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입회비는 필요 없다.
박 신 목사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한마음과 한 혼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쓰니라. 그리하여 사도들이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있더라. 그들 가운데 아무도 부족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토지와 가옥을 가진 많은 사람이 재산을 팔아서 그 대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으면 각자에게 필요한 대로 나눠 주었기 때문이라. 쿠프로 태생의 레위인 요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부르니 (이를 해석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그에게는 토지가 있어 그것을 팔아 그 대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더라.
한편 아나니아라고 하는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소유를 팔아 그 대금의 일부를 감추니 그의 아내도 그 일을 알더라. 그런데 얼마를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놓더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를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 또 토지 대금 일부를 감추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도 네 것이 아니었느냐? 또 팔린 뒤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그러므로 큰 두려움이 이 사실을 들은 모든 사람 위에 임하더라. 그러자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그를 싸서 밖으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약 세 시간쯤 지난 후 그의 아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그녀에게 대답하기를 “너희가 판 토지 대금이 이것뿐인지 말하라.” 하니 그녀가 말하기를 “예, 그것뿐이니이다.”라고 하더라.그러자 베드로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가 주의 영을 시험하려고 공모하였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한 자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이제 그들이 너를 메고 나가리라.” 하자 그녀가 즉시 그의 발 앞에 쓰러져 숨을 거두니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녀가 죽은 것을 알고 밖에 내어다가 그녀의 남편 곁에 장사하더라. 큰 두려움이 온 교회와 이 사실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니라. (사도행전 4:32~5:11)
당혹스럽기만 한 무시무시한 형벌
초대교회에선. 자기 소유를 팔아 교회에 내면 교회는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어 핍절한 사람이 없게 했다. 헌금을 구제에 일차적 혹은 중점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 헌금의 예로 대조적인 두 경우를 들고 있다. 바나바는 양심껏 처분한 재산 전부를 헌금했다.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일부를 숨기고 속이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았다.
이 부부가 받은 형벌에는 신자로 당혹케 만드는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 우선 집과 논을 다 팔아 몽땅 교회에 바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 교회는 그 돈을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에만 사용해야 하는가?
- 그 부부가 전부를 바치지 않아서 심판을 받았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는가?
- 주일날 지갑을 만지작거리면서 $100 짜리 한 장을 집으려다
결국에는 $10 짜리 한 장만 마지못해 헌금할 때가 많은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인가?
- 그나마 이렇게 쪼들리는 유학 혹은 이민생활에서 단돈 1불이라도 아끼고 쪼개 헌금했는데
하나님은 안 받으신단 말인가?
- 설령 그 부부가 욕심이 생겨 일부만 헌금을 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은 꼭 죽이셔야만 했는가?
-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 돈을 밝히는 분이 아니지 않는가?
- 사도들을 통해 말로서 견책하고 용서해 줄 수도 있었지 않는가?
- 우리의 의아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의문들은 사실상 헌금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꼭 그렇게 죽여야만 했던 이유도 신자가 헌금을 왜 해야 하는지, 헌금의 용도가 무엇인지 같은 헌금의 근본적인 의미를 제대로 살펴보면 자동으로 그 답도 도출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급한 일로 2주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있었던 일이다. 병원 복도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서로 잘 아는 제3의 인물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내용인즉 가진 재산을 몽땅 팔아 교회에 바치는 바람에 완전 빈털터리가 되어서 끼니도 못 잇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왜 교회만 가면 전부 그 모양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하고 있었다. 제가 얼굴이 화끈거려서 곁에서 듣기가 민망했다. 교회는 전부 그런 식이라고 마치 보편적인 진실인 양 말했다. 그럼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그렇게 하라는 계명이 있으리라 예단(豫斷)할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런 오해가 생긴 첫째 이유는 불신자들이 교회 헌금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든 원초적 책임은 분명 교회와 신자에게 있다. 신자들부터 헌금에 대해 잘못 알고 있으며 그릇된 동기로 헌금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그런 잘못된 생각과 모습들이 외부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이전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는데 작금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이 선생님을 알기를 아주 우습게 여긴다. 물론 그 첫째 원인은 일부 선생들이 학부형들이 주는 뇌물을 받거나 요구하는 관례(?) 때문이다. 그런데 잘못한 것은 분명 선생님들이지만 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데는 부모님들 책임도 아주, 어쩌면 더 크다.
