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무법자들 |
'주의 종'이 '교회의 왕'인가! |
신성남 목사|
먼저 오래 전 호주 어느 현지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한 백인 목사님이 5년 동안 담임하던 교회의 임기가 끝나서 사직을 하고, 새로운 임지를 향해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주로 이사가게 되었다. 이사 당일 그분과 가족들은 허름한 자기 승용차 뒤에 작은 트레일러 하나를 끌고 나타나셨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기에 실은 것이 그 목사님과 가족들의 이삿짐 전부였다는 것이다. 트레일러라고 해 봐야, 우리나라에서 연탄 배달하던 손수레보다 서너 배 큰 정도이니 얼마나 들어가겠는가.
더욱 놀란 것은, 교인들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요란한 이임식도 없었다고 한다. 그 목사님도 웃으시며 교인들과 일일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셨고, 교인들은 떠나는 차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 준 것이 송별회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새로운 임지까지는 차로 3일 걸린다고 들었다.
이 이야기가 한국교회의 많은 '귀족 목사님'들에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에는 그 목사님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크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국내선 비행기 표 몇 장 제대로 안 챙겨 준 인정머리 없는 교인들에 대해 많이 서운해 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그 백인 목사님은 당연히 '주의 종'다운 검소한 모습을 실천하며 정상적으로 살고 계시는 것일 뿐이었다. 오히려 비정상적인 데에 익숙하게 살다 보니, 순간적으로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인 것이 아닌가 한다. 하여튼 그런 목사님이라면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고 어려우실 땐 내 숟가락이라도 쥐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호주 교회 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처럼 검소하게 사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도 한 백인 목사님 일가족이 여름 여행 중에 경비를 아끼기 위해 모텔이나 호텔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친구 목사님 댁에 들려 거실 소파와 바닥에 슬리핑 백을 깔고 자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기도 하다.
목사가 부유해도 되나
목사가 너무 가난해서 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되는 것도 잘못된 일이겠으나, 목사가 중산층을 넘어 부유층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언젠가 "교인 중에 굶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목사도 숟가락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던 어느 원로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느 교회나 자기 교인들 중에는 가난한 교인들이 분명히 있을 터이고, 나아가 교회 주변의 지역사회에도 틀림없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정상적인 목사라면 어떻게 부유해질 틈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처럼 입고 있던 양복마저도 있는 대로 남들에게 자주 나누어 주다 보면 저절로 검소하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물게 유난히 사치를 떠는 한국교회의 귀족 목사님들께서는 양을 돌보는 목사라면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시며 식사 때마다 입으로 고급 음식들이 잘 넘어가는지 정말 궁금하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은 가난한 자를 잊지 말라는 뜻이며, 성경 여러 책에서 반복해서 강조되어 나오는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혹시 요즘 귀족 목사님들은 성경을 필요한 부분만 가위로 오려서 들고 다니시는지,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점입가경이라더니, 심지어 어떤 귀족님들은 돌보라는 고아는 돌보지 않고 엉뚱하게 시키지도 않은 교회 여비서나 여집사 돌보기에만 몰두해 사고를 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의 속이 다 터질 지경이다.
교회 내의 무법자들
요즘 교계 뉴스를 잠시만 들여다보아도, 지금 한국교회는 이들 귀족 목사님들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분들은 교계 뉴스만 보면 너무 속이 상하고 우울해져서 아예 안 보시기로 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귀족님들이 그동안 뉴스를 오르내리며 얼마나 크게 사고들을 쳐 놓았는지, 심지어 믿지 않는 분들까지도 누구나 한국 개신교는 너무 썩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개독교'니 '먹사'니 이런 불명예스러운 용어들은 사회 일반인들이 우리에게 손수 붙여 준 이름들인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담임목사의 권한과 영향력은 거의 압도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담임목사만 바로 서 있다면, 적어도 고질적인 교회 문제의 80%는 긍정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거꾸로 말하면, 교회 문제의 대부분이 담임목사가 바르게 처신하지 못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어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교인들이 교회에 무슨 직접적인 이권이나 사심이 있다고 목사나 장로들에게 저항하고 분란을 만들겠는가.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들 귀족 목사님들이나 귀족 장로님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챙기다가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귀족님들이 이렇게 무법자처럼 '교권'과 '위선'이라는 쌍권총을 차고 좌충우돌 개판 치고 설치게 된 데에는, 이들을 가르친 신학교는 물론 일반 교인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도 되는 것처럼 무조건 그에게 순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이젠 거의 관습처럼 되어 버린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성직자는 물론, 설사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설 수 있는 대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는 합심하여 이런 근거 없는 신앙적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야 절대적인 것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순종은 옳을 때만 해야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목사가 어떤 사실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라고 요구할 경우, 신자는 순종이 아닌 거절을 해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이 귀족님들이 교회 내에서 입법, 사법 그리고 행정에 이르기까지 삼권을 손에 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교회에 큰 상처를 줄 경우, 잘못된 점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적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이 귀족 목사님들을 한국교회의 '무법자'라고 거침없이 부르는 이유는 이 분들이 그동안 보여 준 행동이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법의 테두리를 넘어 명백하게 위법적이라는 데에 있다.
