 말을 못해 사모가 해낼 수가 없었다.
"내가 귀가 먹고 벙어린 걸 알고 날 놀리는 것이냐. 어서 동회에 가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고 왜 날 고민하게 만드느냐."
사모님은 손 발 몸짓으로 격렬하게 표현하다 못해 나중에는 필담으로 야단치는 걸 보고 그 목사님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교인들의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의 사역에 전혀 참여할 수 없고 단지 아내로서 부부 생활을 통해 아이를 낳아주고 집안에서 식모처럼 집안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정말로 사모의 역할이 그 정도란 말인가. 사모를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목소리 없는 사모는 육체적으로 귀 먹고 말 못하는 벙어리 여자였을 적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 사모를 원하는 교회는 억지로라도 총각 목사는 택해서 귀가 먹고 말을 못하는 여자를 사모로 택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세명의 사모님들 중 두 분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런 통계를 보지 못해서 확인하지는 못한 것이지만 현장에 있는 사모님들이 "나 우울증에 걸렸소"라고 표현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목사인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 해서 참고 감추고 거룩한 베일을 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우리 사모들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말도 못하고 속으로 병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모의 자리가 어째서 정신질활의 자리란 말인가. 그 원인과 해결 방법을 열거하며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분노를 해결할 사모만의 방법이 있는가
목회 현장에 서면 사모만이 안고 있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상대는 장로님일 수 있고 평신도일 수도 있으며 권사일 수도 있다. 그 분함의 원인은 일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사모라는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받아 안고는 그 무게에 눌려서 감당키 어려울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이 보통이다.
평신도라면 아무나 붙들고 늘어져 않아서 욕설이라도 퍼부어대면 그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련만 사모에게는 그것이 금해져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기도만이 유일한 길인데 이상하게 분노는 앙금으로 남아 사모들은 달팽이처럼 분노를 끌어안고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이것이 정신 질환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는 걸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모는 이런 분노로 인해 병이 들었다. 그 첫 증상이 교회에 오면 교인들이 무서워서 눈은 들지 못하고 성경만 열심히 탐독했다. 아무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오로지 성경만 읽으며 목석처럼 앉아있으니 교인들은 성경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모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이 사모님이 어디론가 가출을 해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목사님은 몇 년 혼자 목회를 했는데 마음이 헝클어진 목사의 목회가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라. 교인들은 자주 줄어들고 설교에도 은혜가 없다고 수군대는 소리가 높아지자 목사님은 그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가슴 아픈 일이다.
상식을 떠난 교인들의 도전을 감당할 마음 그릇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귀들이 성도들의 입을 통해서 사모님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길 기도를 해야 한다. 더 나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지니고 대처해야 하며 굳건한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 참으로 기이한 것은 분노를 발할 정도를 훨씬 능가하는 무서운 고난을 당하고 있으면 그 분노를 잘 감당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분노를 발할 정도라면 당하고 있는 고난이 별로 크지 않다는 뜻이 된다. 쉽게 풀이하면 곁에서 성도들이 아무리 구시렁대며 불평하고 아프게 해도 사모님이 당하고 있는 엄청난 고난이 있으면 그런 정도는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앉아 발밑에 깔린 얕은 산들을 가여운 마음으로 관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이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쓴 사모 칼럼에 <사모의 골방>이 있다. 나름대로 분노를 살일 방법을 터득한 체험을 쓴 것인데 골방에 숨어서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성도를 콩콩 밟아주고는 용서해달라고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한 내용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뒤돌아보니 아주 유치한 짓이었음을 고백한다.
잠언 29:11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영어로 보니 더 쉽게 이해가 갔다
"A rebel shouts in anger;a wise man holds his temper in and cools it."
이상구 박사가 쓴 <복음과 건강>이란 책에 보니 노(努)를 드러내며 토해내는 동안 암세포를 번식하게 만드는 아드레나린과 코디슨이 나와서 암이 생기고 관절이 아프며 여러 가지 병이 생긴다고 했다. 분노가지도 가시로 주신 것을 감사할 적에 암세포를 죽이며 적혈구와 백혈구를 잘 만들어내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티 임파구가 강해지고 모든 병을 이길 수 있는 엔돌핀이 나온다니 분노도 드러내지 말고 삭이라는(cool)성경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가.
