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는다.
골로새서3:25절을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이 시대 가장 공격을 받는 사상이 있다면 칼빈주의의 오대 강령일 것입니다
이미 거의 모든 교회는 장로교라 할지라도 알미니안 사상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를 가르친다는 신학교에서 조차 성경 해석은 오대 강령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 사상은 책장 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누가 만지지도 않는 책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칼빈주의의 5대 강령입니다.
이 강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칼빈 개인이 연구를 해서 교리로 삼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세뇌를 당하면서 앵무새처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짧은 설교 시간에 이것을 다 일일이 성경적으로 말씀을 드린 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강령만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칼빈이라는 사람을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칼빈이라는 사람의 개인의 사상을 따른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사를 통해 꾸준히 정립해 오던 것을 그의 시대에 와서 보다 체계적으로 정립한 이 교리에 대해서 저는 성경적으로 정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교리를 기초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리가 없는 신앙은 마치 기초가 없는 집과 같습니다.
물론 이 교리가 성경에 배치가 된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배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연구를 하지 않고 다만 이것을 칼빈의 시대에 와서 정립을 했다고 해서 칼빈이 행했던 일들을 통해서 이 교리 자체를 비판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종교 개혁이 있었던 시대는 전쟁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시입니다 그만큼 개혁을 하는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감당하기 힘든 환경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칼빈이라는 인간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도 사람입니다
아니 그 뿐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같습니다. 다만 그 시대 환경에 따라 자기를 방어하기도 하고 자기 사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상대를 공격하기도 하면서 신앙을 바로 세우려 노력했습니다.
칼빈은 분명 격동기에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보니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도 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성경을 덮어야 합니다. 제가 종교적인 사상 때문에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이라는 것은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칼빈의 종교 재판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의 시대에 와서 정립한 교리가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성경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그는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또 자기가 간음한 죄를 덮기 위해서 충성된 부하를 전쟁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죽는 순간에도 아들 솔로몬에게 자기 정적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의 어떻게 볼 것입니까?
그리고 솔로몬이 기록한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후비들의 미혹에 넘어가 그들의 신에게 경배를 했던 사람입니다 만약 그가 한 행위가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성경도 덮어야 합니다.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을 가지고는 논쟁이 안 되겠으니까 칼빈 시대에 있었던 종교적 아픔을 가지고서 믿음의 선진들이 초대 교회로부터 정립을 해 오기 시작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을 훼손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반대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록된 책을 가지고 성경적인 교리를 무너뜨리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당시 화형은 지금의 교수형과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십자가형을 당했고 그것이 로마 시대에 중반을 거치면서 화형을 시키다가 중세 시대까지 왔습니다. 그 반대파들의 주장이 백번 옳다 해도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금 칼빈의 종교 재판을 인정하자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살인을 한 것도 외모입니다 도적질 한 것만 외모가 아니라 그의 인격이 나쁜 것만 외모가 아니라 잘 생긴 것만이 외모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 외모라는 말씀입니다.
시대적인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6.25 전쟁 때 이미 밝혀졌듯이 국군에 의해 또는 미군에 의해 양민이 학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시대입니다 물론 지금 그것이 밝혀지면서 비난을 받고 또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무 자르듯이 누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국군이 그리고 미군이 일방적으로만 잘못했다고 매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 양민을 학살한 것에는 분명한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전범으로 처벌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대의 아픔입니다. 한쪽에서는 인민군이 있어서 그랬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 현장 지휘관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아무 죄 없이 학살을 당한 그 가족들에게는 너무도 아픈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그 현장 지휘관을 전범으로 처벌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의 아픔도 감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죄 없이 죽은 양민에 대해서는 늦게라도 그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가 적절한 예우를 해 준다면 그나마 위로가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양민을 학살했다고 그 당시 미군을 철수하라고 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렇게 외모로 취하고 있는 가를 성경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은7:23-24절을 보면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의 입장에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식이라는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왜 많은 날 중에 하필이면 안식일 날 병을 고치냐는 것입니다
나머지 병 고칠 날이 육일이나 있는데 꼭 안식일 날 병을 고쳐야 할 필요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숨이 넘어가는 위급한 상태도 아닙니다. 얼마나 합당한 말입니까? 지금 위급해서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거룩한 안식일 날 굳이 치료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날을 어기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살인한 것과 안식일을 어기는 것과 어떻게 같이 비교할 수 있느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생각으로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니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생각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성경을 기존으로 보고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는 가를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서2:10절을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온 율법을 항상 다 지키다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라고 성경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도적질을 한 것이나 안식일을 안 지킨 것이나 살인을 한 것이나 같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폐하여진 사람에게는 이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율법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이렇다는 말씀입니다.
외모로 취하는 자들에게는 그가 살인을 안 했어도 거짓말을 했다면 살인한 자가 됩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였다면 그는 살인한 자입니다.
외모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가 설령 살인을 했다 해도 그의 외모를 보고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사람은 스스로 율법아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가 살인을 한 것에 대한 것은 그 육체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한 사람 죽이면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그 생각에는 심한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되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해도 그는 살아가는 동안 스트레스 장애를 받으면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가 너무 악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상에 미혹이 되어 있으면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을 하면서 성경의 바른 교리마저도 부정을 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살인한 자의 교리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은 교리를 부정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사람의 외모를 취해서 교리 자체를 흔들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살인은 안 했으니까요
그래서 칼빈에 의해서 정립이 된 칼빈주의보다는 자기들의 사상이 더 정당성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간에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믿음을 볼 수 없으니까 그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외모가 완벽한 사람입니까?
단지 살인을 안 하고 도적질을 안 한 것으로 외모가 좋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새인과 같은 존재이며 그 안에는 썩어 들어가고 있고 겉을 좋게 보이려고 회를 칠하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사람의 생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이상한 하나님이고 독선적인 하나님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준이 있어야 하고 보이는 행위에 따라 그 외모를 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습니까?