성경이 언제 목사들에게 탐욕, 축재, 횡령, 교회 세습, 치부, 간통, 외식, 파당 짓기, 사기, 명예 추구, 월권, 교회 사유화, 성직매매, 교만, 사치, 거짓말 등을 해도 좋다고 가르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교회법 어디에 목사에게 교회 재정, 행정, 인사, 관리 등의 모든 업무에 직접 관여하여 왕 같은 권력을 써도 좋다고 되어 있나. 더구나 교인들과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와 함께 사역하는 대등한 동역자들이지, 목사를 떠받드는 무슨 부하 직원들이나 들러리들인가. 교회 안에 모든 이는 동등하며 직무의 구분은 있으나, 계급 차별이란 없다는 것이 개혁 교회의 정신이 아닌가. 이 귀족님들의 상당수는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히 거역하고 교회법도 거스리는 자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필자는 주저 없이 그들을 '무법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이 귀족님들의 행태가 더욱 극에 달하여, 스스로 자신들이 한국교회의 공적 1호라고 자임하는 듯한 모습마저도 갈수록 노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 교회의 타락과 쇠퇴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을 때보다, 오히려 평안하고 흥청거릴 때에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귀족 목사님들은 그리스도, 십자가, 회개, 구원, 실패, 지옥, 고난, 희생, 겸손, 경건, 헌신, 나눔 그리고 섬김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는다. 즉 복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분들은 거꾸로 귀에 듣기 좋은 성공, 희망, 축복, 평안, 희락, 천국, 선교 등을 즐겨 노래 부른다. 주님께서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으나, 이분들은 설탕을 주로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닌 세상의 천더기로 전락하고, 교인들은 이런 단맛에 깊이 길들여져 이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영적 당뇨병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느껴진다.
중세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영적으로 무지한 성직자는 영적으로 무지한 교인들을 양산하고, 다시 그 무지한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부패한 성직자들의 놀이터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비상한 시기이고, 깨어 있어야 할 때인 것이다. 이제 이 글에서 논하는 '귀족 목사'란 단순히 큰 교회의 목사나 부유한 목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 목사라도 스스로 신앙 양심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좇으며 부를 추구하는 목사를 의미한다.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어느 목사님이 여기에 지적된 내용 중에서 한두 가지 항목에 해당된다고 해서 그분을 귀족 목사라고 섣불리 단정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상당 부분은 필자의 극히 주관적인 체험에 따른 관점도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고 싶다. 따라서 여기에는 시각적 오류도 있을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로만 사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그리고 큰 교회나 부자들이 무조건 다 잘못했다거나 나쁘다는 식의 단세포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 주시면 좋겠다.