분노도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넓고 싶은 사랑을 가지고 높은 산에 올라 말은 내려다보듯 그렇게 조감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마치 어린애가 이 다음 커서 소년이 될까 소녀가 될까 고민하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 마음이 커지면 어떤 사람을 무척 미워해서 분노로 인해 잠을 잘 수 없었는데 내 마음 그릇이 커지고 보니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화를 냈다고 고백하게 된다.
"사모님들이여! 분노를 용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십시다. 넓고 넓은 사랑으로 그 분노를 녹여버립시다. 그래야 승리하는 것이고 건강해지는 걸 어쩝니까."
사모의 고독은 누가 치료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단지 그 고독의 색깔이 다를 뿐이다. 소녀시절 고독은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청년 시절 고독은 개똥철학 색깔이다. 그러나 목사의 아내 자리에서 갖는 고독은 진짜 외롭고 서럽고 병을 일으실 수 있는 회색의 고독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원인이 되는 고독이기도 하다. 주위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걸리는 고독이 아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버글대는 사람들 . 그런데 고독하다. 대중 속의 고독이 바로 사모님들이 갖게되는 외로움이다.
국민학교 시절이나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처럼 부담 없이 퍼질러 앉아 구설수의 부담 없이 수다스럽게 지껄이고 싶은데 그게 되질 않아서 오는 병이다. 교인들에게 어쩌다 흘린 말도 수백 배의 말로 둔갑해서 교회 안을 떠도는 것에 놀라 벙어리가 되기로 결심한 씁쓸한 경험을 사모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다. 목사 곁에서 지켜야 할 비밀을 혼자 지니고 고고하게 서있어야 하는 고독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다.
옛날의 친구들도 시간대가 맞지를 않아 거의 떠나고 목회 현장에 있다 보면 덜렁 나무 위에 얹혀진 기분이 든다. 이런 고독은 대개 삼십 대 후반 사십대에 더 심하게 몰려온다. 물론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이건 병에 이르는 고독이니 문제가 된다. 사모님이 바빠서 언제 고독할 시간이 있느냐고 하지만 바쁜데도 고독하니 바로 그게 문제다.
교인들이 아무리 주위에 버글대도 어찌 그들이 옛날 허물 없이 뛰놀던 배꼽 친구가 되겠으며 모두의 본이 되어야 하는 자리에 있으니 어찌 말을 지껄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교회 울타리 안에선 형식적인 교제를 하게 되고 그때마다 혼자 서있다는 고독을 되씹게 된다.
이런 때는 그 고독을 달래줄 자시남ㄴ의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창조의 생활을 참으로 좋은 방법으로 제시하고 싶다. 그게 붓글씨일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될 수도 있다. 수필이나 시, 소설을 쓰는 생활일 수도 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 사모들에게 좋은 해결 방법을 각자에게 맞게 모두 주셨다.
고독을 기쁨으로 승화시키자
천국을 닮은 가정으로 꾸미기 위해 꽃을 열심히 가꾸는 것도 고독을 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주체할 수 없는 고독이 밀려오던 내 경우는 이따금 목욕하러 간다. 요즘은 어딜 가나 사우나라고 쓰여있다. 찬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사우나에 누워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작품도 구상하고 늘어지게 몇분이라도 누웠다가 나오는 기쁨으로 고독을 달랜다.
내 신구 중 한 사람은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남편은 사회의 정상에 올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나대는데 혼자 빈 집을 지키는 고독에 울다가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며 북경에도 가고 통역도 해주고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낸다. 얼굴에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주 젊은 감각을 지니고 있어 만나는 사람마다 기쁨을 안겨준다. 그 친구는 고독을 외국어를 배우는 일로 달래면서 보람을 찾은 것이다.
사모님들의 고독도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서 해결하기를 바란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어둔 얼굴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을 찾아서 기쁨을 누리고 얼굴에 싱싱한 기운이 넘쳐 흐르는 사모들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얼굴과 성격이 다르듯이 모든 사모님들의 고독 해결책도 다양하리라 생각한다.