아무리 선생님들에게 촌지를 갖다 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갖다 주었다 쳐도 부모들은 아이들에겐 그 사실을 끝까지 비밀로 해야 한다. 이왕에 발생한 잘못에 또 다른 잘못을 만들어 붙여선 안 된다. 집에 돌아와선 선생들이 다 썩었다고 욕을 퍼부어대니까 자녀들이 선생님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불신자가 교회와 헌금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책임이지만 비중으로 따지면 그렇게 만든 신자들 쪽이 더 크다. 비성경적인 방식과 생각으로, 스스로 의식을 했든 못했든, 헌금을 하고 있다. 또 설령 잘못된 여파가 불거지더라도 교회 안에서 조용히 바로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교회가 헌금에 대해 처음부터 아예 잘못 가르친 요인이 더 크다. 그러니 불신자들에게조차 교회란 눈 감아라 해놓고 신발 훔쳐가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헌금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오해
신자들이 헌금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관점에서부터 오해하는 사항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헌금이란 교회의 운영자금이므로 신자가 되었으니까 당연히 내어야 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물론 교회는 돈이 필요하다. 교역자 사례비를 드려야하고, 건물 관리도 해야 하고, 교육과 전도와 구제 등등 하는 일이 많다. 분명히 상당한 돈이 필요하며 효과적인 헌금의 관리 또한 필수적이다.
헌금의 가장 중요한 용도가 교회 운영자금임이 틀림없지만 그 성경적 의미는 훨씬 다르다. 만약 교회 운영을 위해서만 헌금하면 교회라는 하나의 조직체의 회원이 내는 회비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 모든 단체는 회비가 부족하거나 걷히지 않으면 조직의 결성 유지조차 힘들어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 회비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운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례비가 모자라면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금식의 기회로 알고 굶으면 그만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뜻은 아니다. 성경적 원리가 그렇다는 뜻이다.)건물이 없으면 공원에서 예배를 하면 된다. 미국 L. A.의 새들백교회는 천막에서 예배 보면서 본당보다 교육관부터 먼저 지었다. 성도들을 교육하고 함께 친교를 나눌만한 정도의 재정적 여유도 없으면 안하면 그만이다. 단적으로 말해 돈이 모자라 진행에 차질이 있다면 그 모든 행사를 중지하고 주일날 야외에 모여 예배만 하고 헤어져도 된다.
교회의 멤버십 피(fee)는 돈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회비는 따로 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고 약속하셨다. 그 반석이 무엇인가? 주님이 그가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따른 헌신이나, 당신의 사역을 위해 장모님 집을 제공한 성의 등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신앙고백(The Great Confession)이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6)”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자라면 누구나 외적 형편에 상관없이 교회 회원으로서 자격을 갖는다. 지불해야할 회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고백뿐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또 그런 고백을 한 자는 세례나 침례를 통해 공개적으로 그 믿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라는 것이다.
입술로만 하는 고백이라 교회 회비에 돈이 안 든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 얻을 때에 신자 쪽에서 대가를 전혀 지불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3:23,24)가 된 것이고 또 그러면 이미 회비는 완납(完納)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단체는 멤버로 가입할 때에 입회비를, 그 후는 정기적으로 회비를 내어야 한다. 교회 운영비도 그런 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이미 교회 회원의 자격은 취득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 앞에 고백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신입회원이 입회비를 지불하여 회원으로서의 등록절차를 마쳤다는 것을 기존 회원들이 확인해주는 의식인 셈이다.