아울러 어떤 내용에 있어서는 꼭 귀족 목사님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반 목사님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들이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은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 교회를 지정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역시 다른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란다. 그럼 이만 본론에 들어가서, 교회 내의 무법자들이라 할 수 있는 귀족 목사님들의 문제점들과 또 이 분들이 어떻게 교회를 거덜 내고 계신지 그 활약상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주의 종'이 '교회의 왕'인가
우선 많은 목사님들이 자신들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시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는 좋은 의미에서 그리 말씀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반대로 은근히 권위를 내세우시기 위해 그렇게 부르시는 목사님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어떤 때는 자신들이나 다른 교역자들을 '목자'라고까지 부르기도 하시는데, 이 대목에서 말씀을 좀 구별해서 하시면 좋겠다는 것이다. '주의 종'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으나, 양들의 '목자'는 예수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함부로 쓸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태여 말하면 목사는 '보조 목동'이나 '양치기 개' 정도로 알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지, 언제 '네 양을 치라'고 하셨는지 직접 성경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칭하셨다. 우리에게 목자가 여러 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목사님들께서 목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하나님이 목사님들에게 '주의 종' 노릇을 하라고 하셨지, 언제 '교인의 왕' 노릇하라고 시키셨는가 하는 점이다.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교인들은 오히려 '주의 자녀'들이라 말할 수 있다. 종이면 종답게 '주의 자녀'들인 교인들을 잘 섬겨야지 무슨 근거로 군림하려 드시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목사직은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의 직무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녀 교육'을 잘 시키라고 귀한 자식들을 기껏 맡겨 놓았더니, 오히려 이 분들은 교인들의 상전 노릇을 하며 '자녀 학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귀족 목사님들께서는 목사님들만 주의 종이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넓은 의미에서 주의 종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주셨으면 한다. 동시에 모두가 대등한 '왕 같은 제사장'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은 다른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에게 맡겨진 고유의 책무이니, 귀족님들께서는 아무 일이나 나서서 월권을 하시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제발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기를 부탁드린다. 그래도 교인들보다 성경을 몇 자 더 배웠으면 좀 똑바로 처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어떤 귀족님들께서는 입만 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러 하시며 교인들을 쥐고 흔드는데, 그런 소리를 주저리는 입을 볼 때마다 재봉틀이 떠오르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인지 궁금하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하나같이 자기 욕심을 채우는 내용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 것도, 전과 장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교회 세습을 하는 것도, 교회 돈을 빼돌려 개인 사업하는 것도, 호의호식하는 것도, 심지어는 간통하다 들켜도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둘러대는 황당한 인간들이다. 경건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인생들이, 마치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나 예언자처럼 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실상은 늘 자기 뜻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만 보아도, 이 귀족님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종들이 무슨 철학을
또한 근자에 들어 '목회 철학'이니 '목회 비전'이니 하는 말을 흔히 듣게 되는데, 비록 좋은 의도로 쓰더라도 적지 않은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좀 심하게 말을 하자면, 아니 종이 건방지게 무슨 철학이 필요하고 비전이 필요한지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하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신분인데, 종이면 종답게 주인께서 성경에 시킨 일이나 빠뜨리지 않게 열심히 처리할 것이지, 무슨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라도 되는 듯 구태여 철학 타령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 '목회 철학'이란 용어는 과거에는 전혀 못 듣던 용어인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슬그머니 나타난, 다소 황당무계한 용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요즘 종들은 분수를 모르고 주인의 자녀분들이신 교인들에게 자기의 철학과 비전을 내세우며 따르라니, 이 종이 '종놈'인지 '종님'인지 영 헷갈리는 판이다. 목사가 목회를 할 때, 성경대로 가르치고 그대로 살면 되었지 무슨 철학이란 말이 따로 필요하단 말인가. 바울이나 아볼로,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언제 각자 만든 목회 철학을 가지고 목회했나.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지는 않나 염려하며 경계하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껏 그 목회 비전이라는 것도 가끔은 좋은 내용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몇 년도까지 교인 몇 명에 선교사가 몇 명이고 건물이 어쩌고저쩌고 등등, 돈을 부지런히 긁어모아 비지니스 확대에 열중하겠다는 이야기들이던데, 이런 얘기는 다른 분들이 하도 많이 지적하셔서 이 정도로 생략하기로 하겠다. 하여튼 순진하고 충성된 교인들은 그 철학인지 비전인지를 따라서 총력 동원되느라 아예 등골이 빠지고 있다. 그저 차분히 앉아 성경 공부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겠건만.