조금 더 선하게 산 사람하고 악하게 산 사람을 같이 취급한다는 것이 세상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 이런 사상을 가지고 와서 교리 자체를 뿌리 체 흔들고자 하는 악한 무리들이 이 시대에 있습니다. 어떻게 종교 재판을 통해 살인을 한 그 사람이 정립을 해서 공표를 한 교리를 인정할 수 있습니까? 아주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생각입니다.
아니 교회는 나왔지만 예수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최소한 예수라는 그 이름의 뜻만 알아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그의 시대에 와서 정립한 교리가 과연 바른가를 고민하고 살펴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에는 이미 칼빈은 종교 재판을 해서 살인을 한 자이기 때문에 그 교리를 살펴 볼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외모로 보고 있다면 내 안에 예수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가 모두 죄를 져서 사망을 당해야 하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모든 죄를 전가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함으로 이 세상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나도 율법으로는 살인한 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면서 앞으로 살면서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런 내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를 또 한 번 죽이는 일입니다.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판단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정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보응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시기 때문입니다 외모를 함부로 한 사람은 그에 따르는 보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살인을 한 사람이 안 잡혀서 감옥에 안 간다 해서 그가 보응을 안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남의 물건 하나만 흠 쳐도 잠을 못잡니다
형제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고 편히 잘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설령 그 거짓말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스스로 보응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에 가책으로 보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고보서2:9절을 보면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데 거기에 묵시적 동의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외모로 사람을 위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죄가 아닙니다.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 범죄자가 된다는 것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순간 그 율법이 나에게도 똑 같이 적용을 해서 나 역시도 율법에 의한 범죄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의한 범죄자는 진노의 잔을 받게 됩니다.
자기가 뭐 잘난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고 악한 자입니다 다만 보이는 살인을 안 하고 도적질을 안 했다고 해서 마치 내가 그들 보다 나은 것으로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 순간 율법은 나를 판단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 하는 사람이 사람을 외모로 취할 수 있습니까? 그 마음에 예수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의로움을 나타내고 심지어는 성경의 바른 교리까지도 그 외모 때문에 무시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예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바리새인들과 똑 같이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보고 안식일에 왜 사람의 병을 고치느냐고 따질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죄인인가도 모르고 사람의 외모를 보고 심지어는 성경 까지도 자기들의 생각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외모를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의 외모가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피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할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의 오모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자들의 마음은 자기들은 그래도 최소한 저 사람 보다는 의롭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외모에 의해 마음에 부자가 된 사람은 망합니다.
내 외모가 어떠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바로 깨달은 사람은 설령 살인자가 있어도 그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육체에 대한 보응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있는 아주 작은 티를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순간 율법은 나를 범죄자로 정할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 범죄자로 정함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그것을 정죄의 칼날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똑 같이 그들의 등에 비수를 꽂을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다는 말씀은 율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율법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한 마디로 스스로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겠다는 뜻입니다.
이단들은 교묘합니다.
어떻게 하든 바른 교리를 침해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에 의해 수천 년을 거쳐 정립을 해온 믿음의 바른 교리를 침해하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가 율법에 의해 정죄 받는 것을 모르고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교리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만약 외모로 사람을 취하였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에게는 외인입니다.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우리 이방인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아서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 이방인이 주제가 넘게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만이 넘치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도 모르고 교만이 넘쳐서 외모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개 같은 자입니다. 한 마디로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는데 사람을 외모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단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알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교리를 흔들고자 외모를 가지고 이용을 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입니다 그보다 더 악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칼빈이라는 개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문제가 분명히 있지만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교리를 칼빈의 시대의 아픔을 가지고 그것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특히 인터넷에서 마음 놓고 떠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동영상을 만들어 유포를 하면서 교리를 뿌리 체 흔들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 하는 자들이 예수님도 자기를 외모로 취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 은혜를 망각하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뿌리 체 흔들고 있습니다.
외모로 믿음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회가 타락하면 할수록 그 외모를 보고 그의 믿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하는 행위들을 보고 믿음이 좋다 나쁘다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 바리새인들만큼 행위가 좋은 사람들을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모를 보고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서2:1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은 내 행위가 좋아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받으셨습니다. 만약 행위로 받았을 것 같으면 이방인인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행위는 이스라엘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은 믿음입니다.
만약 내 행위가 조금이라도 포함이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진들을 외모로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더구나 그 시대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나타난 외모만 보고 판단을 한다면 그 마음에 진리를 사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오직 믿음을 보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정말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만 보고 우리는 그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 외모를 보고 그의 사상을 취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보고 어떻게 성경을 볼 수 있습니까? 과연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모두 다 완전한 삶을 살았습니까?
우리가 보는 믿음의 선진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요셉에 대해서 안다고 해 보아야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율법의 예를 따라 흠 없이 살아서 요셉을 판단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단의 지혜롭습니다.
그는 진리를 건들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 외적인 것을 가지고 진리가 잘못 된 것처럼 어떻게 하든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하와를 미혹했던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취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느 개인의 사상에 빠져 그에게 몰입을 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그가 종교 개혁을 했더라도 그의 모든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교리가 성경과 일치하는가를 연구하고 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내 믿음을 바로 세우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이단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한결 같이 진리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외적인 것을 가지고 진리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과연 진리가 있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의 선진들의 사상을 접할 때도 그의 외모를 보고 그 사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이 성경과 일치하고 있는가를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은 것 같이 우리도 그 외모를 보고 취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얻고자 하는 성도는 외모보다는 그가 전하는 말씀이 성경과 일치하는 가 아닌가를 간절히 구하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분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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