그럼 주일날 내는 헌금은 정기적 회비인 셈인가? 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이 또한 내용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수시로 회비나 관리비를 따로 낼 필요가 없는 특수한 조직이 교회다. 교회는 입회 할 때에 한 번 내는 입회비인 신앙고백으로 종신 회원권이 확보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중생한 자는 그 구원이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회원 자격유지를 위한 회비는 다시 또 낼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주일에 헌금보다는 그 온전한 믿음을 받기를 원하신다. 온전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했던 “그 고백대로 살고 있는지” 여부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으로만 살고 죽는지 여부다. 예수 잘 믿어 형통하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어서 생명과 죽음의 길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해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자기는 죽고, 대신에 그분의 사랑으로 남들을 살려내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선 천국의 소망만 붙들고 살고 있기에 환난 중에도 감사하며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
신자가 주일날 하나님께 정작 바쳐야 할 것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혹시라도 세상, 물질, 죄악, 사단 등으로 그런 삶을 사는데 장애가 생겼다면 주일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돈으로 헌금을 드려야 하는 것은 주님 외의 세상의 것들로는 자기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최적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주일날 면죄부를 사지 말라.
헌금에 대한 잘못된 두 번째 태도는 면죄부를 사는 기분으로 헌금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를 믿은 뒤에도 불신자 시절의 사고가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부작용은 여전히 죄를 범하니까 이렇게 살다가는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은 아닌지 막연한 불안감 내지 죄책감을 갖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은 부정과 부패가 일반적 관습이다 싶을 정도로 워낙 만연되어 있어서 신자들도 은연중 검은 돈에 연루될 때가 있다. 간혹 아예 부정한 치부 방안인 줄 알고도 개입한다. 또 불신자 시절의 잘못된 습성을 버리지 못해 알게 모르게 성경 계명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런 저런 양심의 가책을 손쉽게 헌금으로 씻어보려는 마음이 생긴다. 비록 잘못했지만 하나님께 헌금 했으니 용서해주시겠거니 아니면 최소한 형벌은 면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발상이다.
어쨌든 선한 의도이고 해볼 만한 시도라고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크게 잘못된 기대다. 하나님은 절대 부정한 돈을 받지 않는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분에게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교회가 돈으로 운행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도 교회에서 행하는 종교적 경건이 아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이다.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꼭 최고의 선행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있는 세상 방식은 절대 따르지 않고 죄악은 아예 멀리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결코 망하지 않으며 더 감사하며 자족하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죄악과 거리가 멀수록 하나님이 오히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위로와 평강으로 채워주시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
하나님은 부정하고 피 묻은 제물을 가져오려거든 아예 교회도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대신에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가?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의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6,17)
신자는 농담으로라도 라스베가스에서 백만 불 잭팟이 터지면 그 반은 제가 갖고 나머지 반은 교회 건축하는 데에 바치겠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성과 열심만 많이 바친다고 무조건 좋아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 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물론 예수 안에서 중생한 자라도 연약한 체질과 아직 잔재한 본성 때문에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 하나님도 신자가 종교 행위를 통해서나마 그런대로 선해지려는 노력이나, 양심의 가책을 어떻게 하든 씻어보려는 그 마음을 이해 하신다. 하나님이 이해했다고 나쁜 것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장발장이 은촛대를 훔친 그간의 사정을 이해는 해도 죄를 범한 것은 분명하듯이 말이다.
자비와 긍휼에 한이 없으신 하나님인지라 어떤 잘못도 이해하고 용서해주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신자에게 원하는 대로 행하지 못했기에 이해와 용서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럼 신자가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은 그분의 마음에 합하도록 자신을 거룩하게 바꾸며 그분의 뜻대로 따르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바꿔 말해 그분은 신자가 죄악을 참회하며 고치기 전까지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를 향해 예비해 놓은 일이나 은혜의 시행을 유보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면죄부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종교개혁을 했지 않는가? 인간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씻음이 가능하다. 신자가 진정으로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이미 죄 사함을 완벽하게 받은 것이다. 그리고 입술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고 그분의 은혜 가운데서만 살겠다고 고백하는 절차 즉,세례나 침례를 거치면 공식적인 면죄부를 손에 받아 쥔 셈이며 그 효과는 영원히 간다.