특히 큰 교회로 갈수록 일년 내내 각종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혹사시키는데, 이는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이다. 평일에는 직장이나 사업체 또는 학교에서 혹사를 당하고, 주일이라도 예배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와서 좀 쉬어야 하는데, 오히려 주일이 더 바쁘고 더 피곤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월요일이면 쌍코피가 정기적으로 터지는 사람도 여러 명 보았다. 귀족님들께서야 잡다한 일들은 부교역자들께 맡기시고, 평일에 편안한 웰빙 책상에 앉아 멋진 설교를 준비하신 후, 주일날 자신의 목회 비전에 맞춰 목소리 높여 화끈한 설교 몇 번 하면 되는지는 잘 몰라도, 그 알량한 비전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교인들은 일주일 내내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 명료한 것인데, 이분들은 오히려 간단한 것에 군살을 더덕더덕 발라서 내용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 실천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 교회 중 하나인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우리는 실패했다"고 고백하면서, "교회에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영적인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지만, 그것이 영적인 성숙함을 보장해 주지 않더라"는 결론을 인정했던 일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주일에만 우리끼리 모여 분주히 활동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오히려 평일에 사회 속에서 소금이 되는 '올데이 크리스천'이 아닌가. 과연 초대교회 기록에서 우리가 요즘 바쁘게 하고 있는 다양한 교회 행사나 프로그램들을 한두 가지라도 찾아볼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혹시 이런 것 역시 교회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비지니스 마인드로 추진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예수님은 한 가지만 해도 좋다고 하시는데 저 혼자 바쁘게 고생하는 마르다의 모습이 아닌가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귀족 목사님들께서는 평소에 매우 경건한 척하시며 목에 깁스하고 무게를 엄청 잡기 좋아하시는데, 제발 교만 좀 떨지 마시고 진정으로 겸손해질 순 없는지 묻고 싶다. 설사 목사가 아니라고 해도 신자라면 누구나 온유하고 겸손하며 관대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사람들 앞에서 방귀도 참아 가며 천사처럼 경건한 척 열연하는 이분들 뚜껑을 살짝 열어 보면, 거룩이라고는 개벼룩만큼도 찾기 힘들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동안의 아픈 경험에서 얻어진 개인적인 소견이다.
다음으로, 귀족 목사님들은 거의 한결같이 눈부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즐기시는데, 중소형차로 좀 바꾸실 생각은 전혀 없으신지. 스스로 종이라면서, 왕 같은 차를 타고 다녀서야 되겠는가. 자신의 인품이 모자라는 것은 참아도, 품위 없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절대 못 참으시는 것일까. 남들이 이를 비난하면 대부분 교인이 선물했다고 핑계 댄다고 하시던데, 목사가 정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진짜로 고급차를 사 주는 통 큰 교인도 더러는 있다니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돈복 하나는 끝내주시는 분들인 것 같다. 그래도 선물로 고급차를 누가 주면 꼭 받아야 하는지 아직 의문이 남는다. 거절하거나 팔아서 다른 좋은 일에 쓰시면, 괜히 길 지나가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패기라도 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귀족 목사들
뭐니뭐니 해도, 귀족님들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돈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분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요상한 명분과 이유를 붙여서라도 기필코 돈을 챙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점만 유심히 잘 관찰해 보아도 이분이 귀족 목사이신지 아니신지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본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흔히 잘 알려진 대로, '돈, 명예, 그리고 여자' 이 세 가지야말로 귀족님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멍에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귀족 목사님들께는 교인들의 영혼보다는 교인들의 돈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 기본 정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이분들이 교회를 사유화하는 문제인 것 같다. 특히 교회 재정을 직접 관리하며 예산과 결산을 불투명하게 하는 목사님들도 적지 않은 듯한데, 이런 행태는 한국교회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악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최근 어느 형제님에게 받은 메일에 의하면, 자신의 교회는 출석 교인이 7,000명이 넘는 큰 교회인데, 지난 15년간 단 한번도 수백억 원의 교회 재정에 대해 결산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교회인 것이다. 심지어 어느 큰 교회는 교회 건물 등기를 아예 담임목사 개인의 이름으로 등록하기도 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 외에도 목사의 친인척들로 교회 직원들을 도배하거나, 교회 재정 집행시에 각종 이권에 관여하기도 하고, 기타 이분들의 범죄적 행태를 구체적으로 다 서술하려면 '귀족 행전'을 한 권 새로 써도 모자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분들의 눈에 띄는 행태들을 위주로 몇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돈 버는 재미로 외부 강사로 일년 내내 꾸준히 돌아다니시는 것이 이 귀족분들의 공통적인 생활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교회 월급은 그대로 굳고 추가로 부수입이 더 짭짤하시다니, 꿩 먹고 알 먹기로 이분들의 눈에는 세상이 참 평안하고 즐겁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강사 교류 인맥을 넓히기 위해 반대로 막대한 교회 예산을 들여 외부 강사들을 수시로 청빙하는 것은 너무 비열한 행동이 아닌가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서로 짜고 상대 교회 돈을 나눠 먹는 셈이니, 정말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용감무쌍 마징거 제트라도 타고 계신 분들인 것만 같다.
