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사형을 주장하는 목사들을 보면서
입력 : 2009년 10월 17일 (토)
글/이병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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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되면 정치권은 정기국회로 더욱 시끄러워집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이뤄질 '사형제 폐지 특별 법안' 입법 논의를 앞두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비롯한 목사들이 사형제 폐지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2005년에 사형제도 폐지에 반대하는 목사들에 대한 반박문입니다.
사형제는 인간이 존엄하기에 유지돼야 한다(?)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개인의 인권만큼 공동체 구성원의 인권도 강조돼야 한다. 인간 존엄을 근거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지만 인간이 존엄하기에 사형제는 유지돼야 한다." (최성규)
"사형제도는 하나님이 주신 국가 공동체에 공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노아 시대부터 인간 정부에게 주신 제도이다. 전쟁이나 합법적인 사형제도는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살인과는 다른 것이다." (이종윤)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자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권한은 처음부터 정의 실현 차원에서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부여됐고, 오늘날은 정부 당국과 특별히 사법부에 맡겨진 것이며, 사형제 폐지 주장은 단순히 범행자의 인권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생명을 빼앗긴 피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간과한 것이다. 회개란 장기수로 머문다고 해서 반드시 보장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장기수보다 사형수가 죽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회개에 접근할 가능성이 더 많다." (정일웅)
이러한 주장을 일일이 분석하여 반박하고 싶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합시다. 사형제를 적용하되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형제는 존치하되 사형 집행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성경이 고의적인 살인 행위에 대해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사형제를 적용한다. 그러나 성경이 사형제도의 존치를 주장하는 증거를 더 무게 있게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적인 문헌'으로서 성경을 '일반 세속 사회의 법'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극도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김정우)
"사형제 존치의 조건으로 고의적 살인죄에 대한 범주를 명확히 정해야 하며, '삼심 재판제'를 통해 충분한 증거자료에 근거해 살인죄로 판단하는 절차상 적법성이 필요하다.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을 사형에 처하게 한다든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죄에 대해 사형을 시행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이승구)
그러나 법은 권력자에게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공정하게 판결을 한다고 할지라도 법 집행의 오용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정치 권력자들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형제 폐지를 위해서 15년 동안 활동해 온 KNCC는 성명서를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말합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 인간적·세속적으로 보면 배제되어야 할 대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성서적·신앙적 입장에서는 그 누구의 생명도 결코 배제될 수 없다. 소위, 극악무도한 흉악범의 생명이라도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 즉 생명권은 박탈될 수 없는 것이다.
(……)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 '사형에 대한 하느님의 법'을 적용한다면, 모두가 사형선고를 당해야 마땅하다. 그러하지만 이와 같은 인간의 죄성, 타락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인간에 의한, 국가 제도에 의한 사형)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았다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가 아닌가. 그런데 성경에서 '하느님이 사형을 인정했으니 사형 폐지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교회 기관에서 발표하니 이것이 어찌 궤변이 아닐 수 있겠는가."
기독교의 사형제 지지는 성서의 명령이다(?)
사형제의 존폐를 둘러싼 논쟁의 근거는 성서입니다. 사형제를 존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철저하게 성서와 신앙에 입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그들이 인용하는 성서 구절입니다.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 (레위기 24:16)
"남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레위기 24:17)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사도행전 25:11) "내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의 이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누가복음 19:27)
그들의 주장은 하느님이 율법에 사형을 명령하였으므로, 즉 하느님이 사형을 허락하셨으므로 사형제도는 존속해야 하는 것이 성서적이며,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권이라는 인간 중심적인 논리보다는 성서에 근거한 성서 중심적인 논리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죠.
사형제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념적 배후에는 성서가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성서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철저하게 그 말씀을 따르며 지킨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구약성서 특히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율법의 조항들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하는 행위는 여러 가지입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인 사람, 홧김에 일부러 이웃을 죽인 사람, 자기 부모를 때린 사람,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 사람을 유괴하여 죽이거나 종으로 부린 사람, 자기 소가 들이받는 버릇이 있는데 남에게 경고를 받고도 단속하지 않아서 사람을 죽게 한 사람, 짐승과 교접하는 남자와 여자, 간통한 남자와 여자, 동침한 어머니와 아들, 동침한 시아버지와 며느리, 창녀 짓을 하여 제 몸을 더럽힌 제사장의 딸 (불 태워 죽여라), 안식일을 더럽히는 사람,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 제 자식을 몰렉에게 제물로 준 사람,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마법을 쓰는 사람,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사람들,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 다른 신을 섬기자고 꾀이는 사람, 해나 달이나 하늘의 모든 천체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 내 주신 당신들의 하느님으로부터 당신들을 떠나게 하려는 사람, 주 하느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관의 말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
사형제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서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철저하게 그 말씀을 따르며 지킨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웁니다. 그것도 문자 그대로 믿고 지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형당해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독자들 중에서 위의 내용과 전혀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의 기회도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형에 해당할 것입니다. 게다가 사형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창녀 짓을 한 제사장의 딸만 불 태워 죽이고)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지키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살인하는 것을 형제나 자매에게 성을 낸다든가 얼간이나 바보라고 말하는 것에 비유하였는데, 여기에서 벗어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고 성서의 말씀을 모두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문자나 표현은 그 시대와 상황에 따른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과 중심에 있습니다.