인간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완전한 경건에 이를 수 있다고 자신하거나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영적 교만이다. 인간 스스로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 당신께서 비천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지 않는가? 독생자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영단번(永單番 once-for-all)의 제물로서 효력을 가진다. 인간의 썩어빠진 의로는 모두 당장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아무 죄 없으신 그분의 죽음이 인간이 받아야만할 형벌을 대신하였기에 우리가 의롭다는 칭함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된 후에 짓는 어떤 죄라도, 간혹 하나님의 징계는 받을지라도, 영원한 심판에서 아예 배제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5:8,9 8:1)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에는(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 (kjv성경외는 다 빠져있음)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em which are in Christ Jesus,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
'예수'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로서 육신의 예수님이 영이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것 처럼, 우리도 육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죽여서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성도들로서 그들이 죄를 이겨 정죄함이 없슴.
그런데도 매주 면죄부를 사는 기분으로 헌금하면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모르거나 잊고 있는 셈이다. 믿음의 고백으로 얻은 교회의 종신 회원권에 이미 무료 종신면죄부도 함께 붙어 있음을 모른다. 혹시라도 본인이 예수를 모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예수님이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죄를 씻어주는 십자가 은혜에 들어와 있지 않으므로 아무리 많은 액수를 지불하고 면죄부를 사본들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돈을 엉뚱한데다 헛되게 낭비한 꼴이다.
부적을 사는 것은 더 나쁘다.
그런데 면죄부를 사는 기분으로 헌금하는 것은 신앙적으로는 틀렸지만 도덕적으로 봐줄 만한 여지가 조금은 있다. 어쨌든 스스로 죄책감은 느꼈기 때문이다. 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은 부적을 사는 기분으로 헌금하는 것이다. 불의의 사고나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 현재 하고 하는 일이 형통하게 해달라는 것이 부적을 사는 뜻이다. 바치면 더 부어주시고 넘치게 주신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진실로 온전한 헌금을 하면 하나님의 놀랄만한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한국 교회가 “진실로 온전한”이라는 말은 빼고 단순히 헌금을 하면 복 준다고, 그것도 “많이 하면”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가르친다. 나아가 하나님의 “놀랄만한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고 현실의 형통과 안락이 아예 보장 되는 것처럼, 그것도 몇 배로 더 받을 수 있는 양 가르친다.
작금 하나님의 은혜가 저질화 되어서 너무 남용되고 있다.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극히 일부분, 그것도 결과적 모습일 뿐이다. 신자에게 아무 공로 자격 없어도 주시는 것이 은혜다. 헌금하면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이미 헌금이 공적이 된다. 그렇다고 헌금을 비롯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려는 원죄의 성향이 신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펄펄 살아 있다. 아무 공로 자격 없다는 것이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겸손을 행하는 정도로는 많이 부족하다. 자칫 그런 가운데도 은근히 자신을 치장하고 자랑하는 것이 인간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깨트리고 죽여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데까지 낮아지고 완전히 자아가 비워져야만 자신의 공로와 자격이 없어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통로를 거치지 않고선 신자에게 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반드시 십자가를 거치니까 즉, 참다운 은혜가 되니까 아주 놀랍고 신비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많이 바치면 그 몇 배로 넘치도록 되돌려 주신다.”고 가르칠 때에 가장 잘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무엇인가? 말라기 3:10 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니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온전한’의 뜻을 수리적 계산으로 정확하게 10%를 바쳤는지, 못 미치게 바쳤는지 여부에만 신경을 쓴다. 예컨대 세금 공제 전에 해야 하는지 아니면 세금 뗀 후에 계산해야 하는지 정도 밖에 따질 줄 모른다. 초등하교 저학년생도 1/10 계산 정도는 얼마든지 할 줄 알 텐데 ‘온전한’이 숫자적 의미만 가질 리는 없다. 그런데도 자꾸 계산방법만 따지려 드는 것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내고 대신에 많이 받을 수 있을까?”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는 뜻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지 못해 하나님의 것을 훔친다는 것은 말라기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히 제사장들의 온갖 배역 죄를 책망하는 가운데 한 예로 든 것이다. 너희가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한 죄가 수도 없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을 들면 십일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산술적으로는 십일조를 분명히 채웠다. 그들이 왜 눈먼 희생, 토색한 물건, 저는 것, 병든 것까지(말1:8,13) 바쳤겠는가? 양적으로는 규정대로 따랐다는 뜻이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과 두려움 없이, 쉽게 말해 그분을 우습게 생각하며 바친 것이다.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바친 제물을 통해 자신들의 죄가 사해지는 은혜는 전혀 사모하지 않고 받을 복만 계산했다. 사전에 여러모로(?) 정확하게 계산 된 제물이 하나님의 진노만 더 쌓이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하나님은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라고 한탄하셨을까? 아니 실제로 성전 문을 닫아버렸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400 년간 성전의 동물 희생 제사는 여전히 규정된 숫자를 채우며 드려지고 있었지만 당신의 진리의 계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차 쇠퇴 내지 실종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께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사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을 따로 준비해 놓고 계셨다. 흠이 없는 순결한 어린 양, 예수를 온전한 제물로 받으셨다. 눈멀고, 절고, 흠이 있는 제물이 아니었다.