어떤 능력 있는 고참 귀족분은 몇 년 만에 월급 외에도 5억 이상 챙기셨다고 들었는데, 뭔지 모르는 순진한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께서 안팎으로 말씀 사역에 너무나 수고를 하신다고 때로는 보약을 갖다 바친다고 하니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란 가요가 히트 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하여튼 귀족 목사님들 치고 돈 문제에 깨끗하신 분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와 건축 헌금을 해야 복 받는다고 수시로 강조하시며 부추기신다고 하던데, 그렇게 열심히 긁어모아 정말 자신들의 일이 아닌 주의 일을 하려는지 묻고 싶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시던 예수님이 돈이 없다고 무리들에게 언제 헌금 요청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오천 명이나 사람들이 몰려 와도 대형 천막 하나 없는 빈 들에서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는지. 제자들도 옷 한 벌만 가지고 궁색하게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이분들도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헌금만큼만 사업을 벌리시면 안 되겠는지 따져 보고 싶은 것이다.
또한 헌금을 조금 내거나 못내는 교인은 결국 기죽어서 떨어져 나가거나 아니면 교회 모임에서 늘 구석 자리에 찌그러져 있게 되고, 헌금을 많이 낸 부자들이나 유명 인사가 장로나 권사가 되어 설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들 교회의 현실이다. 이는 마치 중세 교회 성직매매와 무엇이 크게 다른가. 이것도 확실히 해명이 필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아울러 왜 교회 내에 가난한 이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무너지는지 그 이유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귀족님들께서는 특히 목회를 비지니스로 여겨 교인 수를 중요시하며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을 성장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사실 이 문제는 귀족님들의 체질상 웬만해선 고치기 힘들 것같다. 또한 원래 잔머리가 잘 돌기 때문에 설교를 미끈하게 잘 하시고, 심지어 어떤 때는 하도 잘한 자신의 설교에 스스로 감동받아 강단에서 눈물을 짜기도 하신다니, 이분들은 정말 순진한 교인들 홀리기에는 아주 탁월난 재능을 가지신 듯하다. 이 귀족분들은 아마 안방 드라마 탤런트로 나갔어도 크게 대성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런데 설교 내용은 주로 교인들 귀에 듣기 좋은 웰빙 설교만 즐겨 하니,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항상 복 받고 잘되고 평안하고 성공한다는 설교는 잘 하시는데,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자는 내용은 잘 말하지 않는다니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신지. 게다가 요즘은 평일에는 골프에 낚시에 신나게 놀러 다니시다가, 주일이 되면 상습적으로 남의 설교를 표절하시는 저질 얌체분들도 있다던데, 정말 양심에 방탄조끼를 채우신 분들이다. 그리고 어쩌다 가끔은 교인들에게 함께 회개하자고 설교할 때도 있으시다면서, 어느 분의 말씀대로 어째서 자신의 묵직한 돈주머니는 평생 회개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감투를 너무 좋아하셔서 너저분한 명함 한 다섯 개 정도는 기본이고, 떼로 몰려다니시며 이름만 들어도 역겨운 허접 단체에도 많이 가입하신다던데,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마시고 그 시간에 자신의 교인들이나 잘 돌보시면 좋겠다고 부탁드리고 싶다. 또한 이분들은 수구 정권이나 수구 언론, 재벌 기업, 대형 교회 등을 비판하면 바로 빨갱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매도하기도 한다. 그동안 챙겨 둔 재산과 인맥을 지키고 늘리는 데에 이들 수구 세력의 강력한 보호와 지원이 필요해서 그러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가끔은 하늘도 한번 쳐다보거나 '정의'라는 단어도 좀 찾아보시고 자숙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아울러 이분들은 각종 교단 선거에서 금품을 살포하고 패거리를 만들고 자기 사람을 챙기는 등 각종 추태를 다 보여 주시기를 서슴치 않고 있다. 이는 막가는 정치판에서조차도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 아닌가. 이로 인해 교단이 너무 시끄럽고 혼란하여 국민들의 지탄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은 물론 전도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는 하는 건지 답답하다. 누가 이 분들 앞에서 감히 목사 임기제니 무슨 회장 단임제니 이런 말을 꺼내면 난리가 난다는데, 차라리 지나가는 개 귀를 잡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들 귀족분들은 언론의 자유 이딴 거 무지 싫어하신다고 한다. 