교인들의 잔소리, 불평은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이 문제는 모든 사모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거리다. 50대의 사모나 60대를 넘긴 사모들은 나름대로 이걸 처리하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으나 젊은 사모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아픔을 안겨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땅에 왔는데도 잔소리가 많았는데 어찌 가장작은 자인 사모에게 이러쿵 저러쿵 말이 없겠는가.
홍해가 쩍 갈라지고 열 가지 재앙이 떨어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모세를 향해 잔소리와 불평이 많았던 걸 보면 목사느 사모의 자리에서 이런 불평과 잔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불평과 비판과 말이 많은 것과 목이 곧은 성격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그걸 따지고 맞서 있으면 그게 정신질환으로 연결되는 고리가 된다. 어떤 분이 한 말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개야 짖어라. 열차는 달린다."
글쎄 내 경우에는 이 말을 여러번 되뇌이면 마음이 풀리는데 여러분의 경우는 어떨는지 모르겠다.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되면 언제나 말을 많이 듣게 마련이다. 지금 세상은 너무나 변해버렸다. 학생이 교수는 나무라고 백성들은 정치가를 향해 삿대질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50~60 연대는 취직이 되질 않아서 실업률이 대단했다. 어려운 취직 시험을 뚫고 취직을 하면 봉급이 적든 많든 그저 감지 덕지해서 감히 기업주를 항해 어쩌고 저쩌고 반기를 들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자가 왕인 세상이다.
머리에 붉은 끈을 질끈 동여매고 으싸 으싸 하면서 기업주를 향해 돈을 더 달라고 외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누구나 살아있는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하다못해 반상회에 나가봐도 다른 지역이야 어떻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부에 항의하는 데모를 하면 된다고 믿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어찌 목회가 조용하겠는가. 더구나 문민 정부가 들어서니 더욱 입김이 세어졌다. 옛날의 사모 자리보다 우리의 자리는 분명히 더 요란한 소문과 불평과 잔소리의 소용돌이 속에 휘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모들에게 중요한 것은 뚜렷한 소명감을 가지고 꿋꿋하게 설 수 있는 담대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 말에 주눅이 들고 저 말에 주눅이 들어 고민하다가는 목회를 길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는 방향이라면 누가 뭐라든 꿋꿋하고 힘있게 서라고 사모들에게 권하고 싶다.
가정과 교회, 그 갈림길의 갈등
사모는 한 남편을 받들어야 하는 아내요 자녀를 둔 어머니요 시부모를 모신 며느리이며 교회에서는 목회자 부인이기에 참으로 바쁜 것이 특징이다. 이 중 특히 공인으로 나서야 하는 스트레스가 바로 질병을 불려온다. 공인이기에 아내 노릇도 잘 해야 하고 자녀도 성공적으로 길러야 하며 시부모도 잘 보셔야 하는 압박감을 받는 자리다. 모임에 공식적으로 부부 동반하여 참석도 해야 하고 작은 교회의 경우 비서, 사무원, 청소부, 타이피스트, 잔심부름, 심방, 상담까지 도맡아서 해야 하는 사역 앞에서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있다. 남편인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가정을 등지고 뛰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모까지 목회 전선에 투입되면 자녀 교육이나 가정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느 목사님이 50년에 가까운 목회 생활을 마치고 회고담을 할 적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내나 자녀들을 돌보는 것도 목회의 한 부분인 걸 모르고 너무 가정을 희생한 것이 가슴 아프다. 후배 목사들은 그런 우를 범하지 말고 아내와 자녀를 돌보는 목회를 해야 한다."
은행원을 뽑을 적에 그의 아내가 병들었다고 거절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대기업의 중역이 될 때에 부인이 병들었다고 구설수에 오른 걸 보았는가. 이상하게 사모님은 아파도 안되며 목사의 곁에 나란히 서서 아니면 뒤에 숨어서 많은 일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어떤 분의 글에 보니 '사모에게 있어서 관계상의 우선순위' 라고 해서 사모님들에게 충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여기 옮겨 본다.
첫째 하나님을 제일 앞에 둔다.