온전한 십일조란 단지 숫자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치는 자의 믿음의 내용과 삶의 자세와 연관되는 것이다.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서 하나님의 규례대로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온전한 십일조다. 물질을 드리되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과 경외함이 함께 바쳐져야 한다. 또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생명을 누리게 된 것에 대한 온전한 감사가 선행되어져야 한다.
십일조를 바쳤다고 해서 하나님이 뻥튀기 식으로 채워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곳간을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주는지 시험해보라고 하니까 십일조를 정확한 금액으로 바치면 수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만 바라고 있다. 너무나 큰 착각이다. 십일조의 본래 성격이 조건인가? 결과인가? 미리 얼마를 바치면 그것의 열배를 주는 것이 맞는가? 하나님께 이미 받은 것의 10%를 바치는 것이 바른 순서인가? 십일조는 어디까지나 결과이지 조건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자꾸 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며 바치는가? 부적을 사는 기분으로 헌금을 드리기 때문인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부적이란 그것을 지니면 악귀가 자동으로 물러간다는 뜻이다. 십일조도 하기만 하면 쌓을 곳이 없도록 자동으로 채워주신다고 믿고 있다. 명칭과 방식만 조금 다르지 돈으로 복을 사겠다는 의도는 완전히 똑 같다. 일천번제가 그렇다.
온전한 십일조의 의미
그럼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겠으니 시험해보라는 약속의 정확한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의외로 간단하다. 이 말씀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숫자적으로는 절대 모자라지 않는 10%를 바쳤다. 하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산술이 아니라 “온전한”에 있었다.
“제발 한 번이라도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보아라 그게 내 소원이다 이 외식하는 제사장들아!” 하나님의 한탄이자 절규였다. 더 풀어서 말하면, “헌금이나 십일조에 대해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거짓 목사들아!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가르침에 똑 같이 속아 넘어가는 엉터리 신자들아! 제발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전하게 거룩해져서 빛과 소금의 역할 감당해 보아라!”였다.
하나님이 오죽 답답했으면 십일조를 통해 자신을 시험하면서까지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겠다는 약속을 했을까? 신자가 신자다워져야 한다는 한 가지 일념 때문이 아니겠는가? 창고에 돈으로 채워주는 것이 그분의 신자를 향한 궁극적, 아니 근본적 목적이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돈을 미끼(?)로 삼아야만 그나마 신자가 정신 차려 듣고 또 실천해보려 노력이라도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분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는 오직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는 구절에만 온 신경이 모아져 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어떻게 가르쳤는가?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다 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말3:14,15)
하나님 뜻대로 제대로 사는 것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형통한다고까지 가르쳤다는 말이지 않는가? 신자로서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전혀 가르치지 않고 십일조를 바치기만 하면 복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을 한 번 시험해보라고 가르치는 요즈음의 목사와 다를 바가 어디 있는가?
지금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십일조에 관해 내기 걸 것이 하나 있다.
본문 말씀 그대로 십일조를 많이 바쳐보라. 많이 바칠수록 여러분은 더 많이 복을 받는다. 아니 방금 그런 뜻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해놓고 대체 무슨 뜻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틀림없는 진리다. 제 신앙 양심을 걸고 약속 아니 보장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제 모든 것을 걸어도 된다.