자신들이 과식하는 것이 자꾸 노출되서 괴롭다고 하니, 그나마 약간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특히 말이 많은 놈들은 무조건 싫어하신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은 뒤로 할 짓 안 할 짓 고루고루 못된 짓을 다 저질러 놓고 나중에 결정적으로 들통 나게 되면, 언제나 주님의 사랑 운운하며 사랑으로 모두 다 덮자고 얼버무리시는 것이 이분들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한심스럽고 우려스러운 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이들 귀족 목사님들과 귀족 교회를 하나의 성공 모델로 삼아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흉내 내며 불철주야 달리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두루 갖춘 한 대형 교회가 교인들의 수평 이동을 통해 근처에 있는 다수의 소형교회들을 무너뜨리는 현상 못지 않게 더 심각한 문제는,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그 대형 교회를 모델로 너도 나도 모두 열을 받아 자신들도 저렇게 대형화하겠다고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비판자들의 입에서 "대형 교회가 죽어야, 한국교회가 산다"는 말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대형 교회의 좋은 장점들은 거의 희석되고, 다른 이유도 물론 있지만 단순히 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거운 족쇄가 되어 따거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여기까지 이들 귀족 목사님들의 철면피한 개인기와 문제점들을 간단하게나마 검토해 보았다. 물론 더 쓰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현재 전국의 지역 교회들은 물론 주요 교단의 총회나 노회 지도부의 상당수가 이 귀족님들의 절대적인 입김 아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양이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이분들이 저질 정치꾼들처럼 돈 봉투까지 뿌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 챙기기에 몰두해 온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 장사꾼들이 북적거렸던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 내에도 온갖 잡상인들이 날뛰며 설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간덩어리가 아주 크신 이분들은 대부분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교인들이 영육으로 말라가도 크게 신경쓰시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회 여론이 그들의 부정과 탐욕을 비난할 때는 적당히 연막을 쳐서 빠져나가거나, 그것도 잘 안 되면 교인들을 동원하여 전면에 세우고 자신은 교회라는 성역의 울타리 뒤로 깊숙히 숨어 버리는 것이 이분들이 즐겨 쓰시는 일상적인 수법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귀족 목사님들의 개인기가 너무 탁월해 한국교회가 거의 거덜나게 생겼다. 심지어는 "한국교회는 이미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잃었다"라거나 "한국교회는 예수를 버렸다"고 까지 단정 지어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더구나 이 귀족님들 중 상당수는 무슨 기연이라도 있었는지, 맨손으로도 바리새인 몇 명쯤은 순식간에 뺨을 치고 초상비로 날아 오를 정도로 엄청난 절정 고수들이신 것이다. 양심에 철판을 삼겹으로 깔고 천사처럼 가장하여, 교인들을 속이며 해치고 있는 것이다. 간이 작은 보통 사람들은 내공이 약해 정말 그런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인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정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큰 힘을 악용하여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늑대와 같은 자들이었다.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의 눈물과 탄식은 외면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유전과 규례는 철저히 지키라고 항상 강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이 자신들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을 두려워했다.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을 내어 쫓는 것도 보았다. 자신들의 밥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르는 것을 막기 위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이때 제자였던 가롯 유다가 앞장서서 은 삼십에 예수를 그들에게 팔아 넘긴 것은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주위를 살펴보면 한국교회의 부패와 탐욕이 그때보다 못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무법자, 귀족 목사님들이 그래도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바리새인을 뺨치는 내공으로 한국교회를 거덜 내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한다. 이들 귀족 목사님들은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유다처럼 예수를 팔고 있는 것일까. 이분들의 귀에도 영육으로 메말라 버린 저 양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릴까. 이분들의 눈에도 저 양들의 목이 꺾여 늑대에게 찟겨지고 있는 모습이 보일까. 그리고 이분들의 양심에도 저 양들의 슬픈 눈망울에서 나오는 분노와 절규가 느껴질까.
