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십일조 폐지가 교회개혁인가?

수호천사1 2009. 11. 29. 09:24

십일조 폐지가 교회개혁인가?

“교회개혁 주장, 자칫 안티기독교에 힘 실어줄수도”

▲안희환 목사

어린 시절 가난했기에 판자촌에서 살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장사와 신문팔이 등 궂은일을 많이 해봤으며, 커다란 교통사고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제게 예수님은 그야말로 소망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저에게 제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찾게 해주셨고, 절망 속에서 빛을 보는 법을 알게 하셨으며, 용기를 내서 공부도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집니다.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이르기를 늘 반복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눈시울을 적시냐고 물은 사람이 있는데 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아찔해집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저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다면 제 생명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당연히 저의 연약한 몸을 주 위해 사용하는 것에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고요. 목숨도 드릴 수 있고, 몸도 드릴 수 있는데, 물질을 드리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실제로 저는 물질을 드리는 데에 인색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힘에 겨울 정도로 드리는 중이고요.

이런 저로서는 소위 십일조 논쟁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가 성서적이니 아니니, 해야 하느니 마느니,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십일조를 폐지해야 한다느니 그렇지 않다느니 하는 논쟁이 왜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요? 십일조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거나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죄인 취급 한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가르침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는 노릇이지만 십일조 자체를 폐지하는 것을 교회개혁이라 함은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물질이 뭐 그리 아까운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묘한 이메일 하나를 받았습니다. 숭사리라고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카페에서 보낸 이메일인데 공교롭게도 그 내용이 십일조에 대한 것입니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숭사리는 현재 3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꽤 열성적인 사람들이 교회개혁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논지를 펼치고 있는 곳입니다).

십일조 논란 마무리...십일조 용어 폐지.
예수 찬미! 숭사리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전합니다. 최근에 근 2개월간 숭사리에서는 십일조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에는 목사, 장로, 집사, 일반성도 등 다수의 회원들이 교회의 계급화 된 직분 내려놓고 모두가 자신이 아는 대로 성경을 근거로 의견들을 개진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할 일은 성경을 근거로 한 이 논쟁에서 다양한 견해 차이로 다투었어도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공통의견이 있었는데 신약에 와서는 구약적 십일조는 분명히 폐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에서 우리가 십일조라는 구약적 기준을 참고삼아 그 정도를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고 바치는 것은 귀한 태도이지만 결코 강제화 할 수 없으며 다만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하는 것이 신약적 헌금임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교회개혁을 목표로 활동하는 숭사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실천사항을 정했습니다.


1. 신약적 헌금의 규범은 율법의 십일조가 아니라 <고린도후서 9장 7절>의 말씀대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입니다.
- 기준은 “그 마음에 정한대로”
- 하한선은 “인색함으로 하지 말 것”
- 상한선은 “억지로 하지 말 것”

2. 앞으로 헌금을 하되 "십일조"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이 구약의 레위지파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 또한 말라기서를 인용하여 구약적 십일조를 주장하는 목사는 자신이 구약적 레위지파도 아니면서 레위지파의 몫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속이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 만일 구약의 레위지파와 백성들 간의 관계를 참고하여 지금의 성도들과 목사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자는 그것이 성경적이지도 않거니와, 설사 비교하기 위해 차용한다 해도 하나의 참고적 비교일 뿐 실제로 자신들이 레위지파가 된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헌금만큼은 율법에서 말한 그 십일조를 문자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모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또한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자는 정확하게 십분의 일도 아니면서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숭사리에서는 십일조라는 이름대신 <고린도후서 9장 7절>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라는 성경구절을 근거로 마음에 정한대로의 의미를 본따서 “심정헌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는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 나눔의 의미를 가진 “연보” 또는 “사랑의 실천을 위한 나눔” 등의 이름들을 쓰기로 했습니다.

부디 이런 부분에 동참하시어 교회개혁에 조그마한 바람이라도 일어나도록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추진하는 이유는,

1.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갈 2:4)
2. 성도들이 돈 문제로 시험에 들거나 정죄의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대신 죽으신 형제를 돈 문제로 넘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3. 그리고 한국교회가 헌금을 올바른 목적으로 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우리가 십일조 용어 사용 폐지운동을 벌이는 것은 헌금을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며 헌금을 조금 내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십일조라는 용어 사용을 폐지하자는 것임을 기억해주시고 한국 교회가 그림자에서 벗어나 실체되신 그리스도를 붙잡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부디 이러한 우리의 뜻을 헤아려 함께 동참해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합니다.
평안하시길 빕니다.
2007. 12. 6.
카페지기 : 최야곱
운영자 : 옥합, 마리안느, 터와뜰, 세즈윅 올림

위의 내용들에 대해 일일이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다만 간단하게 몇 가지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신약에 와서 구약적 십일조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는데 신약 어느 곳에서도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내용들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대고 그에 대한 해석을 말하고 있지만 상당히 임의적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십일조 제도의 폐지를 말하려면 신약에서 그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들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이 구약의 레위지파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런 주장은 비약에 불과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성도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이 레위지파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십일조는 아브라함도 드렸고 야곱도 벧엘 광야에서 무사히 고향에 돌아오게 하시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그들도 레위 지파를 인정하는 것인지요? 레위의 증조 할아버지와 아버지인데 말입니다.