한 번 생각해보라. 십일조로 $100을 드리는 것이 좋은지, $1,000을 바치는 것이 좋은지 말이다. $1,000내는 것이 당연히 훨씬 좋다. 이미 수입이 만 불이 됐으니 천불을 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내는 것이 십일조이지 내면 더 채워주는 것이 십일조가 아니다.
물론 십일조를 하는 신자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
수입의 1/10을 바친다는 것은 보통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받을 복도 바로 그 믿음에서부터 나온다. 이미 온전한 십일조를 바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 사람은 절대 받을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온전히 붙들려 있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따르는 데 있어 세상 물질로는 절대 영향 받지 않겠다는 고백이자, 그렇게 실현하고 있다는 징표가 십일조이지 않는가?
하나님 또한 그런 믿음을 가진 신자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우시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인도하실 것 아닌가? 때로는 환난으로 아니 순교로 이끌 때도 있겠지만 이미 그런 믿음을 가진 신자가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천국의 면류관이기에 아무 장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함으로 넉넉히 또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신자들 가운데 지금은 너무 쪼들리니까 수입에 좀 여유가 생기면 십일조 하겠다는 분들이 꽤 있다.
잘못이자 오산(誤算)이다. 미국같이 돈 가치가 큰 사회에서 아직도 $1,000 수입에 $100 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남는 돈이 $900 뿐이라고 생각하면 큰 부담이 된다. 앞으로 만 불 수입이 되면 천불 십일조 하고도 $9,000이 남으니까 전혀 주저하지 않고 드릴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그렇지 않다. 사람이란 천 불 수입일 때에는 십일조하고 남는 금액이 너무 작게 보이고, 만 불 수입이 되면 그 때는 남는 돈의 여유보다 내는 돈 천불이 너무 많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수입이 적을 때에 십일조 못하는 사람은 어차피 많아져도 못한다.
결국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선 금액의 과다보다는 전체 수입의 10%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이 항상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신자의 믿음이 온전한지 시험하기에는 이만큼 좋은 방식이 없다. 자신의 모든 수입이 하나님이 채워 주신 것일 뿐만 아니라 천 불에서 백 불 빼고 남는 겨우 구백 불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게끔 그분이 보호 인도해주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못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곳간을 어떤 방법으로 채워주신다고 설명했는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4:11,12).”
병충해를 막아 정상적인 풍작을 내어 주겠다고 했다. 의외의 경비지출을 막아주신다는 뜻이다.
또 땅을 아름답게 해주겠다고 했다. 나무 숫자를 갑자기 몇 배로 늘리거나 땅 투기에 성공해 평수를 몇 배로 넓어지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를 하는 신자에겐 다른 경비가 절약되거나, 예상치 않던 방법으로 그만큼 보충되거나, 수입이 더 많은 직장으로 옮겨지는 일은 실제 다반사로 일어난다.
신자에게 천 불에서 백 불 내는 것이 커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신자의 믿음을 견고케 해주셔서 언제 어디서나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요컨대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이야말로 십일조 시험으로 받을 복의 실체라는 뜻이다.
헌금은 의무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잘못된 편견은 헌금이 신자의 의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아니다. 헌금은 신자의 특권이자 축복이다. 왜 헌금이 축복이자 권리가 되는가? 우선 앞에서 말한 대로 믿음이 온전한 신자가 온전한 십일조와 헌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 안에 들어와 있기에. 헌금을 바쳐 보상으로 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기에 헌금도 그 동행의 자연스런 한 모습일 뿐이다.
헌금이 축복이 되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헌금이 어떤 일에 사용되는가? 교역자의 사례비를 드리고, 교회당을 건축하고, 성도간의 교제비용을 충당하고, 주일학교를 운영하는 일들이다. 그렇다고 교회 운영자금이니까 아무 직분도 맡고 있지 않는 나와는 크게 상관없다고 그치면 안 된다. 교회 일은 성경대로만 이뤄지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크고 소중한 일이다. 교회가 했으니까 하나님 일이 아니라 그런 일을 통해 하나님이 직접 일하신다는 것이다.