답답해서 묻고 싶지만, 결코 긍정적인 대답을 크게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책 어디에도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외쳤어도 듣지 않은 자들이었다. 세리와 창기들은 돌아왔으나, 그들은 성경을 손에 들고도 끝까지 거역하였다. 차라리 개 귀에 명심보감을 들려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죽해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셨겠는가. 이들은 끝까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을 좇은 자들이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불과 몇 십 년 뒤인 AD70년에 후일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의 강력한 로마 군단에 의해 처절하게 짓밣히고 찟겨져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물론 그들이 자랑하던 큰 건물, 헤롯 성전도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어 이때 함께 무너졌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읍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약 1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몰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토록 슬프게 무너진 거대한 헤롯 성전을 생각하며, 오늘날 오로지 큰 건물, 큰 무리, 큰 사업만을 추구하며 교회 대형화에 눈이 먼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을 바라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리고 문득 이런 의문을 가져 본다. 2,000년 전처럼 예수님이 오늘 한국에 다시 오신다면 큰 건물들과 대형 교회들이 많은 강남으로 먼저 가실까, 아니면 무너져 타다 남은 재 속에서 가슴 터져 울고 있는 용산으로 가실까.
이제 결론을 맺기 전에, 평소에 존경하는 신현우 교수의 짧은 글을 먼저 인용하고자 한다.
개는 없고 양반들만 있으니
아직 잠들지 않은 그리고 결코 잠들 수 없는
깨어 있는 목회자들에게 이글을 바칩니다.
나는 차라리 개 같은 목사가 되렵니다.
경건을 보수의 울타리에 가두고
학문을 교리의 울타리에 가두고
실천을 교회의 울타리에 가두고
그리고 나면 우리는 감옥에 갇힐 겁니다.
역사의 암울한 시기에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 교단에서
한 발작 벗어나는 것이
이리도 힘드는 일일까요?
성경을 교리로 난도질하는 인본주의적 인습에서
혁명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무릎 꿇는 길로 가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일까요?
목사님들은 모를 겁니다.
그래서 저도 모를 겁니다.
교회를 보며 갑갑해 하는 일반 성도들의 마음을,
이리를 보고도 짖지 못하는 개와 같은 목사들을 보며
물려 죽으며 분통이 터져 가는 양들의 마음을….
예수님을 잃은 중세 가톨릭이 부패하였듯이
개혁 정신을 잃은 개혁 교회가 썪고 있는 것을 보며
혹시 우리가 양들을 지키는 개가 아니고 이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나운 개가 몇 마리만 더 있어도 좀 덜할 터인데,
개는 없고 양반들만 있으니 양들이 죽는 것이 아닌지요.
소금은 없고 설탕만 있으니 썩는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결심해 봅니다.
나는 개 같은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설탕보다는 소금을 뿌리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거룩한 목사님들은 모르실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왜 차라리 개 같은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
양들 가운데 있다 보면 우리는 양 같은 목사가 되어
양을 바로 인도하지 못하는 거룩한 양같은 목사가 되거나,
이리 같은 목사가 되어 양을 잡아먹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 같은 목사가 되어야 할 겁니다.
점잖은 목사님들은 못 들으실 것입니다.
이리를 만난 저 성도들의 아우성을 ...
천사들의 찬양 소리만 들리실 터이니 ...
저는 이리를 물어뜯는 개같은 목사가 되렵니다.
갈릴리로 돌아가자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점잖은 목사'와 '개 같은 목사'를 생각해 본다. 한국교회에는 지금 '점잖은 목사'만 너무 많은 것이 아닌지. 양들을 해치는 저 이리를 물어뜯을 '개 같은 목사'는 없는가. 그리고 이 일이 어찌 목사님들만의 책임일까. 스스로 동역자라고 자처하던 모든 평신도들도 분연히 일어서야 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언제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예수를 따라나섰던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예수를 따르겠다면서 가난한 이웃들과 배 불러 죽어 가는 부자들을 그냥 외면하고 이렇게 우리끼리만 건물 짓고, 흥청거리고, 재미있고, 즐거우면 되는 것인가.
산에서, 빈 들에서, 또 강가에서 감동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던 그 처음 사랑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지. 먼저 믿은 우리라도 소금을 좀 뿌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우리마저도 세상의 단맛에 빠져 다시 세리와 창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거덜 내고 계신 귀족 목사님들 대부분은 바리새인들처럼 이미 예수 따르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인 것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들어 보시라. 2,000년 전 목수의 아들로 유대땅에 오셔서, 가난한 어부들의 마을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시던 그 예수님은 오늘도 변치않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은가?
" 나를 따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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