사형제 지지는 처음 교회 사람들의 박해와 순교를 잊어버린 배신이다
성서에서 사형을 지지하는 구절을 찾아내서 사형제도의 존속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서를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그 중에 일부분만을 인용하여 자기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그 논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고 준비한 건축자재에 불과합니다. 또한 기독교는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 제국의 종교로 정치권력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전개된 이후에 처음 교회 사람들의 박해와 순교를 잊어버렸습니다.
지금 사형제의 존속을 말하는 사람들도 남한의 현대사 속에서 정치권력과의 결탁이나 그 그늘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형제는 항상 정치·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악용되었습니다. "거짓 고발을 물리쳐라. 죄 없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3:7)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형을 인정했다고 하는 구절과 함께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권력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일말의 안타까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형제의 존속을 주장한 근거인 성서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사도행전 25:11)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한 말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이 구절은 어느 누가 읽더라도 바울이 사형제를 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내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의 이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누가복음 19:27) 이 말씀은 예수님의 '므나 비유'(항거하는 종의 비유)에서 왕이 된 귀족이 자기에게 반대하는 종을 원수로 취급하면서 죽이라고 명령한 말입니다. 만일 이 말이 사형제를 찬성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사형제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구절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앞서 말씀드린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규정한 행위들은 이스라엘 평등 공동체의 근본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 유괴를 하는 행위, 부모를 업신여기는 행위, 부모와 간통하는 행위 등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에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근본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또한 다른 신을 섬기거나 혼백을 불러오는 행위, 안식일을 더럽히는 행위 등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근본을 파기하는 행위입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행위들은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자기의 근본적인 체험을 되돌려서 야훼 하느님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다른 사람들을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종으로 취급하는 행위입니다.
법률의 조항들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졌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사회적인 금기로 인정하던 것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여성의 차별에 관한 것입니다. 세계사 속에서 여성들이 정당한 자유인으로 참정권을 쟁취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또한 구약성서의 모든 율법 조항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일은 불가능할 뿐만이 아니라 그 의미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하느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문자 그대로) 지키기 위해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며, 그것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나 집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명목의 허점을 발견하는 일은 쉽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인간의 현실성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소. 그런데 당신은 이 일에 대해 뭐라고 하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여자의 행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물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성서와 율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백성들이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위치에 있었으며, 그러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간음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입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힘없는 여자라는 생명을 담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남자도 함께 죽여야 하는데, 남자는 없습니다.)
그들의 음모를 훤히 알고 계신 예수님은 몰아붙이는 그들 앞에서 태연하게 침묵하며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정을 다그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속으로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꼼짝없이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또 다시 침묵하시면서 그들을 반대하여 무엇인가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던 그들 모두가 나이 많은 이부터 시작해 돌아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합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죄를 너무나 쉽게 용서하신 것도 아니고, 심판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법적 용어로 말하면, 집행유예입니다. 단순한 용서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의 길을 열어 두고 죄 없는 생활을 향해 도전하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인간의 현실성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에 있습니다. 그 여자가 과거에 무엇이었고 어떤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여자가 어떻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만 동시에 인간을 믿고 인간에게 주려고 한 것을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음모와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음모를 꾸미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자기의 기득권과 논리를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어줍게 인용하면서 왜곡하는 것보다는, 겸허하게 자기를 돌아보며 하느님이 만드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형을 찬성하는 것은 오히려 생명의 소중함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로 가득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낫습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혀서 죽을 뻔한 여인을 용서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예수님의 용서를 본받는 것이 낫습니다.
더 나아가서 합법적인 사형이든 불법적인 살인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안타까워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낫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살라고 만드셨지, 죽이라고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는 것은 하느님의 올바른 뜻을 따라가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의 정당한 열매가 이 가을의 온 들판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출처: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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