십일조나 헌금에 충실 하라는 권면을 받기만 하면 언뜻 거부감 내지 주저함부터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여유가 없어서 또는 본성적으로 돈이 아깝기 때문이지만, 그 동안 교회가 해온 일들이 어지간해선 하나님 일처럼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기 쉽게 말해 교회가 제대로 교회답지 못하고 마치 세상 단체처럼 되어서 회비만 과다하게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단체는 회비를 많이 낼수록 발언권이 세어지며 자연히 그런 자에게 사람과 권력이 쏠린다.
돈이 단체를 이끌고 가는 주도적 힘이다. 솔직히 교회에서조차 온갖 회유, 포상, 때로는 강요하는 등 세상 방식으로 헌금을 모으며 또 헌금 많이 한 신자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렇게 모여진 돈도 교회건물치장과 행사와 프로그램의 외형적 확충에만 쏟아 붇는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과 부흥을 위해 또 주위의 미혹된 영혼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인도하는 일에만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 부어야 한다. 현황은 그런 일보다는 교회와 목회자의 자기 치장과 자랑에 더 우선을 두고 있다.
신자들도 헌금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 내지 소요된다는 확고한 인식이 없기에 자꾸만 자기 개인 형편과 연결시키려 든다. 죄를 사해보려는 얄팍한 속임수나 어떡하던 복을 받아보려는 유치한 발상이 앞선다. 당연히 그런 목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헌금의 효율성을 갖고 시비하기 바쁘다.
먼저 하나님 앞에 불만을 터뜨린다. “제가 그만큼이나 헌금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이게 무엇입니까? 그럼 다음부터는 제대로 안 낼 것입니다. 교회 봉사도 그만 둘 것입니다. ... ”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무리 그래봐야 하나님은 그런 불평에는 전혀 귀도 안 기울이신다. 열을 내는 사람만 손해다.
한 번 역으로 생각해보라.
죄를 용서 받거나 당신의 은혜를 받으려는 신자더러 하나님이 돈부터 내라고 한 적이 있는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이미 교회의 무료 종신 회원권을 받았지 않는가? 하나님은 더 이상, 아니 애초부터 그런 목적으로는 헌금을 내라고는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상 아직 교회의 회칙도 읽어본 적이 없는지라 아무 것도 모르고 억지 부리는 꼴밖에 안 된다.
헌금이 하나님 일에 쓰이기보다는 단지 교회 운영자금일 뿐이라는 인식이 많기에 그 투자(?) 효율성만 따진다. 외적으로 당장에 생색이 드러나지 않는 부분, 예컨대 선교비나 교역자들 사례비에 너무 많이 투자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공개적으로 다른 핑계를 대며 반발한다. 자기 교회 행사가 아닌 일이나, 성도들에게 직접적 혜택으로 돌아오지 않는 일에 지출되는 것은 극력 반대한다.
만약 교회가 영적으로 바로 서있고 재정운용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하고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오직 교회의 인도자 되시는 성령님에게 맡기면 된다. 헌금 하고나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테니 손을 놓아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일에 바로 쓰이는지 오히려 더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물론 회계감하는 식으로 교회 모든 장부를 이 잡듯이 뒤쥐라는 것은 아니다.
성도 각자가 영적으로 바로 서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체 교회도 성령의 충만한 인도가 있도록 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하며 서로 자기부터 낮아져야 한다. 항상 깨어서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쇠퇴하는 부분이 있으면 회개하며 말씀대로 바로 고쳐야 한다. 그 반대로 영적으로 바로 서있다면 모두가 교회 일에 감사와 기쁨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아니 그럴수록 틀림없이 더 기승을 부릴 사단과 죄악의 침투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대적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따져 헌금이 교회의 운영자금이란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았다. 당연히 헌금은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잘할 수 있게끔 사업자금으로 드려져야 한다. 그런데도 헌금을 신자 자신의 유익과만 결부시키면, 동업자가 회사의 사업 목표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던 회사 돈으로 자기 배를 채울까 궁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동업자가 많을수록 회사는 순식간에 망해버리지 않겠는가?