둘째 남편과 관계를 생각한다.
셋째 자녀와 가정을 우선순위에,
넷째 교회를 생각한다.
사모와 가정과 자녀보다 교회를 앞에 놓을 적에 가정이 희생되며 목사가 흔들린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현장에 서면 목사의 아내가 된 자리에서 가정일로 교회를 뒤에 두면 그때 밀려오는 죄의식과 교인들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언제나 가정과 자녀를 뒤에 두고 있는 형편이다.
어떤 사모님은 목사의 딸로 목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목사에게 딸을 주는 걸 죽음의 자리에서까지 강하게 반대하는 친정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며 목이 매였다. 친정 아버지인 목사님은 가정을 버려두고 오로지 사역만을 했기에 가족들이 아사 지경에 이르자 사모님은 보따리 행상을 나서 돈을 벌어 가족을 살렸다고 한다. 너무 죽을 많이 먹어서 죽이라면 어떤 죽을 봐도 코에서 냄새가 나서 먹지를 못하는 과거를 지닌 사모님이다.
그러니 딸이 그런 전철을 밟을까봐 목사에게
바람을 피우는 남자 집사에게는 다윗이 받았던 고통을 들려주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지만 다윗이 여자 문제로 죄를 범했을 때 일생을 두고 괴로움 받는 장면을 들려주면 공포심을 품고 자신의 인생길을 미리 보고 깨끗한 생활로 돌이킬 수 있도록 설득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성도들을 자극할 많은 공포의 말씀들이 있다. 말씀을 연구해서 설득시키는 법을 연구하는 것도 사모의 큰 역할에 속할 것이다.
갈증의 욕망을 자극하여 설득한다
인간의 공짜 심리를 이용하는 설득벙이다. 사람이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하는 속담이 있다. 석유를 팔기 위해 램프를 무상으로 공급하는 회사가 바로 그런 심리를 이용한 설득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월부 인생은 바로 상인들이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미국사람들은 모두 월부로 살아게게 설득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새차를 사도록 갈증을 유발시켜 월부로 사게 하고 그 차가 다 낡아서 고물이 되면 다른 차를 월부로 살아가게 설득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새차를 사도록 살증을 유발시켜 월부로 사게 하고 그 차가 다 낡아서 고물이 되면 다른 차를 월부로 사게 해서 일생 자동차에 목 매달고 살게 하는 수법이 이런 케이스에 속한다.
한국사람들이 이민가서 빠지는 함정이 바로 이런 갈증의 욕망을 자극하는 심리에 걸린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대궐 같은 집을 일생을 두고 월부로 물어가며 사는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도록 그 집에 목을 매달고 살다가 아이들도 뿔뿔히 흩어지고 살아온 뒤안길이아차 싶을 때는 이미 미국의 무서운 상술에 걸려들어 설득된 것이 함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장사꾼도 돈으른 벌기 위해 이런 설득법을 이용해서 돈을 긁어 모으느라고 극성을 부리는데 우리 사모님들이야 사람을 낚는 어蚁로서 상인들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의 갈증의 욕망을 자극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일생 목을 매달고 살게 만드는 설득법을연구해 보는 것이 어떨까.
홍당무 설득법으로 보상의 욕망을 자극해서 설득한다
좋은 결과를 연상케 하여서 설득하는 법이다. 우리도 집에서 아이들에게 성적이 어느 정도 되면 시계를 사주겠다. 뷔페에 데리고 가겠다고 설득하는데 이것이 바로 홍당무 설득법이다. 말은 홍당무를 너무 좋아해서 말을 훈련할 때 홍당무를 가지고 설득한다고 해서 나온말이다. 이렇게 성취에 대한 보상을 연상시키면 사람을 설득하기 쉽다.
많은 교회에서 전도할 때 이런 방법을 쓰고 있다. 어느 교회에 가니 입구에 프라이드 승용차가 한 대 전시되어 있었다. 자동차 유리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천 명을 전도해 오는 사람에게 이 상을 줌."