셋째로 말라기서를 인용하여 구약적 십일조를 주장하는 목사는 자신이 구약적 레위지파도 아니면서 레위지파의 몫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속이고 기만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어떤 목사가 레위지파의 몫이었던 십일조를 가지는지요? 교회는 예산이 있고 그 예산에 따라 책정된 생활비만 목회자에게 지출할 뿐 십일조가 목회자의 몫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개혁을 말하면서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목회자가 치부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넷째로 성경에 없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고 하면서 정작 성경에 없는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정헌금”은 무엇이고 “사랑의 실천을 위한 나눔”은 또 무엇인지요? 차라리 십일조라는 용어가 더 낫지 않은지요? 미안한 말이지만 말장난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 중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신앙교육에 유효합니다. 그렇게 드려진 십일조가 성경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은 귀한 일이나 십일조 자체를 폐지대상으로 삼고 그것이 교회개혁인 양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십일조 폐자가 교회개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티기독교인들 역시 십일조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티기독교인들은 교회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권력의 근원은 돈이며 돈의 근원을 없애야 교회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마침내는 박멸). 이것은 안티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주장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렇기에 안티기독교인들은 십일조의 폐지를 주장하는데 개혁을 말하는 이들이 동일하게 십일조 폐지를 주장함으로써 안티 기독교인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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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폐지를 교회개혁으로 보는 이들이 있어서 충격을 받았고 그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반응이 뜨겁습니다. 주로 개혁을 말한다고 하는 분들과 제가 언급한 숭사리개혁포럼의 멤버인 분들의 반응이 뜨거웠는데 상당한 양의 글을 올리면서 십일조를 말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강변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말하면 그 사람이 교회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도 있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제 마음을 안타깝게 한 것은 십일조를 말하는 이들이 마치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말하는 것처럼 비판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분들 중에 십일조를 가르친 분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며 십일조 폐지에 대한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픕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브라함처럼, 야곱의 서원처럼,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신실한 목회자들이 있는데 그들 모두가 개혁 대상입니까? 또 더 많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리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분들이 어리석고 미련하며 성경을 모르는 한심한 사람들입니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단정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글을 올린 후 제 글에 대해 지지해주시던 어떤 분은 비판적인 모습으로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그 분은 [안희환목사 십일조옹호론 실망이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저를 비판하였습니다.

“가끔 올라오는 님의 글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다.
그런데 십일조 글에서 님도 구태한 십일조 목사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어 아주 실망이다

이곳은 눈살 찌푸리는 기성교회의 부적절한 행태와 성경에서 벗어난 변위된 변태들에게
오직예수복음 ..초대교회로 회귀해 보자는 개혁장소로 알고 있다

이런 곳에 그런 글을 올린다는 것은 참으로 강한 심장이다
주님의 시절에 쫓아 열매를 맺듯 .. 농부의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 겸손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저는 윗글을 읽으면서 답답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동일하게 한국 교회를 사랑하고 있고,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살기 원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교회의 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인데 십일조를 말한다고 해서 [구태한 십일조 목사]라는 식의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저를 향해 실망했다고 하시는 그 분께 저도 같은 말을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개혁을 말하는 분들께 실망했습니다라고요.

그 분의 글 밑에 달린 댓글과 그에 대한 그 분의 반응 역시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 댓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가 말하면 다 따르는 줄로 착각 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배당에 들어 온 사람들을 똥개 수준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개새끼는 참 희한합니다. 줄에 매달아 두어도 반항 함 안합니다. 철장 속에 계속 가두어 두어도 원망 안합니다. 살을 에는 듯이 추운 겨울에 늘 밤샘시켜도 원망은커녕 주인만 보면 꼬리를 치며 좋아합니다. 이런 충성스러운 개새끼처럼 여기는 나쁜 독재자가 참 많습니다. 혹 말을 안 들으면 성경 구절을 들이 대면서 협박하기도 합니다. 신도가 충성 안하게 된 것은 인도자 탓이 많은데도.”

이어서 [안희환목사 십일조옹호론 실망이다]라는 글을 올린 그 분이 위의 댓글에 대한 반응을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공감입니다. 똥개(?)들의 괴로운 입장이나 소리를 외면한 채 무식한 것들 가르쳐야 써먹는다고 스피커통 찢어지도록 멍멍거리며 가르치려고만 대드는 개선생들이 우리주변엔 의외로 많지요.”

목회자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개에 견주는 그런 표현을 어떻게 저리도 쉽게 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 서로 예의를 갖추며 글을 주고받았는데 십일조 이야기를 했다는 것으로 저렇게 반응을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지요? 교회에서 받은 상처, 혹은 목회자로 인해 얻은 아픔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위와 같은 반응은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십일조를 교회개혁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갑갑한 마음이 듭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교회개혁의 본질이거나 핵심일 수 없습니다. 어떤 원리와 기준을 나름대로 세우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개혁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때 개혁자라고 자처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정죄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예수비전교회 안희환 목사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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