투자자는 반드시 회사의 공동 목표 달성을 위해 모든 노력을 강구해야 한다. 때로는 자기 재산을 털어 넣는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회사부터 먼저 살리고 봐야 한다. 회사가 살면 자연히 투자자 개인도 산다. 주님이 신자들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는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신자가 받는 진짜 환난
물론 헌금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는 반드시 천국의 표상으로 함께 모여서 예수 공동체를 결성해야 한다. 또 그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본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나아가 함께 힘을 합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충되도록 해야 한다. 그 공동체를 위해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금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신자는 주님이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에 헌금을 드림으로써 공동출자자(Co‐ownership)가 되며, 또 그분의 일에 동참함으로써 동업자(Business Partner)도 된다. 그런데도 어떤 신자들은 헌금만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생각은 없다. 심지어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주실 복만 챙기려 한다. 자기가 원하는 복을 보장하지 않으면 걸핏하면 다른 교회로 옮기려 든다.
말하자면 회사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연말 이익 배당과 주식판매 차익만 노리는 주식 투자자다. 그것도 쥐꼬리만큼 투자하고선 대박을 벌어볼까 헛된 꿈을 꾸거나, 단기차익만 노려서 이 회사 저회사로 투자처를 바꾸는 투기꾼이다. 그런 자는 헌금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결코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와 권능을 누려볼 수가 없다. 하나님과 동업하는 자리에 서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설립한 교회라는 회사에 투자하라는 초대에 응하는 것이 헌금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주 전체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동업자가 되는 것이다. 그 일이 신자가 마지못해 할 임무인가? 기꺼이 나서서 기필코, 그것도 끝까지 전부 다 찾아 먹어야 할 축복 내지 권리인가?
누구라도 동업을 억지로 강요하는 법은 절대 없다.
서로 간에 의기투합하지 않고는, 특별히 초대 받은 동업자가 스스로 만족해야 참여할 수 있다. 헌금을 통해 베풀려고 예비해 놓으신 당신의 축복을 하나님은, 교회나 인간 목회자는 몰라도, 절대로 신자들에게 강매(强賣)하지 않는다. 아니 원래 권리와 축복이란 강요하지 않아도 수혜자가 마땅히 알아서 찾아 먹는 법이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신자가 예수 믿어 따로 더 받을 축복은 사실상 없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복의 전부다. 신자가 온전히 그분과 동행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일은 이뤄지고 주님의 영광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분의 일을 맡음으로써 누리는 기쁨은 안 해본 자는 모른다. 반면에 한 번이라도 체험해 본 자는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떠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도 다르다는 것을 절감한다. 평생을 두고 그분의 일만 하겠다고 스스로 소원하고 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바꿔 말해 가정과 직장에서 겪는 경제적, 인간적, 정서적 어려움이 신자의 환난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것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상사일 뿐이다. 나아가 신자에겐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신자의 진짜 고난은 하나님의 동업자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거나 안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투자하라는 요구조차 아직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진정한 신자라면 사실은 당신에게 투자하여 동업자가 되자는 초대를 항상 받고 있다. 신자가 세상, 사람, 쾌락, 죄악, 사단 쪽으로 한눈을 파느라 그분과 동업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헌금하는 것이 아까운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은 이유는 일차적으로 헌금을 일부 숨긴 것 때문이었다. 사도들을 속인 것은 바로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다. 이제 막 태동하려는 기독교 최초의 교회,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에 누룩이 들어와 썩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잘못은 그들에게는 헌금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면죄부나 부적을 사듯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보다는 단기차익만 노려서 투기할 작정으로 헌금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거리가 멀면서, 아니 아예 반대쪽에 있으면서 감히 그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에 더러운 발을 담그려 한 것이다.
지금 그들의 잘못만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도 얼마든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많지만, 아니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도 때로는 그렇게 변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가 왕성하게 많이 설립되었기에 하나님이 당장 벌을 안 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쩌면 너무 많아서 벌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헌금을 많이 정확히 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일에 동업자로 투자하고픈지 따져 보라는 것이다. 혹시나 수시로 예수님을 잡고 있는 내 손에서부터 힘이 빠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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