성도들은 우선 눈앞에 서있는 자동차를 상으로 받기 위해 천명을 전도하느라고 열심이었다. 이 교회의 목사님이 바로 홍당무 설득법을 쓰고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위에 든 다섯 가지 설득의 비결을 사모님들이 목회 현장에서 적절히 잘 사용한다면 사모 역할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상식적인 설득 작전
서로 융화시켜 조화를 이루며 살게 하는 설득의 비법을 터득하는 것이 사모뿐만 아니라 목사님에게도 꼭 필요하다. 내가 아닌 상대방을 나의 의도대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 설득은 인생 경영에서 상당히 핑요한 부분이며특히 사모님들에게 설득작전은 꼭 필요한 것이다.그러면 상식적으로 설득을 할 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직선적으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예화로 설득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자 할 적에는 직선적인 방법보다는 우회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 좋다. 아주 친밀하서 무엇이나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우리 인생길에서 한 사람 정도 곁에 있다면 그런 사람은 지극히 행복한 사람이다. 마치 요나단과 다윗같이 생명처럼 귀한 친구 말이다. 그러나 부부까지도 직선적인 방법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마음과 마음이 맺어지기가 어려운 법이다.
우리 주님도 많은 비유를 쓰시도 예화를 든 것을 보면 이런 사람의 심리를 아시고 그런 방법을 쓴 것이다.
설득 과정에서 일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점잖고 부드러운 어조로 설득해야 한다. 옛부터 유능한 지도자는 야단치고 꾸중하며 비난하고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방법보다는 격려의 말을, 충고의 말보다는 부탁의 말을 했다고 한다. 내 경험으로도 국민학교 3학년 때였던가. 신경질을 내며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쳤던 여선생님이 있다. 해서 지금도 웃어서는 안될 자리에서 웃음이 나서 참을 수 없는 때에 그 여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면 웃음이 쏙 들어간다.
더구나 상대방을 내 주장에 순복케 하는 석득의 광정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감정이 아니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 입장에서 설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 부족한 점을 먼저 시인하면 설득이 쉬원진다
충고법에서도 말했듯이 설득헤서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자세가 중요하다. 설득을 꾀하는 사람이 먼저 상대방의 자존심을 살려준다는 말이다. 설득의 궁극적 목적은 이쪽의 의도에 따르는 것이라면 양보하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대화법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소위 레포가 작성되어야 설득이 가능한테 이것은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출 때 가능한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설득하면 효과가 있다
마 7:12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벙이요 선지자니라." 행하는 것이다. 해서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하지 않는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여 같은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 설득의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교수가 자살을 했다. 기자들이 모여들어 자살의 이유를 알려고 했으나 가족들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중 한 기자가 검은 옷을 입고 가족을 만나서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고 눈물을 흘리자 가족들은 자살하게 된 사연을 술술 풀어 놓았다고 한다. 다른 기자들이 못해낸 것을 슬픔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을 수 있었던 기자가 가족을 설득해서 사연을 알아 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감싸주는 자세로 설득하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요즘은 100볼트니 220볼트니 해서 전기 기구를 사도 조심을 해야한다. 냉장고를 샀을 때 100볼트에 놓은 것을 220에 꽂으면 타버리게 된다. 그걸 속이 상해서 뿌르르 상점으로 달려가서 신경질을 냈다고 하자.
"왜 이런 거지 같은 냉장고를 팔아서 내 속을 상하게 해요."
"그건 댁의 잘못이지 제 잘못이 아닙니다. 볼트를 아는 것은 현대인의 상식입니다."
"다른 것으로 바꿔 주세요."
"절대로 못합니다."
이런 싸움이 가게에서 벌어져서 소란했다. 구매자의 궁극 목적은 새 냉장고를 받아내는 것이라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제 잘못인지 모르지만 이거 새 냉장고를 꽂자마자 가버렸군요.
제가 쓰는 법을 몰라서 이렇게 되었군요. 당신이 100볼토에 놓은 것을 모르고 그만..."
"아하! 제 잘못이었습니다. 미리 주의를 주었어야 하는 것인데."
상인은 방어태세를 풀고 다른 냉장고를 바꿔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우리가 성도들을 설득할 때도 이런 방법에 유의하여 기본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사모의 자리를 더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출처:창골산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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